“영어 단어 암기, 한자 접목하면 쉬워요”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 “영어 어원은 한자 … 음과 뜻 비슷한 경우 많아



”영어를 배울 때 quick은 빠르다, 이렇게 외우죠. 영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사람들뿐 아니라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도 외우는 방법밖에는 도리가 없어요. 어원을 라틴어나 그리스어에서 찾지만 왜 그런 말이 생겼는지 그 뜻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한자와 비교해보면 쉽게 풀려요. 그렇다면 영어 quick에 대응하는 한자는 무엇일까요? 빠를 곽( )이 있습니다. 비 우(雨) 머리에 새 추( )자를 쓰죠. 비가 오면 새가 피할 곳을 찾아 바빠진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글자예요. 우리의 ‘곽’이라는 발음이 유럽으로 건너가 ‘퀵(quick)’이 된 것이죠. 발음은 김치가 일본으로 건너가 기무치가 되는 것처럼 변합니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일까요? 사례가 한둘이라면 우연의 일치지만 그 예가 수없이 많다면 우연이 아니죠. quick과 비슷한 말로 soon이 있어요. soon은 빠를 신(迅)자에서 나왔죠. 의미는 같고 음은 모음변화로 달라진 겁니다.”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39)의 풀이를 듣고 있으면 마술처럼 영어와 한자가 하나가 된다. 억지가 아닐까 의심된다면 몇 가지 더 풀이해보자. 박소장은 자신의 이름을 영문으로 표기할 때 ‘Bark’을 고집한다. 박(朴)은 나무 목(木)과 점 복(卜)으로 이루어진 글자이며 박의 음가는 복에서 비롯됐다. 보통 ‘朴’을 성(姓)으로만 알고 있으나 실제 ‘朴’은 나무껍질이라는 뜻. 영어 ‘bark’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개가 짖다’는 뜻 외에 나무껍질이라는 뜻이 있다.

박소장은 발음 면에서 우리의 ‘박’과 영어 ‘바아악’ 사이에는 ‘r’라는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윤활자음’이라고 설명한다. 단어의 의미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않고 단지 발음만 매끄럽게 해주는 자음이다.

육사 재학 시절 한자 해석에 빠져

한편 박-bark, 木-本-book의 관계도 유추해볼 수 있다. 과거에는 원래 나무껍질을 종이 삼아 책을 만들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된다. 나무껍질 ‘bark’과 책 ‘book’이 완전히 다른 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구미의 어원학에서는 어근 ‘eu-’가 그리스어계 접두어로 good, well, pleasant 등의 뜻을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 천, 따 지’식으로 암기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왜 ‘eu’가 좋다는 의미일까. 박소장은 ‘eu’의 어원을 ‘즐거울 유(愉)’에서 찾는다. euphony(좋은 음조), eulogy(찬사), eugenics(우생학), euphoria(행복감), eupepsia(소화 양호), euthanasia(안락사)와 같은 단어들이 유(愉)에서 비롯됐다.

여기서 한발 나아가 ‘eu’의 어원인 즐거울 유(愉)를 해부해보자. ‘愉’는 마음 심(心)과 통과할 유(兪)가 합쳐진 글자다. ‘兪’는 사람(人 혹은 들 入), 배(舟), 내(川)의 결합으로 사람이나 짐 따위를 실어 강 저쪽 편 목적지에 도달하게끔 배에 태워주는 형상을 나타낸다. 결국 즐거울 유(愉)는 위험이나 시험 따위를 무사히 통과하거나 어려운 일을 넘겨 즐겁고 기쁜 모습을 표현한 글자다.

이런 식으로 박소장은 ‘dawn’은 새벽 단(但), ‘you’는 너 여(汝), 접두어인 ‘cern-’은 고를 선(選), ‘yearn’은 그리워할 연(戀)과 연결시킨다. 결론적으로 상당수의 영어 어휘는 우리말을 알파벳이라는 소리글자로 표기한 것일 뿐 의미는 같다는 설명이다. 즉 우리말이 정음(正音)이라면 중국어나 일본어, 영어는 변형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박소장의 주장과는 반대로 영어가 한자와 우리말에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닐까 의심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박소장은 “한자는 자형(字形), 자음(字音), 자의(字意)가 모두 존재하지만, 서양 언어는 어원을 밝혀줄 자형이 없다”면서 “어원을 밝힐 수 없는 소리문자가 동양 언어에 영향을 주었을 확률은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내용출처:한류열풍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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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민족의 국통과 신교문화

우리 민족의 뿌리역사 왜곡의 가장 큰 문제는, 역사를 개척한 주인공의 인물사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인물사가 모두 신화로 채색되어[환국-배달-고조선-북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뿌리 역사에 관한 내용이 송두리째 빠져 있습니다. 왜곡된 한민족사를 바로 잡는 핵심명제는 끊어져 버린 우리의 국통과 신교 문화 의 도통맥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환인은 동서 시원문화의 뿌리조상이며, 백두산에 오시어 동방문명을 개척한 환웅은 한민족사의 시조신이며, 단군은 한민족 문화시대를 뿌리내린 분 입니다.
따라서 한민족사의 국통맥은 [ 환국 - 배달 - 조선 - 북부여 - 고구려.백제.(전)신라.가야 - 대진국(발해). 통일신라(후신라) - 고려 - 조선 - 임시정부 - 대한민국 ] 입니다.


 

한민족과 인류문명의 뿌리 - 환국(桓國)

우리 민족문화의 뿌리는 천산(天山) 동방에 자리한 광역동방문명권의 환족(桓族)입니다. [삼국유사] [고조선기]에 도 우리 민족의 시원역사에 대해, [석유환국(昔有桓國)] 즉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민족의 문명뿐 아니라 동.서 인류문명의 뿌리되는 세계 최초의 시원문명국가는 '천산(天山, 7200m )의 동방'에 위치한 광명의 나라, [桓國]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인류의 아버지 문명인 환국은 시베리아 전역에 위치하고 있었 으며, 남북 5만리의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 옵니다. 이 환국의 문화는 인류문명사의 제 2변기라 할 수 있는 약 6천년 전, 기후변동에 따른 인류의 이동과 더불어 동서 사대문명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하)으로 흘러 들어 갔습니다.

동방 한민족사의 기원 - 배달국(倍達國)

동서 4대문명권은 본래 약 1만년 전의 환국으로 부터 분기해 나간것입니다. 그런데 이 환국의 정통정신을 계승한 인물은 누구 일까요? 환국 말경에 환인(환국의 통치자)은,
'서자부(庶子部)의 수장(首長)인 환웅에게 인간을 널리 구제하라는 명(命)을 내리시어, 동방의 태백산으로 파견하였습니다. (일연, 삼국유사, 고조선기 참고)
원시의 미개생활을 하던 동방 땅의 인간을 널리 개벽시켜 구제하고 싶은 간절한 꿈을 간직하고 있었던 환웅은, 환인 께서 종통계승의 신권의 상징으로 내려 주신 천부인 3개와 동방문명 개척단 3천 명을 이끌고, 동방의 태백산에 정착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1대 배달 환웅은 원주민인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을 통합하여, 3천 명을 이끌고, 동방의 태백산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1대 배달 환웅은 원주민인 웅족과 호족을 통합하여 3천명의 문명 개척단과 함께 수도를 신시에 정하고 나라 이름을 배달[倍達]이라 하여 새 나라를 건설하셨습니다. [곰과 호랑이는 동물이 아닌 토템사상에 의해 족호를 나타낸 것임] 이때 환웅천황은 신교 신앙을 기반으로 신시에서 배달나라를 일으키고, 백성에게 천경신고(天經神誥: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치고 삼신상제(三神上帝)님의 진리로 백성을 교화하였습니다.


동아문명의 종주 - 단군임검의 고(古)조선시대

고조선의 시조 단군성조는 배달의 말기, 신묘(辛卯, 서기전 2370)년 5월 2일에 탄생하였습니다. 신인(神人)의 덕으로 원근(遠根)에서 친송을 받아오던 단군성조는 38세 되는 무진(戊辰, 서기전 2333)년에 배달국 말기의 혼란을 바로 잡고 아사달에서 천제로 추대되어 제위에 오르셨습니다.
단군성조는 환국과 배달국의 정통정신을 계승하여 옛 신시(神市)의 신교(神敎)정신을 크게 부흥시킨 분입니다. 이 신교 문화는 한민족 고대문화사상의 총결정체로서 고조선 문화의 정치제도, 종교신앙, 경제, 풍속, 지리와 당시 동북아의 국제관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관건이 되는 열쇠 입니다.
고조선 시대는 동방문명권을 통일하고 '황하.양자강 유역, 만주, 한반도'에 이르는 동아시아의 대부분을 통치한 한민족 사의 최대의 전성기 였습니다. 단군성조는 고조선의 전 영토를 삼한(三韓:진한,번한,마한)으로 나누어 진한(만주)은 단군전체가 직접 통치하고, 마한(한반도)과 번한(요서,북경일대)은 부단군격인 왕을 두어 다스렸습니다. 당시의 요임금 과 그를 계승한 순은 단군성조 관경(管境)의 제후였습니다.
단군의 고조선 왕조는 모두 47세 단군 열조가 2,096년동안 다스렸습니다. 이 시대가
바로 동아시아 전역을 광역동방 문화권으로 묶어두고 통치한 고대 한민족사 최대의
전성기이며 유.불.선.기독교 문화의 뿌리인 삼신 신앙의 신교문화 융성기였습니다.

<내용출처:한류열풍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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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 상계신(환인) 중계신(환웅) 하계신(단군)이 몸붙여 의탁할 곳이 없나니 환부역조하지말고 잘 받들기를 글로써 이렇게 경계하노라.(도전 5:259:20)

한민족사의 국통

1. 삼성조시대

환국(환인)서기전7199~3898(3301년)
배달(환웅)서기전3898~2333(1565년)
조선(단군)서기전2333~ 238(2096년)

2. 열국시대

북부여 서기전239~58년
남삼한-마한,변한,진한(서기전194~서기8년)
최씨낙랑국(서기전195경~서기37년)
동옥저

3. 사국시대

고구려(서기전58~서기688)
백제(서기전18~서기660)
신라(서기전18~서기668)
가야(서기42~서기532)

4. 남북국시대

대진국 발해(668~926)
통일신라(후신라,668~935)

5. 고려(918~1392) 요,금,원

6. 조선(1392~1910) 청

7. 임시정부(1919~1945)

8. 남북분단시대

대한민국(1948~)

북한(1948~)


 

<내용출처:한류열풍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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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시조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동이족이다. 역사서 [사기]를 보면 그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우리 민족이 중국의 선진문명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많다.

모두 사대적, 식민적 역사관에 입각한 왜곡된 역사교육의 결과물이지만 이것은 결코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중국의 역사는 그 반 이상이 우리 옛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다.

중국 문명의 시작은 우리 선조인 동이족(東夷,큰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는 뜻)이 중국 한족의 옛 이름인 지나족에게 선진문명을 전해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중국의 시조인 상황오제는 누구인가? 먼저 우리의 상고사를 알아야만 이애할 수 있다. 중국의 전설적 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삼황오제는 바로 우리의 배달국 시대(한웅천황)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즉, 중국 상고사보다 우리 민족의 상고사가 훨씬 먼저 그 문명의 꽃을 피웠고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상고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먼저 한국시대(BC7197-BC3897 한인시대)-배달국 시대(BC3897-BC2096 한웅 천황시대)-단군조선 시대(BC2333-BC238 또는 고조선)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단고기])

여기서 삼황오제란 태호복희, 염제신농, 황제헌원이 삼황(三皇)이며, 소호, 전욱, 제곡, 제요(요임금), 제순(순임금)의 오제(五帝)를 말한다.

중국의 사학자 사마천이 쓴 [사기]를 보면 소호는 황제헌원의 아들이며 전욱은 황제의 차자인 창의의 아들로 황제의 손자이다.

제곡은 소호의 손자로 황제의 증손이라 하였고 제요는 제곡이 제후 진봉의 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로 황제의 고손이라 하였다. 따라서 삼황오제는 모두 한 가족이었으며 동시에 이들은 모두 동이족이었다.

대한국사(大韓國史)기록을 살펴보면 태호복희는 우리 배달국 시대 제5대 한웅인 태우의 12번째 아들이었다. 또한 염제 신농은 8대 안부련 한웅 말기에 살았던 웅씨의 갈래로 강수에서 병사를 감독한 소전이라는 자의 아들이었다.

황제 헌원 역시 이 소전의 갈래로 짐승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죄로 헌구에 유배된 공손이란 자의 후손이며 헌원이라는 이름은 헌구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제10대 갈고 한웅때 "신농의 나라는 경계가 공상에 있었다"하였고 신농을 열산씨라 하였으며 고시씨의 방계지류라 하였다.

즉, 이러한 기록들에 비추어 미루어보면 중국의 시조인 신농과 헌원은 배달국 시대의 사실적인 인물들로 환웅천황의 치세 속에서 한 지역을 담당하던 제후에 불과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황제헌원이 활동하던 시기는 배달국 제14대 한웅인 치우천황(BC2707-BC2598)과 같은 시대이다.

치우란 "우뢰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으로 전쟁에서 한번도 패한 적이 없다하여 전쟁의 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승리를 상징하는 붉은악마들의 심볼이 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중국 산동성 동평군에는 치우천황의 능이 있으며 진나라와 한나라 때에는 매년 10월에 치우의 능에서 제사를 지냈고 한나라의 태조 유방도 전쟁에 출전할 때에는 꼭 이곳에 들러서 승리를 기원하는 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렇게 중국의 시조인 삼황오제가 동이족이라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다. 하지만 중국의 사서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단군조선의 실체를 무시하고 동이족을 한낱 오랑캐로 폄하하고 있으니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랫동안 중국은 자신의 역사적 열등감을 감추고 주변나라를 쉽게 지배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작업을 수세기에 걸쳐 계속해 왔다.

진시황의 분서갱유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반대로 우리 민족에게 지나족이 수세기동안 위협하고 왜곡하고 싶어할 만큼 훌륭하고 위대한 선조들의 역사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상고시대에는 우리가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중국이 우리의 동생나라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중국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강단사학자들조차 우리의 상고사를 철저히 무시하고 인정하고 있지 않으니 참으로 비통한 심정이 든다.

이제 우리 후손들은 반도사관, 식민사관, 사대사관을 극복하고 영광스러운 상고사를 복원하여 민족의 뿌리와 얼과 자긍심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고광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민족강사 02-747-8515

<내용출처:한류열풍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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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놀라운 진실(眞實)

우두머리라는 말은 수메르지방에서는 우루(虞婁;우르)라는 말이 되었으며 우르는 소를 의미한다. 우두머리가 소머리라는 뜻임은 이미 알려져 있거니와, 그 우두머리(으뜸)는 간(干)이 되어 신라대에서는 이서간, 마립간등으로 하여 왕의 뜻이 되었고, 몽고족 여진족 등에게서는 칸(汗)이라고 일컬어 진다. 어떻게 불리던 의미는 같다는 뜻이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이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남방의 묘족(苗族)이라 불렸던 오늘날 인도지나(印度支那;인도차이나) 지역의 원주민에게 우리와 같은 생활습속이 다수 남아 있음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바이칼호에서 비롯한 우리 민족이 자연의 변동, 예컨대 홍수-요순의 치수(治水)와 노아의 방주, 수메르신화에 나오는 노방의 원형과 같은 니시루산의 노방 같은 사건들이 거의 같은 형태로 나타남은 그 당시에 전세계적으로 홍수가 범람했었음을 의미한다-에 따라 길을 나뉘어 흩어져 나라를 이루었고, 그 중심세력은 동아시아에 남아 한국(桓國)을 유지하였으며, 그 지파(支派)가 세계로 흩어져 메소포타미아문명을 이루고 인더스문명을 이루며 황하문명을 이루었다는 것을 그저 우스개소리로 치부하고 말 것인가.

그렇게 넓혀가는 것에 거부감이 든다면 오늘날 중화(中華)라고 자존자대(自尊自大)하는 중국인들의 땅이라는 중원을 예로 들어보자.

산해경(山海經)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황제(헌원)가 염제(신농)와 싸울 때 염제의 후손인 치우와 과보가 군사를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했다』

사기(史記) 오제본기에는 황제가 응룡을 시켜서 흉려곡에서 치우를 죽이게 했다고 적고 있다.

한단고기에서는 그 상황을 조금 다르게 기술(記述)한다.

『치우천왕은 구리머리에 쇠이마, 100가지 재주를 가진 인물로서 칼, 창,활등 여러 병기를 만들었다. 탁록의 괴수인 황제 헌원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소호금천(少昊金天)을 보내어 헌원을 물리치고 기주(오늘날 熱河와 河北省), 연주 회대의 땅을 다 차지하였다』

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는 「치우천왕이 회대 땅을 지키시다가 불행하게도 돌아가시니 산동성 동평군에 70자나 되는 높은 묘를 쓰고 진한시대까지 10월 묘사를 드렸다」고 되어 있다.

한단고기에는 또 황제헌원이 죽였다고 하는 것이 치우천왕이 아니라, 그 일족인 치우비(蚩尤飛)라고 적고 있다.

어느 쪽의 기록이 맞는가를 굳이 따질 필요는 없다.

훗날 한고조 유방(劉邦)이 출사하면서 사황제(祠黃帝) 제치우(祭蚩尤)라고 하여 황제와 치우를 함께 제사한 것이 무슨 이유에서일까.

사기에서 치우라는 이름이 옛날의 천자(古天子)라고 한 까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왜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치우는 중국인들에게 군신(軍神)으로 기림을 받았을까.

치우가 단순히 변방에서 준동하던 그들 말대로의 변방 오랑캐의 군주중 하나였다면, 그들의 소위 춘추필법(春秋筆法)이 그러한 표현들을 남겨둘 수 있었을까?

더구나 천자라니!

근세에 이르러, 서량지(徐亮之)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세석기시대의 문화 부족이 맨 처음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근방에 살았는데, 그것은 중국의 전설에 있는 염제 신농의 본족(本族)이다」라고 하였음은 또 무슨 의미일까.

백보를 양보하여 누가 이기고 지고를 굳이 따질 필요없이 추론하여 본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기록들이 곳곳에 남아있음은 당시에 우리의 선조가 서방 서장족(西藏族)의 시조라고 하는 황제와 그 지역의 패권을 놓고 격돌했었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역사는 이긴 자의 편이다.

후세의 승리자는 중국이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지 않은 기록을 남겨두지 않는 것은 철저하다. 당 태종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가 결국 그로 인해 죽게 되었다.

『천하의 힘을 가지고도 작은 고구려군에게 굴복했으니 어찌 된 인가』라고 구당서(舊唐書)와 정관정요(貞觀政要)에서는 적고 있다.

그러나 후일 개찬(改撰)된 신당서에는 「당군이 고구려성 10여개를 빼앗고 4만여 군사를 사살한 반면 당군의 피해는 2,000명의 불과했다」라고 사실을 변조하고 있음을 보면 그들이 어떻게 역사를 기록하는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을 터이다.

경향신문

<내용출처:한류열풍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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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락교수의 이야기 경제학-1]서양은 언제부터 우리를 앞섰나



어떤 사람들은 서양잣대로 볼 때 우리 것은 틀리므로 많이 뜯어고쳐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외환위기 이후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래서 서양인들 중에는 서양 것이면 무조건 흉내내려고 하는 한국인들을 혼이 빠진 사람처럼 보는 이도 있는 것 같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포겔 시카고대 교수는 얼마 전 서울에 와서 한국인들에게 서양을 똑바로 알 필요가 있다고 했다.
어느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이 그렇게 모방하려고 하는 서양이 동아시아를 앞서기 시작한 것은 1750년부터라고 했다.
그 이전에는 동아시아가 서양을 앞섰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필자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여 그의 연구실을 찾아가서 그게 사실인지 물어보았다.
그는 그렇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고 했다.
1750년 전까지는 동서양이 모두 농경사회였는데, 농경사회란 인간이 대자연을 상대로 열심히 농사짓는 사회이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먹을 것이 부족하여 굶거나 병들어 죽기 쉬운 사회인데,
이 점에서 동서양의 차이가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인쇄술, 도자기, 화약, 침술, 측우기 등을 먼저 발명한 동아시아가 서양을 앞선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 교수인 윌리엄 보몰과 앨런 브라인더 교수도 서양은 그 이전 1500년간이나 경제성장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로버트 조지라는 동서양 문화 전문가는 ‘동서양의 시계추’란 책을 통하여
동아시아는 1750년이 아니라 1793년까지 서양을 앞서 있었다고 했다.
그는 종이의 발명과 사용에 있어서 동아시아는 서양을 1400년 앞서 있었고, 도자기는 1700년, 우산은 1200년, 성냥은 1000년, 혈액순환은 800년이나 앞섰다고 했다.
어떤 동아시아 문화 전문가는 중국은 이미 2000년 전에 비단으로 거의 2000 가지의 색깔을 낼 수 있을 정도였으니 그 때의 동서양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많은 경제학자들은 서양이 동아시아를 확실하게 앞서기 시작한 해를 1776년으로 잡는다.
그 이유는 그 해에 애덤 스미스가 나라를 잘 살게 하는 과학적 방법을 제시한 ‘국부론(國富論)’을 펴냈고, 영국은 그 처방에 따라 국력을 본격적으로 키운 결과 세계 최고의 강국이 되었다.




또한 그 해에 미국은 마침내 독립국가가 되어 세계 최강의 부국(富國)이 되는 첫발을 내디뎠고, 수백년간 세계 최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비전 곧, ‘생명, 자유 및 행복(Life, Liberty and Happiness)’을 독립선언서에서 잘 밝혔고 이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애덤 스미스의 처방을 그 이후 줄곧 잘 따랐다.
경제학이 학문으로서 자리잡은 것도 이때부터이다.


요약하면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들이 동아시아를 앞서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그 이유는 ‘국부론’의 과학적인 경제처방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동아시아가 서구선진국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 것은 우리의 사상, 인간성, 문화가 모두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이 처방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도 1960년대부터 이 처방을 따른 결과 경제성장률 면에서 서양을 능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내용출처:한류열풍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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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 구경하다가...혹시나 하는 마음에 디카로 찍어보았지만..다 실패...- -;ㅣ;;하다가..
겨우 한장 찍음...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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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스타킹-Paul potts, 김태희 출연(2009년 6월 20일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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