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표기는 일제의 계략"

알파벳순 Japen 뒤로가게 Corea서 바꿔

13세기 이후 600년 넘게 ‘Corea’로 표기한 우리 나라의 영문 국호가 ‘Korea’로 바뀐 것은 일제의 치밀한 식민지배 정책의 일환이라는 북한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나왔다.

영문 국호가 바뀐 과정은 최근 한국일보 주최로 평양에서 열린 남북 역사학자 공동학술토론회를 취재하기 위해 방북한 본사 취재진이 북한 학자들로부터 입수한 연구 논문에서 처음 밝혀졌다. 북한의 역사ㆍ언어 학자들은 지난해 12월 26일 대대적인 학술대회를 열어 일제의 국호 바꾸기 과정을 추적한 보고서 12편을 발표했다.

이 논문들에 따르면 일제가 우리 국호 표기를 ‘Korea’로 정한 것은 영문자 표기 순으로도 조선이 일본에 종속됐음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일제는 1909년 7월 26일 조선 정부와 조인한 ‘중앙은행에 관한 각서’ 영문판에 우리 국호를 ‘Corea’로 쓰는 등 조선과 체결한 각종 영문 조약에는 ‘C’로 표기했다. 이후 외교권을 박탈한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통감부 관보를 비롯한 문서에는 대부분 ‘Korea’로 써 두 표기를 병용했다. 그러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을 앞두고 만든 병합준비위원회가 일부 이견에도 불구하고 가쓰라 타로(桂太郞) 내각수상 등의 주장에 따라 ‘Korea’로 일원화했다.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공명성 연구실장은 “일본은 통상 외래어 표기에 적용하는 전자법(轉字法ㆍ소리가 아니라 문자 정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방식)에 따라 ‘K’로 통일했다고 하지만 우리 국호가 ‘Corea’로 널리 쓰인 것이 한글 창제ㆍ보급 이전이기 때문에 논리에 맞지 않는다”며 “우리 국호 표기는 역사 어원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공 실장은 “올림픽이 명실상부한 국제 대회가 된 1908년 제4회 런던 대회 이후 나라별 입장을 영문 표기 순으로 한 점을 고려해 ‘Korea’ 표기를 강제, 일본의 지위를 국제사회에 부각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우리 국호는 19세기 말까지 유럽의 문서와 지도는 물론 20세기 초반을 전후해 외국과 체결한 각종 조약서에서 대부분 ‘C’로 표기됐다. 유럽에서 세계지도 간행이 활발했던 16세기 초~19세기 말의 세계ㆍ아시아 지도 20여 종 가운데 대부분이 한반도를 ‘Corea’로 썼다. 하지만 20세기 초 이후의 유럽 지도에는 이 표기가 ‘Korea’로 싹 바뀐다.

흥미로운 것은 북한의 연구가 지난해 월드컵 때 ‘Corea’라는 응원 구호가 등장한 데 착안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연구를 주도한 주진구 조국통일연구원 부원장은 1일부터 서울에서 열리는 ‘평화와 통일을 위한 3ㆍ1 민족대회’에 북한 학자들과 함께 참가해 이 내용을 설명하고 남북 공동연구를 촉구할 예정이다.

북한 학자들의 논문을 검토한 안병욱(安秉旭) 가톨릭대 인문학부 교수는 “남북을 통틀어 국호 영문 표기 첫 철자가 ‘C’에서 ‘K’로 바뀌는 과정을 학문적으로 광범위하게 연구한 것은 처음”이라며 “그러나 주장의 근거 자료들이 충실하게 제시돼 있지 않은 점이 아쉬우며 앞으로 남북학자들의 더욱 활발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내용출처:한류열풍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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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1월 19일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제독(李舜臣提督;1545.3.8.- 1598.11.19)이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전투중에 54세를 일기로 순국하신지 4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여러 나라의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생도들에게 역사적으로 유명한 세계 4대 해전(世界四大海戰)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 B.C. 480년 그리스의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제독의 살라미스(Salamis)해전

- 1588년 영국 하워드(Howard) 제독의 칼레(Calais) 해전

- 1592년 거북선을 앞세워 승리를 거둔 이순신(李舜臣) 제독의 한산대첩(閑山大捷)

- 1805년 영국 넬슨(Nelson) 제독의 트라팔가(Trapalgar) 해전 등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순신 제독의 승리는 가장 값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07년 막강한 러시아 극동함대(露西亞 極東艦隊)와 싸워 이김으로써 전세계를 놀라게 한 일본의 토고제독은 주위에서 그를 이순신 제독과 같은 위인이라고 칭송하자 이에
“나의 공로를 영국의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 이순신 제독의 업적에는 따라갈 수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순신 제독은 국가를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서 구한 세계적인 위인으로 존경 받고 있으며, 그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거북선(龜船)은
미국 워싱톤의 전쟁기념관 (War Memorial Museum), 영국 해사박물관(Maritime Museum), 중국, 독일, 불란서, 캐나다 등 세계 각지의 역사기념관(歷史紀念館)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순신제독 관련 말말


글은 조금 오래된 글입니다...

읽어보면 꽤, 흥미로울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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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부터 장군으로서 奇正分合의 묘법을 다한 자는 한둘에 그치지 않는다. 나폴레옹이 '全으로써 그 分을 쳤다'라고 하는 것도 이 뜻에 틀림없다. 그런데 해군장군으로서 이를 살피면 먼저 동양에 있어서는 한국의 장군 李舜臣, 서양에서는 영국의 장군 넬슨을 들지 않으면 안된다. 이순신은 실로 蓋世의 海將이다. 불행히도 생을 조선에 태어났기 때문에 勇名도 智名도 서양에 전하지 않고 있지만, 불완전하지만 임진왜란에 관한 문헌을 보면 실로 훌륭한 해군 장군이다. 서양에 있어서 이에 필적할 자를 구하면 확실히 네덜란드의 장군 로이텔(Ruyter Michiel, 1607~1678) 이상이라 하지 않으면 안된다. 넬슨과 같은 사람은 그 인격에 있어서 도저히 어깨를 견줄 수 없다. 이 李장군은 실로 長甲艦의 창조자이며 300년전에 이미 훌륭한 해군전술로써 싸운 戰將이다. 야간의 경계법이라든가 또는 '붐스'의 응용이라든가 실로 감복할 것이 많다. 사람들은 방어수뢰를 공격수뢰로 전환한 우리 해군의 큰 업적을 떠들 것이나, 이것은 과연 후세에 전하여 자랑할 자격이 있다. 그러나 어찌 알랴, 李장군은 이미 300년전에 '붐스'를 공세작전에 이용했던 것이다. 벽파정에서 管正陰의 전사는 이 소식을 전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여간 이 蓋世의 해장 이순신은 견내량의 해전에서 확실히 포위, 집중포화의 전술을 썼다고 보인다."
(해군대좌 사토오 데츠다로, '帝國國防史論', 1908)

"이순신은 서양 사학가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그로 하여금 넉넉히 위대한 해군 사령관 중에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 정신인 불굴의 공격 원칙에 의하여 항상 鼓舞된 통솔 정신을 겸비하고 있었다. 어떠한 전투에서도 그가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의 물불 가리지 않는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은 아니었다. 그는 전투가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서 넬슨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 영국인으로서는 넬슨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해군제독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기란 항상 힘든 일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인정될 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고 전투 중에 전사한 이 위대한 동양의 해군 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영국 해군 준장 G.A.Ballard,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 New York, 1921)

위 두 글은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의 전략 전술'(문화관광부-전쟁기념관)에 있는 글들입니다.



"저를 넬슨과 비교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나 이순신 장군과는 감히 비교할 대상이 못됩니다. 무릇 전쟁에서 군인의 몫은1%요 국민의 단합된 힘이 99%입니다. 넬슨은 온 국민의 성원과 지지를 받으면서 전쟁을 치렀고 이순신 제독은 온갖 시기와 모함을 무릅쓰면서 싸웠습니다. 이 점 하나만 보더라도 저는 이순신 장군의 비교 대상이 못되며 그분(이순신 장군)이 보여준 전략도 제가 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도고 헤이하치로 연합함대 사령관, 동해해전 승전축하 리셉션에서)

이 말은 아주 유명한 말이죠. 이 글 출처는 엉뚱하지만 애니메이션 잡지 '모션'이 난중일기를 소개하면서 덧붙인 글입니다.



"세계제일의 해군 장군인 조선의 이순신을 머리에 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인격, 그의 전술, 그의 발명, 그의 통제 능력, 그의 계략, 그의 용맹, 그 모든 것이 최고라고 진심으로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가와다 이시오 소좌, 동해해전 직전 이순신 장군 영정에 빌며 한 말)

이 말은 '일본인이 쓴 조선왕조 멸망기'(가다노 쯔기오 저) 라는 책에 나옵니다.

이 글은 하이텔 군사동호회에서 퍼온 글입니다. 저자는 김정민이란 분입니다. 저자께는 허락받지 않고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외국인들이 알고있는 이충무공
언젠가 홈월드(우주에서 함대전을 벌이는 벌이는 3차원 전략 시물레이션 게임입니다) 에서 영국인들을 본 적이 있었다. 스코틀랜드 사람이라고 했던가.
대단한 고수들이었다. 하이퍼 스페이스를 이용한 신출귀몰의 게릴라전과 스트라익
크래프트의 능숙한 운용술. 나는 4번중 그들에게 3번을 맥없이 깨지고 말았다.
그래도 마지막판에서 이를 악물고 플레이하는 나에 대해서 그들은 대단해 하는
눈치였다. 그들은 나에게 물었다. 내가 어느나라 사람이냐고.
나는 솔직히 한국인이라고 하는것이 부끄럽기가 그저없었다. 베틀넷에서의
한국인들의 행패. 그들이라고 모를리 없다. 전세계 게이머들이 알고있는 사실이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인이라고 정직히 대답했다. 다음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들이 던진 질문은 이러한 것이었다.
"do ya know Admiral Yi sun shin"
그의 황당한 질문에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 있었지만 그는 분명 이충무공에 대해
묻고있는 것이었다. 나는 당연히 안다고 대답했다. 한국인이라면 이충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또한 일본에서도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거라고 대답했다. 그 말이
있은후 우리는 한참동안 이충무공에 대해 토론했다. 정말, 생각만 해도
경이롭고,신비스런 일이다. 넬슨이라면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져 있더라도 서양에서
이충무공을 알고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 파트너였던 사람
역시 이충무공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름만 들어봤다고 했고, 나에게 처음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은 한국인보다야 못해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놀랍지 않은가?
학익진도 알고 있었다.
마지막판에서 나의 극적인 승리도 그의 주력함대가
학익진에 완전히 넘어가 버린 탓이었다. 그는 홈월드 최강의 화력이라 할 수 있는
헤비크루저를 무려 13대를 가지고 있었고, 그밖에 미사일 디스트로이어 몇대와
아이언프리깃까지 거의 40대에 육박하는 대규모 함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에비해
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은 미사일 디스트로이어 24대,아이언 프리깃 10대. 나는
언제나 학익진을 시작할 때 처럼 어택버머를 회피모드로 놓고 적 함대를 해집고
다녔다. 에너지가 떨어진 유닛은 즉각 가미가제를 시키면서 계속 유린하자 은근히
화가난 그는 주력함대와 스카웃 수십기를 이끌고 나를 뒤쫓았다. 그러다 내
주력함대가 언뜻 보였지만 그리 당황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길수 있다고
자신했는지 그는 함대를 월 대형으로 해 놓고 그대로 돌진해 왔다. 나는 계속
도망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모든 함대를 학익진으로 돌렸다.
다행히 그의 스카웃은 적극적 모드로 되어있었는지 미사일 디스트로이어가
뿜어대는 미사일에 모두 격추되었고,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서포트 프리깃 몇대와
세부대로 이루어진 멀티건 콜벳 수십대로 완전히 감싸버렸다. 처음엔 자신만만하던
그도 이렇게 넓게 포위되어 버리자 완전히 굳어버린것 같았다. 게다가 나는 미사일
디스트로이어가 그에비해 월등히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포위되어 있는 상황이라면
내가 훨씬 유리할 수 밖에 없었다. 헤비크루저가 많았지만 공격범위로 치면 미사일
디스트로이어에 비해 훨씬 불리하다. 결국 학익진 대형을 넓게 잡았던 나는 월
대형으로 밀집해 있던 그의 함대를 철저히 유린할 수 있었다. 이에는 뒤에서 포위를
한 세부대의 멀티미사일 콜벳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 내가 제일 처음으로 노린것은
역시 몇기의 미사일 디스트로이어. 아이언 프리깃으로 그의 미사일 디스트로이어를
하나하나 찍으니 디스트로이어들은 금방 괴멸하고 말았다.
남은 함선들,특히 헤비크루저들은 선회력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뒤에서 멀티건
콜벳이 쉴세없이 쏴 대는 포에 그대로 다 맞아줄 수 밖에 없었고 나는 결국 미사일
디스트로이어 10대정도만을 잃고 승리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쓴 이 전술을 알고 있다고 했다. 책에서 얼핏봤던 동양 최고의
해군전술가 이순신의 'harpy wing' 대형이 아니냐고. 하피 윙이라. 학익진이 그렇게
알려져 있었나. 진짠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충무공에 대한 극찬을 들으니 기쁘기가 그지없다. 그저 우리나라에서만
최고의 전술가라고 평하는 이충무공이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외국에서도 넬슨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의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 생각만 해도 흐뭇한 일이다.
그의말에 따르면 유럽의 많은 해전전술가들이 이충무공을 넬슨보다 한수 위라고
평하고 있다는데 그게 진짠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럼 모두들 즐통세요^^


 

<내용출처:한류열풍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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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메르 언어와 한국어의 발음비교
이정도 모티브로 닮았다고 주장한다고 정통사학자들이 꼬집는다면 다음의 증거를 제시하겠다. 결정적으로 쐐기를 박는 증거이다.

봉황의 상징과 같은 동양인의 공통점, 역사의 뿌리가 같다면 반드시 닮은꼴이 있기 마련이다. 슈메르의 언어와 현재의 언어와 현재의 한국어를 비교하여 보자.


고대슈메르어 한국어
아누(Annu)[최고 신] 하느님 [하느님,上帝]
Bad 바드 [ 밭 ] 밭 (Bat) [밭, 田 ]
안 (An) [天] 하늘 (ha) [ 하늘, 天 ]
Na 나 [나 1인칭] 나 Na [ 나,我 ]
기르(Gir) 길 (Gil) [路]
Ge 그 [3인칭 ] 그 Ge [ 3인칭 ]
라 (Ra) [~ 에서 ] 로 (Ro) [ 조사 ]
I 이 [1 인칭 ] 이 [지시대명사]
아비 Abi [ 아버지 ] 아비 (Bo) [ 夫 ]
Uhma 움마[엄마 母] 엄마 Uhma [엄마 母]
니므 Nim [ 님 任 ] 님 (Nim) [ 사람 任]

여기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문자와 발음의 변천원리를 간단히 배워두고 넘어가자

음운의 변천은 문화와 유적의 원뿌리를 밝히는데 중요한 수단이 된다.

이와 같이 기초 단어가 의미까지 모두 같다. 특히 조사를 사용해서 문장의 의미가 달라지는 언어는 교착어의 유일한 특징이라 할수 있다. ~로, ~가, ~의 , ~를 와 같은 조사를 사용하는 언어는 교착어가 유일하다.

교착어를 쓰는 종족은 전세계적으로 어떤 민족인가? 동이족 계열 뿐이다. 터키도 교착어를 쓴다. 어순체계가 약간 다른데 터어키에서는 현재에도 학교에서 국사시간에 한국을 형제국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터키의 역사 교과서는 2000년전에는 한국과 터키는 같은 민족이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외 지구촌의 소수종족중에 교착어를 쓰는 곳이 그외 몇몇 종족은 중국의 묘족과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교착어를 사용한다.(이 부분도 민족의 뿌리에서 차후에 자세히 언급하도록 하겠다)



위의 도표에서 보듯이 슈메르의 주신은 아느(Annu), 최고의 신을 뜻한다. 우리말의 하느님, 하늘님, 한울님과 같은 의미이다. 중세 이전에 쓰던 아래아 한눌님 으로 기준하면 이단어는 전부 같은 발음이 된다. 하(아)가 뜻하는 것이 하늘과 위와 남성적인 것이라면 '느'가 뜻하는 것은 땅, 아래, 여성적인 것이다.(누리(땅), 누이(누나) 같은 말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고 며느리, 마누라도 이 어원에서 나온, 여자를 지칭하는 말) 하느님이라는 말은 하늘과 땅 즉 천지를 부모로써 떠 받드는 것이며 모든 사람은 천지부모의 자식이란 뜻이 언어속에 그대로 전해진다. 삼일신고의 내용을 살펴보라. 사람 하나 하나에게 하느님의 씨알이 그대로 내려와있다는 사상과 정확히 일치한다.이것은 우리 민족의 근본사상과 정확히 일치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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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기본단어와 같은것은 발음과 뜻이 수천년을 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음운과 구강구조상 ㅇ,,ㅎ,ㅋ 의 자음은 서로 변천이 되기도 한다.한글 고어 중에서 ᅙ, ᅓ, ᅘ의 발음중 ᅙ발음은 ᅓ, ᅘ 발음은 칸으로 각기 변천한 것으로 보인다. 한자 상으로도 한(汗)과 간(干)은 원래 같은 발음의 글자이다. 한자의 회의자는 특수부수를 넣어서 같은발음으로 다른의미를 만드는 것을 잘알 것이다. 또한 위의 한(汗)의 글자를 순수 우리말에서는 또한 칸으로 읽기도 한다. 1000년전 징기스칸이 세계정복을 할 때 한자로는 성길사한(星吉沙汗)이라 표기했고 또한 징기스칸 이라 했다.성길사한의 이두식 발음이 징기스칸이 아닌가 한다. 같은 한(汗)을 쓴 것이다. 또한 신라시대 왕의 호칭이 거슬막한(汗)이다. 필자는 이문자와 발음이 더 고대로 올라가서는 안(AN)이었을 것이다. 모음은 강약에 따라 (아래아 한)字는 훈도 되고 혼도 되고 한도 된다. 아래 아 ᅙㅏ字의 정확한 발음이 ㅗ와 ㅜ의 ㅏ의 중간 발음임은 독자들은 고등학교때 이미 배우셨을 것이다.



슈메르어 An은 하느님을 뜻한다. 또한 이 An은 제정일치 사회에서 군왕의 표상이 되었다. 원래 제왕이란 우주의 최고신을 대신하여 이땅을 다스리는 성인을 말한다. 고대에서는 그 시대의 최고의 지혜와 덕을 갖춘 성인을 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세습제로 바뀌게 되면서 여러 가지 폐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원래 왕조는 세습제가 아니었다. 선출방식에서 심각한 문제가 드러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습제로 바뀌면서 여러 가지 폐단도 같이 발생하게 된다.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이렇게 변천된것도 그 이유가 있다. 이 역사적 원리를 나중에 설명하겠다. ) 한민족은 하늘과땅의 민족이란 뜻이고 천손민족의 뜻이다. 제왕은 스스로 솔선수범하여 스스로를 희생하고 고난에 놓이게 하여 백성들을 보살피는 그런 존재이다.


또한 지혜와 덕성을 갖추고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서 수많은 백성들을 더 살기 좋고 이롭게 한 존재이다.



슈메르인들이 사용했던 12궁도와 우리의 12간지, 60진법과 60천간, 흑해/홍해와 황해의 오행흔적, 한단고기의 12환국에 묘사된 수밀이(須密爾)와 슈메르는 같은 뿌리라고 단언할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나타난 아카드 문명이 그후 바빌로니아, 아시리아와 힛타이트, 박트리아, 페르샤 등등으로 연결되는데 반해 찬란한 슈메르 문명은 후계를 잃어버린, 바람같은 역사가 되어버렸다. 그들의 문명은 그야말로 불가사의(不可思議) 취급을 받지만, 역사적으로 분명히 바빌로니아-그리스-동로마-아랍(오스만투르크 등)-서유럽 르네상스로 그 계보를 잇는다. 『


인도의 힌두교 사원에서 발견한 나칼 점토판의 해석구절에는 다음 구절이 등장한다.'라마 야나'에 '동방의 미지의 땅에서 미얀마로 온 것'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동방은 바로 태평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태평양일 수도 있고 필자는 고대의 환국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이 번역을 한 처치워드는 슈메르문명의 모체가된 동방의 환국문명을 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또한,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트로아노 고사본'은 유카탄 반도와 고대 마야족에 대한 기록인데, 여기에도 무(MU) 대륙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인도나 미얀마, 이집트에서 발굴된 상형 문자는 모두 나칼 점토판에 새겨져 있는 무 제국의 기호를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직접적인 기록 말고도 무(MU) 대륙이 실재했다는 증거는 세계각지에 흩어져 있다고 처치워드는 주장한다.


이스터, 망가이, 마리아나 제도 등 남태평양의 섬들에 남아 있는 온갖 유적에서 무 대륙의 자취가 발견되고 있고, 유카탄 반도의 우슈말 사원 비문에 새겨진'서방의 나라, 우리는 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는 표현도 그 증거의 하나다. 멕시코시티 남쪽에 있는 피라미드의 비문에는 '어머니 나라의 붕괴를 기념해 세웠다'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제임스 처치워드는 어머니 나라의 붕괴는 뮤대륙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필자는 어머니나라를 슈메르제국이라고 본다. 피라미드속의 왕의 무덤이 만들어지는 연대와 실제 뮤대륙의 멸망의 연대와는 수천년의 시간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뮤대륙의 문명을 이어받은 중간 매개자의 역할을 한 고대 문명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할 수 있을것이다.

슈메르문명과 이집트의 고대벽화를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혹자는 고대의 건축물이 돌무더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 건축물들은 오늘날의 기술로도 건축하기가 간단하지 않은, 매우 정교한 것들이다. 이런 건축물들은 대홍수로 휩쓸려간 여러 유물들과는 달리 아직도 굳건하게 남아 과거의 찬란한 문명을 증거하고 있다.

<내용출처:한류열풍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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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단어 암기, 한자 접목하면 쉬워요”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 “영어 어원은 한자 … 음과 뜻 비슷한 경우 많아



”영어를 배울 때 quick은 빠르다, 이렇게 외우죠. 영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사람들뿐 아니라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도 외우는 방법밖에는 도리가 없어요. 어원을 라틴어나 그리스어에서 찾지만 왜 그런 말이 생겼는지 그 뜻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한자와 비교해보면 쉽게 풀려요. 그렇다면 영어 quick에 대응하는 한자는 무엇일까요? 빠를 곽( )이 있습니다. 비 우(雨) 머리에 새 추( )자를 쓰죠. 비가 오면 새가 피할 곳을 찾아 바빠진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글자예요. 우리의 ‘곽’이라는 발음이 유럽으로 건너가 ‘퀵(quick)’이 된 것이죠. 발음은 김치가 일본으로 건너가 기무치가 되는 것처럼 변합니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일까요? 사례가 한둘이라면 우연의 일치지만 그 예가 수없이 많다면 우연이 아니죠. quick과 비슷한 말로 soon이 있어요. soon은 빠를 신(迅)자에서 나왔죠. 의미는 같고 음은 모음변화로 달라진 겁니다.”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39)의 풀이를 듣고 있으면 마술처럼 영어와 한자가 하나가 된다. 억지가 아닐까 의심된다면 몇 가지 더 풀이해보자. 박소장은 자신의 이름을 영문으로 표기할 때 ‘Bark’을 고집한다. 박(朴)은 나무 목(木)과 점 복(卜)으로 이루어진 글자이며 박의 음가는 복에서 비롯됐다. 보통 ‘朴’을 성(姓)으로만 알고 있으나 실제 ‘朴’은 나무껍질이라는 뜻. 영어 ‘bark’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개가 짖다’는 뜻 외에 나무껍질이라는 뜻이 있다.

박소장은 발음 면에서 우리의 ‘박’과 영어 ‘바아악’ 사이에는 ‘r’라는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윤활자음’이라고 설명한다. 단어의 의미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않고 단지 발음만 매끄럽게 해주는 자음이다.

육사 재학 시절 한자 해석에 빠져

한편 박-bark, 木-本-book의 관계도 유추해볼 수 있다. 과거에는 원래 나무껍질을 종이 삼아 책을 만들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된다. 나무껍질 ‘bark’과 책 ‘book’이 완전히 다른 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구미의 어원학에서는 어근 ‘eu-’가 그리스어계 접두어로 good, well, pleasant 등의 뜻을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 천, 따 지’식으로 암기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왜 ‘eu’가 좋다는 의미일까. 박소장은 ‘eu’의 어원을 ‘즐거울 유(愉)’에서 찾는다. euphony(좋은 음조), eulogy(찬사), eugenics(우생학), euphoria(행복감), eupepsia(소화 양호), euthanasia(안락사)와 같은 단어들이 유(愉)에서 비롯됐다.

여기서 한발 나아가 ‘eu’의 어원인 즐거울 유(愉)를 해부해보자. ‘愉’는 마음 심(心)과 통과할 유(兪)가 합쳐진 글자다. ‘兪’는 사람(人 혹은 들 入), 배(舟), 내(川)의 결합으로 사람이나 짐 따위를 실어 강 저쪽 편 목적지에 도달하게끔 배에 태워주는 형상을 나타낸다. 결국 즐거울 유(愉)는 위험이나 시험 따위를 무사히 통과하거나 어려운 일을 넘겨 즐겁고 기쁜 모습을 표현한 글자다.

이런 식으로 박소장은 ‘dawn’은 새벽 단(但), ‘you’는 너 여(汝), 접두어인 ‘cern-’은 고를 선(選), ‘yearn’은 그리워할 연(戀)과 연결시킨다. 결론적으로 상당수의 영어 어휘는 우리말을 알파벳이라는 소리글자로 표기한 것일 뿐 의미는 같다는 설명이다. 즉 우리말이 정음(正音)이라면 중국어나 일본어, 영어는 변형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박소장의 주장과는 반대로 영어가 한자와 우리말에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닐까 의심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박소장은 “한자는 자형(字形), 자음(字音), 자의(字意)가 모두 존재하지만, 서양 언어는 어원을 밝혀줄 자형이 없다”면서 “어원을 밝힐 수 없는 소리문자가 동양 언어에 영향을 주었을 확률은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내용출처:한류열풍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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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민족의 국통과 신교문화

우리 민족의 뿌리역사 왜곡의 가장 큰 문제는, 역사를 개척한 주인공의 인물사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인물사가 모두 신화로 채색되어[환국-배달-고조선-북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뿌리 역사에 관한 내용이 송두리째 빠져 있습니다. 왜곡된 한민족사를 바로 잡는 핵심명제는 끊어져 버린 우리의 국통과 신교 문화 의 도통맥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환인은 동서 시원문화의 뿌리조상이며, 백두산에 오시어 동방문명을 개척한 환웅은 한민족사의 시조신이며, 단군은 한민족 문화시대를 뿌리내린 분 입니다.
따라서 한민족사의 국통맥은 [ 환국 - 배달 - 조선 - 북부여 - 고구려.백제.(전)신라.가야 - 대진국(발해). 통일신라(후신라) - 고려 - 조선 - 임시정부 - 대한민국 ] 입니다.


 

한민족과 인류문명의 뿌리 - 환국(桓國)

우리 민족문화의 뿌리는 천산(天山) 동방에 자리한 광역동방문명권의 환족(桓族)입니다. [삼국유사] [고조선기]에 도 우리 민족의 시원역사에 대해, [석유환국(昔有桓國)] 즉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민족의 문명뿐 아니라 동.서 인류문명의 뿌리되는 세계 최초의 시원문명국가는 '천산(天山, 7200m )의 동방'에 위치한 광명의 나라, [桓國]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인류의 아버지 문명인 환국은 시베리아 전역에 위치하고 있었 으며, 남북 5만리의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 옵니다. 이 환국의 문화는 인류문명사의 제 2변기라 할 수 있는 약 6천년 전, 기후변동에 따른 인류의 이동과 더불어 동서 사대문명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하)으로 흘러 들어 갔습니다.

동방 한민족사의 기원 - 배달국(倍達國)

동서 4대문명권은 본래 약 1만년 전의 환국으로 부터 분기해 나간것입니다. 그런데 이 환국의 정통정신을 계승한 인물은 누구 일까요? 환국 말경에 환인(환국의 통치자)은,
'서자부(庶子部)의 수장(首長)인 환웅에게 인간을 널리 구제하라는 명(命)을 내리시어, 동방의 태백산으로 파견하였습니다. (일연, 삼국유사, 고조선기 참고)
원시의 미개생활을 하던 동방 땅의 인간을 널리 개벽시켜 구제하고 싶은 간절한 꿈을 간직하고 있었던 환웅은, 환인 께서 종통계승의 신권의 상징으로 내려 주신 천부인 3개와 동방문명 개척단 3천 명을 이끌고, 동방의 태백산에 정착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1대 배달 환웅은 원주민인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을 통합하여, 3천 명을 이끌고, 동방의 태백산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1대 배달 환웅은 원주민인 웅족과 호족을 통합하여 3천명의 문명 개척단과 함께 수도를 신시에 정하고 나라 이름을 배달[倍達]이라 하여 새 나라를 건설하셨습니다. [곰과 호랑이는 동물이 아닌 토템사상에 의해 족호를 나타낸 것임] 이때 환웅천황은 신교 신앙을 기반으로 신시에서 배달나라를 일으키고, 백성에게 천경신고(天經神誥: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치고 삼신상제(三神上帝)님의 진리로 백성을 교화하였습니다.


동아문명의 종주 - 단군임검의 고(古)조선시대

고조선의 시조 단군성조는 배달의 말기, 신묘(辛卯, 서기전 2370)년 5월 2일에 탄생하였습니다. 신인(神人)의 덕으로 원근(遠根)에서 친송을 받아오던 단군성조는 38세 되는 무진(戊辰, 서기전 2333)년에 배달국 말기의 혼란을 바로 잡고 아사달에서 천제로 추대되어 제위에 오르셨습니다.
단군성조는 환국과 배달국의 정통정신을 계승하여 옛 신시(神市)의 신교(神敎)정신을 크게 부흥시킨 분입니다. 이 신교 문화는 한민족 고대문화사상의 총결정체로서 고조선 문화의 정치제도, 종교신앙, 경제, 풍속, 지리와 당시 동북아의 국제관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관건이 되는 열쇠 입니다.
고조선 시대는 동방문명권을 통일하고 '황하.양자강 유역, 만주, 한반도'에 이르는 동아시아의 대부분을 통치한 한민족 사의 최대의 전성기 였습니다. 단군성조는 고조선의 전 영토를 삼한(三韓:진한,번한,마한)으로 나누어 진한(만주)은 단군전체가 직접 통치하고, 마한(한반도)과 번한(요서,북경일대)은 부단군격인 왕을 두어 다스렸습니다. 당시의 요임금 과 그를 계승한 순은 단군성조 관경(管境)의 제후였습니다.
단군의 고조선 왕조는 모두 47세 단군 열조가 2,096년동안 다스렸습니다. 이 시대가
바로 동아시아 전역을 광역동방 문화권으로 묶어두고 통치한 고대 한민족사 최대의
전성기이며 유.불.선.기독교 문화의 뿌리인 삼신 신앙의 신교문화 융성기였습니다.

<내용출처:한류열풍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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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 상계신(환인) 중계신(환웅) 하계신(단군)이 몸붙여 의탁할 곳이 없나니 환부역조하지말고 잘 받들기를 글로써 이렇게 경계하노라.(도전 5:259:20)

한민족사의 국통

1. 삼성조시대

환국(환인)서기전7199~3898(3301년)
배달(환웅)서기전3898~2333(1565년)
조선(단군)서기전2333~ 238(2096년)

2. 열국시대

북부여 서기전239~58년
남삼한-마한,변한,진한(서기전194~서기8년)
최씨낙랑국(서기전195경~서기37년)
동옥저

3. 사국시대

고구려(서기전58~서기688)
백제(서기전18~서기660)
신라(서기전18~서기668)
가야(서기42~서기532)

4. 남북국시대

대진국 발해(668~926)
통일신라(후신라,668~935)

5. 고려(918~1392) 요,금,원

6. 조선(1392~1910) 청

7. 임시정부(1919~1945)

8. 남북분단시대

대한민국(1948~)

북한(1948~)


 

<내용출처:한류열풍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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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시조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동이족이다. 역사서 [사기]를 보면 그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우리 민족이 중국의 선진문명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많다.

모두 사대적, 식민적 역사관에 입각한 왜곡된 역사교육의 결과물이지만 이것은 결코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중국의 역사는 그 반 이상이 우리 옛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다.

중국 문명의 시작은 우리 선조인 동이족(東夷,큰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는 뜻)이 중국 한족의 옛 이름인 지나족에게 선진문명을 전해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중국의 시조인 상황오제는 누구인가? 먼저 우리의 상고사를 알아야만 이애할 수 있다. 중국의 전설적 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삼황오제는 바로 우리의 배달국 시대(한웅천황)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즉, 중국 상고사보다 우리 민족의 상고사가 훨씬 먼저 그 문명의 꽃을 피웠고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상고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먼저 한국시대(BC7197-BC3897 한인시대)-배달국 시대(BC3897-BC2096 한웅 천황시대)-단군조선 시대(BC2333-BC238 또는 고조선)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단고기])

여기서 삼황오제란 태호복희, 염제신농, 황제헌원이 삼황(三皇)이며, 소호, 전욱, 제곡, 제요(요임금), 제순(순임금)의 오제(五帝)를 말한다.

중국의 사학자 사마천이 쓴 [사기]를 보면 소호는 황제헌원의 아들이며 전욱은 황제의 차자인 창의의 아들로 황제의 손자이다.

제곡은 소호의 손자로 황제의 증손이라 하였고 제요는 제곡이 제후 진봉의 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로 황제의 고손이라 하였다. 따라서 삼황오제는 모두 한 가족이었으며 동시에 이들은 모두 동이족이었다.

대한국사(大韓國史)기록을 살펴보면 태호복희는 우리 배달국 시대 제5대 한웅인 태우의 12번째 아들이었다. 또한 염제 신농은 8대 안부련 한웅 말기에 살았던 웅씨의 갈래로 강수에서 병사를 감독한 소전이라는 자의 아들이었다.

황제 헌원 역시 이 소전의 갈래로 짐승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죄로 헌구에 유배된 공손이란 자의 후손이며 헌원이라는 이름은 헌구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제10대 갈고 한웅때 "신농의 나라는 경계가 공상에 있었다"하였고 신농을 열산씨라 하였으며 고시씨의 방계지류라 하였다.

즉, 이러한 기록들에 비추어 미루어보면 중국의 시조인 신농과 헌원은 배달국 시대의 사실적인 인물들로 환웅천황의 치세 속에서 한 지역을 담당하던 제후에 불과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황제헌원이 활동하던 시기는 배달국 제14대 한웅인 치우천황(BC2707-BC2598)과 같은 시대이다.

치우란 "우뢰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으로 전쟁에서 한번도 패한 적이 없다하여 전쟁의 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승리를 상징하는 붉은악마들의 심볼이 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중국 산동성 동평군에는 치우천황의 능이 있으며 진나라와 한나라 때에는 매년 10월에 치우의 능에서 제사를 지냈고 한나라의 태조 유방도 전쟁에 출전할 때에는 꼭 이곳에 들러서 승리를 기원하는 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렇게 중국의 시조인 삼황오제가 동이족이라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다. 하지만 중국의 사서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단군조선의 실체를 무시하고 동이족을 한낱 오랑캐로 폄하하고 있으니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랫동안 중국은 자신의 역사적 열등감을 감추고 주변나라를 쉽게 지배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작업을 수세기에 걸쳐 계속해 왔다.

진시황의 분서갱유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반대로 우리 민족에게 지나족이 수세기동안 위협하고 왜곡하고 싶어할 만큼 훌륭하고 위대한 선조들의 역사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상고시대에는 우리가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중국이 우리의 동생나라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중국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강단사학자들조차 우리의 상고사를 철저히 무시하고 인정하고 있지 않으니 참으로 비통한 심정이 든다.

이제 우리 후손들은 반도사관, 식민사관, 사대사관을 극복하고 영광스러운 상고사를 복원하여 민족의 뿌리와 얼과 자긍심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고광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민족강사 02-747-8515

<내용출처:한류열풍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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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놀라운 진실(眞實)

우두머리라는 말은 수메르지방에서는 우루(虞婁;우르)라는 말이 되었으며 우르는 소를 의미한다. 우두머리가 소머리라는 뜻임은 이미 알려져 있거니와, 그 우두머리(으뜸)는 간(干)이 되어 신라대에서는 이서간, 마립간등으로 하여 왕의 뜻이 되었고, 몽고족 여진족 등에게서는 칸(汗)이라고 일컬어 진다. 어떻게 불리던 의미는 같다는 뜻이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이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남방의 묘족(苗族)이라 불렸던 오늘날 인도지나(印度支那;인도차이나) 지역의 원주민에게 우리와 같은 생활습속이 다수 남아 있음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바이칼호에서 비롯한 우리 민족이 자연의 변동, 예컨대 홍수-요순의 치수(治水)와 노아의 방주, 수메르신화에 나오는 노방의 원형과 같은 니시루산의 노방 같은 사건들이 거의 같은 형태로 나타남은 그 당시에 전세계적으로 홍수가 범람했었음을 의미한다-에 따라 길을 나뉘어 흩어져 나라를 이루었고, 그 중심세력은 동아시아에 남아 한국(桓國)을 유지하였으며, 그 지파(支派)가 세계로 흩어져 메소포타미아문명을 이루고 인더스문명을 이루며 황하문명을 이루었다는 것을 그저 우스개소리로 치부하고 말 것인가.

그렇게 넓혀가는 것에 거부감이 든다면 오늘날 중화(中華)라고 자존자대(自尊自大)하는 중국인들의 땅이라는 중원을 예로 들어보자.

산해경(山海經)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황제(헌원)가 염제(신농)와 싸울 때 염제의 후손인 치우와 과보가 군사를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했다』

사기(史記) 오제본기에는 황제가 응룡을 시켜서 흉려곡에서 치우를 죽이게 했다고 적고 있다.

한단고기에서는 그 상황을 조금 다르게 기술(記述)한다.

『치우천왕은 구리머리에 쇠이마, 100가지 재주를 가진 인물로서 칼, 창,활등 여러 병기를 만들었다. 탁록의 괴수인 황제 헌원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소호금천(少昊金天)을 보내어 헌원을 물리치고 기주(오늘날 熱河와 河北省), 연주 회대의 땅을 다 차지하였다』

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는 「치우천왕이 회대 땅을 지키시다가 불행하게도 돌아가시니 산동성 동평군에 70자나 되는 높은 묘를 쓰고 진한시대까지 10월 묘사를 드렸다」고 되어 있다.

한단고기에는 또 황제헌원이 죽였다고 하는 것이 치우천왕이 아니라, 그 일족인 치우비(蚩尤飛)라고 적고 있다.

어느 쪽의 기록이 맞는가를 굳이 따질 필요는 없다.

훗날 한고조 유방(劉邦)이 출사하면서 사황제(祠黃帝) 제치우(祭蚩尤)라고 하여 황제와 치우를 함께 제사한 것이 무슨 이유에서일까.

사기에서 치우라는 이름이 옛날의 천자(古天子)라고 한 까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왜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치우는 중국인들에게 군신(軍神)으로 기림을 받았을까.

치우가 단순히 변방에서 준동하던 그들 말대로의 변방 오랑캐의 군주중 하나였다면, 그들의 소위 춘추필법(春秋筆法)이 그러한 표현들을 남겨둘 수 있었을까?

더구나 천자라니!

근세에 이르러, 서량지(徐亮之)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세석기시대의 문화 부족이 맨 처음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근방에 살았는데, 그것은 중국의 전설에 있는 염제 신농의 본족(本族)이다」라고 하였음은 또 무슨 의미일까.

백보를 양보하여 누가 이기고 지고를 굳이 따질 필요없이 추론하여 본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기록들이 곳곳에 남아있음은 당시에 우리의 선조가 서방 서장족(西藏族)의 시조라고 하는 황제와 그 지역의 패권을 놓고 격돌했었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역사는 이긴 자의 편이다.

후세의 승리자는 중국이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지 않은 기록을 남겨두지 않는 것은 철저하다. 당 태종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가 결국 그로 인해 죽게 되었다.

『천하의 힘을 가지고도 작은 고구려군에게 굴복했으니 어찌 된 인가』라고 구당서(舊唐書)와 정관정요(貞觀政要)에서는 적고 있다.

그러나 후일 개찬(改撰)된 신당서에는 「당군이 고구려성 10여개를 빼앗고 4만여 군사를 사살한 반면 당군의 피해는 2,000명의 불과했다」라고 사실을 변조하고 있음을 보면 그들이 어떻게 역사를 기록하는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을 터이다.

경향신문

<내용출처:한류열풍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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