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은 한민족의 순수한 정신맥을 이어받고, 고구려 말의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초연히 일어선 당대 동북아 희대의 대영걸(大英傑)이었다. 피끓는 마음으로 응원하는 붉은 악마의 열정을 그의 이름에서 느낄 수 있다. 붉은 악마는 축구에서 승리하기 위함이었으나, 연개소문의 열정은 민족을 구하기 위한 길이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말, 살아있는 고구려의 정신이었다. 고구려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망해가는 민족정신의 맥에 불씨를 띄워올려 백전백승의 전과를 이뤄냈으니, 그를 따를자 아무도 없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두 영웅, 연개소문과 당 태종 이세민의 충돌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무릇 고구려와 당은 피차 강약을 다투는 양립할 수 없는 나라요, 연개소문과 당 태종은 서로의 우열을 겨루는 양립할 수 없는 인물이니, 이 같은 두 인물이 두 나라의 정권을 잡았으니 양국 전쟁의 폭발은 조만간 필연적인 사실이라.’

당 태종은 처음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한 것을 빌미로 고구려를 침공하려다 장손무기의 충고를 받아들여 침공을 연기했다. 그 후 고구려가 신라 사신의 당나라 조공을 막고 있다는 말을 듣고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 협박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일축했다. 태종은 다시 장엄(莊儼)을 보내 최후통첩을 했으나 연개소문은 오히려 사신을 토굴에 가두었다. 이로써 양국의 외교적 타협은 결렬된 것이다.

연개소문은 일전도 불사한다는 정신으로 당의 협박을 무시하고, 사신을 토굴에 가둔 것이다. 당의 위세에 벌벌 떨었던 고성제(영류왕)에 비하면, 연개소문은 당을 그렇게 볼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문화의 자존심이었으며, 고구려의 역사성에 대한 자부심이었으며, 고구려민의 우수함에 대한 우월성에 대한 믿음이었을 것이다.

당 태종은 고구려 보장제 3년(644) 11월 원정 명령을 내린다. 정벌의 명분은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응징하고 백성을 구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가 베껴 쓴 이러한 내용은 구당서, 신당서에 있는 것으로 당태종 자신의 얼굴을 더럽힐 뿐이다. 제 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당태종이란 작자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천자를 참칭하는 자가 어떻게 얼굴빛을 붉히지도 않고 양심에 털난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병법의 달인, 연개소문

당태종은 당의 위세가 커지가 고구려를 우습게 본 나머지, 휘하 장수 이정의 충고도 무시한다. 태종이 출병하기 전에 이정(李靖)을 행군대총관으로 삼으려고 하자 이정은 “제가 일찍이 태원(太原)에 있을 때 연개소문을 만나 병법을 배워 그 뒤로 폐하를 도와 천하를 평정함이 다 그 병법의 힘을 입었음인즉, 오늘날 신이 어찌 감히 전날에 사사하던 개소문을 치리까”라고 사양했다는 것이다. 스승에 대한 기본 예법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이다.

태종이 “개소문의 병법이 과연 옛 사람의 누구와 견주겠느냐”라고 묻자 이 정은 “옛 사람은 알 수 없으나 오늘날 폐하의 모든 장수 가운데에는 적수가 없고, 비록 천위(天威)로 임(臨)하실지라도 가히 승리하기 어려울까 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천위, 하늘의 위엄! 천자를 자칭하는 당태종에게는 자손심을 거스르는 소리다.

이에 태종이 “중국의 거대함과 인민의 수로나 병력의 강함으로 어찌 일개 개소문을 두려워하랴”라고 불쾌해하자 이 정은 “연개소문이 비록 1인이나 재주와 지략이 만인에 뛰어난즉 어찌 두렵지 아니하리까”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정은 돌궐렴岳瀁?吐谷渾)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유능한 사령관이었다. 중국 능연각(凌煙閣)에 초상화가 걸린 24공신의 한사람이며, 이적(李勣)과 함께 2대 명장이다. 그가 저술한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당대 최고의 병법서로 알려져 있다. 단재는 이 병법서와 관련해 노상운(盧象雲) 선생이라는 노인의 구전(口傳)을 ‘조선상고사’에 소개하고 있다.

“연개소문은 자(字)가 금해(金海)이니 병법이 고금에 뛰어난 바 그가 저술한 ‘금해병서’(金海兵書)가 있는데 고려 때도 임금께서 늘 각 방면의 병마절도사에게 그 부임 시에 한 벌씩을 하사했다. 지금은 그 병서가 전해지지 않거니와 연개소문이 그 병법으로 당나라 이 정을 가르쳐 이 정이 당의 최고 명장이 되었다. 그 이 정이 저술한 ‘이위공병법’은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로 치는 바, ‘이위공병법’의 원본에는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운 이야기를 자세히 썼다. 그 뿐 아니라 연개소문을 숭앙(崇仰)한 어구가 많으므로 당렐?때 사람들이 연개소문과 같은 외국인에게 병법을 사사해 명장이 됨은 실로 중국의 큰 수치라고 하여 드디어 그 병법서를 모두 없애 버렸다. 오늘날 유행하는 ‘이위공병서’는 후인의 위작인 고로, 이는 원본이 아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당 최고의 명장을 키워낸 병법의 달인이 연개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연개소문이 제자를 허투로 키워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승도 몰라보고 배신할 제자를 키워내지는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당의 명장이 될 것을 짐작하고서도, 비법을 전수한 것은 그의 인격을 믿기 때문이다. 단순히 병법의 전수가 아니고, 세상을 도와 다스리는 도법(道法), 그리고 심법(心法) 전수의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병법이라는 것은 인간의 정신 세계의 본질, 구조를 꿰뚫어보고 전쟁에서 군사를 움직여 최소한의 희생을 자국과 타국이 함께 이기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의선인 연개소문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그 병법을 어떻게 배웠을까? 규원사화에는 그가 봉황산에서의 10년 수도 끝에 도를 통하여, 만고에 뛰어난 호걸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신라의 명장, 김유신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관직에 있어서는 또한 대선(大仙), 국선(國仙), 조의(皂衣) 등의 명칭이 있었으니, 동명성왕에 이르러서는 조천석(朝天石)이 있었고,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일찍이 조의(皂衣)의 직책을 맡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연개소문은 봉황산에 들어가 십년을 수련한 뒤 마침내 만고에 뛰어난 호걸이 되었으며, 김유신은 중악의 바윗굴에 들어가 십년을 수도한 뒤 결국에는 명장이 되어 태종을 도와 나라를 강성함에 이르게 하였다.

연개소문은 한명의 조의선인(皁衣仙人)으로서 민족의 국통을 지키기 위해서 어려서부터 모든 노력을 기울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조의선인은 신라의 화랑과 비교할 수 있는 고구려의 낭가(郎家) 제도이다. 검은 옷을 입었기 때문에 조의라고 부르는데, 평소에는 무예를 닦고 수도를 하고 국가종교인 환인,환웅,단군의 삼성조를 모시는 신교(神敎)로서 백성을 계도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신교란 이들은 삼신상제님 신앙을 바탕으로 천지의 성신(聖神)과 하나되어, 세상의 모든 성신을 성스럽게 받든다. 성신에는 자신의 조상신도 포함되어 있다. 국조삼신은 민족과 국가의 기틀로서 어찌 중요하게 받들지 않았을 것인가? 즉 조의선인은 민족과 진리를 수호하는 것을 지상 목적으로 한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으로, 한민족 역사 개창의 주역들이었다. 특히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앞서서 나라를 구한 용사들이었다. 수의 130만 대군을 격파한 이들도 고구려의 조의선인 20만이었다. 이들은 신교의 종교정신으로 무장한 군대였던 것이다.

백성들이 조의선인으로 선발되면 왕의 사자와도 같은 자랑으로 여겼으며, 이들이 전쟁터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면 대중의 조소를 받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용감히 싸웠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우리 역사의 기둥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조의선인은 제가 혼자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나라에서 임명함으로써 될 수 있는 자리다. 태백일사에서는 그가 불과 9살에 조의선인으로 ‘선발’되었다고 하면서 그의 인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의표(儀表)가 웅위(雄偉)하고 의기가 호협하여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어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었다. 상을 줄 때는 반드시 고루 나누어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해 주었으며, 자기의 처지를 미루어 남의 심정을 뱃속에 갈머두는 아량을 가졌다. … 한번 기쁨을 나타내면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들도 가까이 할 수 있었고,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자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아울러 태백일사에서는 멸망위기에 처한 고구려를 구하기 위해 초개와 같은 굳은 신념으로 고구려 백성을 이끌어 당과의 전쟁을 치룬 연개소문에 대해서 많은 양을 할해하여 서술하고 있다.

태백일사가 그리는 한 인간의 모습은 진정한 영웅의 모습이다. 단재는 연개소문이 조의선인의 우두머리로서 모든 조의선인들로부터 숭모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민족을 구한 의기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연개소문은 역적이라 한다. 물론 쿠데타를 통해 나라의 국왕을 폐위하고 새 황제를 옹립하였으니 잘못되었다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일어선 것은 당대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연개소문만 나무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연개소문에 의해 폐위된 영류왕 고성제는 을지문덕과 함께 수와 맞처 고구려를 지킨 명장이었다. 을지문덕이 살수대첩의 승리와 함께 중국 본토를 치자고 주장했던 강성파였다면, 고성은 당과의 화친을 주장한 온건파였다. 그런데 고성제가 보장제의 위를 이어 열제의 위에 오르자, 화친을 넘어서 역사의 전통을 중히 여기는 고구려인이라면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굴욕적인 외교를 펼친다.

그는 만여 명의 중국인 포로의 귀환시키고 중국 역서(曆書)를 반포했으며 중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고, 천리장성의 축조하여 전쟁에 대비했다. 고성제가 중국의 요청이라면 모든 것을 들어줄 자세가 되어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중국과 평화정책을 유지하는 한 적어도 중국이 고구려를 침략하지는 않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급기야 고성제 11년(628)에는 고구려의 일급비밀이라 볼 수 있는 전 영토의 지도인 봉역도(封域圖)를 당에 보내자 고구려의 강성파들는 모두 분개했다. 전통적으로 고구려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중국과 전투하였는데 고구려의 지도를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를 침투할 수 있는 길을 알려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설상가상으로 631년에는 당의 사신의 요청에 따라 평양의 경관(京觀)을 허물어 버렸다. 경관은 수나라와의 전쟁 때의 전몰장병의 유해를 묻은 기념묘지․탑과 같은 것으로 고구려인의 자부심이 담긴 성역이다.

고성제는 당에 사신을 보내 노자상(老子像)을 구하여 오게 하여 백성들에게 노자 도덕경을 청강하게 하고 수십만의 백성을 동원하여 장성을 축조하게 했다. 당태종은 도교를 장려했는데, 그 이유는 노자의 성(姓)이 당태종의 성씨와 같은 이(李) 씨란 것때문이었다. 고구려가 도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당의 정신세계에 스스로 동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민족의 기틀을 생각하고, 역사의 혼을 생각하는 자라면 누구도 좌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의 명을 거역하기는 힘들었다. 이에 연개소문이 도교 강론을 파하도록 하고 장성 부역을 그만두도록 간언하자 황제는 그를 죽이려 하였다.

“문 앞에 맹수가 가까이 오는데, 이를 막지 않으면서 도리어 나를 죽이려 하는가?”

태백일사에서는 이렇게 연개소문의 내심을 정리하고 있다. “문 앞에 맹수가 가까이 오는데”. 이 말은 고구려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를 막지 못하면서”라는 말에서 고성제는 이 위기를 막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 생각해보면, 고성제도 고구려의 위기를 막기 위해서 당과 친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것은 위기를 막는데 역부족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연개소문의 입장에서는 위기를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키우는 것이었을 것이다.

연개소문뿐만 아니라, 당대의 조의선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조의선인은 뜨거운 혈심으로서 국가보전과 국통수호에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연개소문이 고성제를 폐위했다는 것은, 연개소문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대당온건파에 대한 대당강경파에 의한 반정(反政)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이 황제를 잔인하게 살해했다하나 태백일사에는 몰래 송양(松壤)으로 피신한 황제에 백성들이 동조하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붕어했다고 한다.


우리를 향해 부르짖는 연개소문

연개소문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한민족이야 말로 위기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많이 둔감하지만 말이다.

지난 100년간 우리 민족은 무수한 고통을 겪었다. 일제의 강점에 의해서 전국토가 일본에 빼앗겨서 고통을 겪었고, 이후에는 국토가 둘로 쪼개지고 형제끼리 총칼을 맞대고 싸운 고통을 겪었고, 이후에는 가난과 무지에서 고통을 겪었다. 80년대까지는 민주화가 덜 되어서 독재정권의 밑에서 숨도 함부로 쉬지 못하고 살았다. 90년대에 와서는 놀랍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 젊은이들의 대다수는 그러한 고통이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리려는 위기에 처해있다.

작금의 십여 년의 시간은 누가 뭐래도 인류 역사 이래 가장 살기 좋은 때라 할 것이다. 과학문명이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정신세계의 풍요로움보다 육체적인 편안함을 추구하고, 생명을 소비하여 쾌락을 추구하는 문화로 가는 시대정신의 숨결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대세를 맨손으로 부여잡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 모두 위기의식은 공유를 해야 하지 않는가 싶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마음이 너그러운 한민족은 타국을 침략한 역사도 없다. 우리의 위기는 사실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또 외부에서 들어온 위기에 대처를 하지 않은 우리 자신 탓이기도 할 것이다. 한민족의 평화의 민족이다. 그래서 국민의 대다수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쟁이 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안정과 불안정은 항상 반복된다. 그것은 판의 문제이다. 판이 튼튼하거나 판들 간의 힘이 균형을 유지하면 안정된다. 판이 약해지거나 무너지면 역사의 지진이 일어난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실 한반도는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나라의 높은 분들은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지만 말이다. 전쟁의 위협에 의해서 정권을 유지했던 과거 군사정권과 지금은 다르지 않는가? 불과 10년 전에만 해도 드러나지 않던 전쟁위기의 물결은 지금 엄청난 속도로 한반도에 몰려오고 있다.

- 중국의 경제적인 비약적인 성장
- 북한의 붕괴에 대비한 중국의 역사 왜곡.
- 일본의 군사대국화.
- 석유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
- 기독교와 이슬람, 그리고 유대교.... 종교 간의 갈등.

불과 몇 년전만해도 관심밖에 있던 키워드들이 오늘날 부각되고 있다. 마치 1929년 세계대공황의 경제위기가 2차대전을 일으켰던 것처럼, 지금 미소 양대 산맥이 해체되면서 10여년 만에 각국의 세력이 돌출하면서 새로운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 민족은 갈 곳을 모르고 표류하고 있다. “동아시아 균형자”가 될 것인가? “낙동강 오리알”이 될 것인가? 문제는 위기의식을 공유하지 않는 일반 시민들의 안전불감증이다.

연개소문은 다시 우리를 향해 부르짖는다.

“문 앞에 맹수가 가까이 오는데, 왜 이에 대처하지 않는가?”

http://blog.daum.net/damulkan (블로그), damulkan@hanmail.net (메일)

세계한인들의 뉴스네트워크 코리아웹 http://www.coreaweb.net


<내용출처:한류열풍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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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페셜-특별기획 만주대탐사'제2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는 신라의 후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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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장관의 답변) 한사군은 한반도내에 설치된 것이 아니다

(답변서)


(질의서)

 

(BC108년 전쟁지도) 고조선의 우거왕과 한무제의 전쟁도

 

 

<내용출처:한류열풍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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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이 충웅저 「한반도에 기가 모이고 있다」, 집문당)


한반도는 중국대륙(土局)에 뿌리박고 백두산을 주간(主幹)으로 하여 간방(艮方)인 동북에 3면의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이다. 한반도가 지구전체의 명당자리인 혈(穴)에 해당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 있거나와, 그 외에도 한반도는 광명민족인 한민족이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을 쫓아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자리잡은 곳이다.


한반도의 모양은
글자로 볼 때는 S자와 乙자형을, 동물형으로 볼 때는 하늘에 조용히 기도드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 또는 호랑이형을, 천의(天意)의 중심이 되는 천지인 3재(三才)를 모두 갖춘 형국 모양을 하고 있다.

첫째>, 한반도의 모양이 S자 또는 乙(오행으로는 木)자로서 태극도형의 가운데 음양 선인 우주 대생명의 모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천(天: 우주의 본체)의 영기가 한반도(백두산)에 하강하여 내려 심어진 꼴을 상징하는 것이다.


생명현상의 기본구조인 DNA의 유전인자도 꽈배기형의 2중 나선으로 S자 모양이며, 태풍의 모습도 S자, 乙자의 역동적 생명운동이다. 태풍은 적도 이남에서는 시계바늘의 반대방향으로 돌다가, 적도를 통과하면서 시계바늘과 같은 방향으로 돈다.

천기가 한반도에 집중되었다는 증거는 그 높은 백두산의 천지(하늘 못)와 같은 산꼭대기에 수기(물에너지)와 화기(열에너지)가 용솟음쳐 분출되는 곳이 세계에 없고, 한반도가 기가 매우 강하기에 한반도에 사는 동식물의 기도 강한 데서 잘 알 수 있다.


우리나라처럼 풍수지리가 발달한 국가는 세계상 없다. 풍수지리가 발달하려면 생명체인 땅이 생기를 가지고 있어 살아 숨쉬고 있어야 한다. 그 땅의 생기를 아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물을 보면 안다. 지금 비록 오염되어 있다 해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처럼 삼천리 방방곡곡이 ‘산 좋고 물 좋은’ 나라는 없다. 필자는 직업이 외교관인 관계로 그간 북미와 남미, 구라파 여러 국가는 물론 인근 일본에도 가 보았고 중국땅에도 살아 보았다. 필자가 가 본 그 어느 곳의 산과 물도 한국보다 좋은 곳은 보지 못했다.

우리 선조들은 한반도가 지닌 땅의 기운을 잘 알고 계셨기에 산줄기를 그릴 때도 산의 높이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사람의 혈맥과 같이 살아있는 기(氣)의 모습으로 그렸다(땅의 기운이 없는 서양은 산을 등고선의 높낮이로 그린다). 또한 지형의 이름을 지을 때도 함부로 짓지 않고 그 땅의 기에 맞게 지어 붙였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서울의 4대문이다(‘인의예지’를 하나씩 이름지어 붙여 홍인지문, 돈의문, 숭례문이라 이름지어 붙였다). 또한 4대문중 숭례문(남대문)은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세로로 써서 붙였으며,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중앙 토(土)의 신(信)이 없자 도성 중앙에 보신각(‘信’자가 들어가는 普信閣)을 세웠다. 이러한 한반도의 정기를 알았기에 일제는 전국 각지의 명산 꼭대기마다 철봉을 박아 그 지맥을 끊으려 했고, 중국 명나라 주장춘은 백두산-금강산으로 이어진 신령기운 정기를 이어받아 증산과 1만 2천명의 도통군자가 출세한다고 했던 것이다.


이 한반도의 생기를 이어받아 한국인의 기가 맑고 고상하며, 한반도에 사는 동식물도 신령스럽고 영험한 약효를 가지고 있다. 송화강, 장백산맥, 한반도에 서식하는 동물은 호랑이, 곰, 사슴이며 식물은 산삼이다. 이것들(웅담, 녹용, 사향, 산삼)은 모두 한반도의 생기를 받고 자라 효능이 가장 좋은 한약재가 된다. 그리고 백두산 호랑이는 사자보다도 벵골호랑이보다도 크고 강하다.

또한 진달래와 적송은 한반도에 자생하며, 일본, 중국 등 외국에는 별로 없다. 철죽과에 속하는 진달래는 기가 강하기 때문에 아직 추운 봄에 어느 철쭉꽃보다도 먼저 피고 잎 없이 꽃만 먼저 핀다. 봄이 되면 한반도의 산 전체가 벌겋다. 적송(赤松)은 메마른 땅, 바위틈에서도 잘 살며 추위와 더위와 가뭄도 안 탄다. 임진왜란 때 왜선을 들이받아 침몰시키는 데 사용된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은 바로 이 단단하고 기가 센 적송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천년 묵은 일본의 국보1호인 미륵반가사유상도 우리나라 적송으로 만든 것임이 밝혀져 있다. 진달래와 적송도 기가 센 한반도를 대표한다. 한국의 은행나무도 징코민 성분의 함유량이 세계 다른 지역의 것보다 아주 높아 수출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한민족과 한반도의 기의 원천은 백두산(해발 2750m 전후)의 천지(天池, 해발 2190m)에서 발원한다. 천지는 하늘과 물이 만나는 장소이고 동해에서 떠오르는 태양과 물이 최초로 만나는 곳이다. 천지가 현재의 모습이 된 것은 1702년 세 번째의 화산폭발이 있은 다음이었다. 천지의 모양은 거의 원형에 가깝고 최고 수심 373m, 면적 9.82Km²인 천지 주위를 16개의 봉우리들이 둘러싸고 있다. 천지가 갖고 있는 물의 위치에너지(수기)는 한국의 전력을 한달간 쓸 수 있는 100조 마력이상이나 되고(장백폭포에는 1초당 1천톤의 물이 연중 변함없이 흐른다), 천지의 밑에서는 또한 막대한 열에너지(화기)가 발생하고 있다(한 겨울에도 그 높은 곳에 있는 천지의 3군데만은 얼지 않는다).


즉 백두산은 수기(水氣)와 화기(火氣)가 융합한 태극(太極)의 기(에너지)가 용솟음쳐 분출하여 백두대간을 통해 한반도 구석구석까지 공급되고 있다. 한국인은 백두산의 정기를 타고난 민족이다. 이 백두산에서 환웅천황과 단군 왕검께서 배달국 신시(神市)와 단군조선을 개창하셨다. 북으로 넓은 만주평원과 남으로 수려한 한반도에 걸쳐 구름위로 우뚝 솟아오른 백두산은 개국의 터전, 한민족의 시원지인 동시에 동방문화의 종주산이며 신교도맥의 주산으로서 삼신산, 태백산(크게 밝은산), 시루산, 장백산(영원토록 밝은 산), 개마산, 불황산 등 54가지의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삼(三)이 모여 새로움(新)이 되고 새로움(新)은 또 밝음(白)이 된다(三→新→白). 밝음(白)은 신(神)을 상징하며, 신(神)은 높으며(高) 높은 것은 머리(頭)가 되어(神→高→頭) 백두산이라 칭한 것이다.


한반도 곳곳에 솟아있는 밝은(白) 산들의 으뜸이요 우두머리(頭)라는 뜻에서 백두산이라 칭한 것이다. 백두산의 산꼭대기가 1년내내 눈과 얼음으로 덮여 희기 때문에 백두산으로 불린 것이 아니다. 동해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빛을 가장 먼저 받을 수 있고 신령스러운 하늘의 기운이 충만한 백두산은 하늘과 통하는 영산(靈山), 하늘의 뜻이 인간세계를 향해 펼쳐지는 매개체로서의 신산(神山)으로 경배되었다. 고대 중국인들도 삼신산을 신선의 성지로 인식하였으니, 진시황과 한무제가 신선,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동방의 삼신산을 찾았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이와같이 백두산은 우리민족이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던 종교의 발원지요, 역사의 발원지요, 국토의 진산이다. 그리고 이 백두산에서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의 세 개의 강이 발원한다. 태을신이 뭇 신선들을 모아 회합하는 곳인 이 백두산(삼신산)은 예로부터 곤륜산의 기운을 오히려 능가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반도의 모양인 을(乙: 木)자는 태극도형의 가운데 음양곡선의 모양으로서 우주의 본체적 대생명력이라고 했다. 또한 을(乙)자를 서로 합하면 만(卍)자와 공(工)자, 전(田)자가 나오며 여기에서 십(十)자가 나온다는 것도 앞에서 배웠고, 실제로 상제님께서 한국땅에 다녀가신 것도 배웠다. 지금 한반도는 6천년만에 다시 돌아오는 대운(大運)의 대상승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지금부터 6천년 전 백두산을 중심으로 찬란한 홍산(鴻山)문명을 일으키게 했던 천기와 지기의 상호작용의 중심은 백두산→만주→마케도니아(알렉산더 대왕)→그리스 반도→이탈리아 반도(로마)→이베리아 반도(스페인)→영국→미대륙→일본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오고 있다.


IMF위기는 현재의 세계질서의 판을 헤쳐 한국을 중심으로 새로 판을 짜기 위해 온 것이다. 다가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질서는 한국이 주도하여 개창하므로 현재의 판을 헤치는 역할(IMF위기)도 한국이 앞장서게 된 것이다. 서기 2000년대는 대일변(大一變)의 주기로서 서양의 금운(金運)은 종결되고 동양의 목(木)기운으로 접어드는 대주기이다. 이러한 사실을 믿고 안 믿고는 여러분의 자유이나 이것은 여러분이 믿지 않더라도 우주의 법도로서 반드시 오게 되어 있고, 한국이 세계 일등국이 되는 것은 이미 정해진 천명이다.


1945년 한국은 세계 170여개 국가중에서 끝에서 4, 5번째 하던 국가였다. 그런데 1960년 0.33억불이던 총수출액이 1996년에는 1297.15억불(세계12위)이 되었으니 36년만에 3930배의 성장을 이룩했다. 약 30년의 짧은 기간에 서구제국이 200여년에 걸쳐 쌓아올린 수준에 도달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다. 이것은 천기(우주의 기)의 도움이 없이, 단지 인간의 열의와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한반도에 기가 모인다기 보다는 기의 태풍이 불어오고 있는 것이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끊어졌던 현상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은 한국의 급성장에서 온 오버 슈팅(over shooting: 급변화에서 오는 상하 진동현상) 현상일 뿐이었다.


둘째>, 한반도의 모습은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로 둘러싸인 가운데 봉황이 알을 품은 듯 조용히 하늘의 때(天時)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천신(天神)께 기도드리고 있는 인간(人間)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한반도는 북극자방(北極子方)을 향하여 제주를 방석삼고 무릎꿇어 양손을 합장한 채 조용히 하늘을 우러러 기도 드리고 있는 천국(天國)의 형상이다. 한반도의 형상을 범이 앞발을 만주 대륙을 향하여 뻗쳐 벌리고, 엎드려 입을 벌려 대륙을 노려보는 형상으로 그리기도 한다.


셋째>, 한반도는 천지인 삼재를 모두 갖춘 형국이다. S자형의 한반도 모양에서 곡선의 상부부분 백두산은 천(天: 父格)이 되고, 중간부분 금강산은 人이 되고, 하부부분과 제주도(한라산)까지는 地(지: 母格)가 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반도의 위치는 세계의 중심, 동양의 중심이며, 기후조건으로도 한대와 열대의 중간인 온대지역으로서 춘하추동 4계절이 가장 분명한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 한반도의 산야의 아름다움과 푸른 빛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문자 그대로 금수강산이다.


어디 그 뿐인가? 한반도 전국각지는 선천 9와 후천 6의 상수정신에 그대로 응하여, 조선말에는 전국이 9도(조선8도와 제주도)로 나뉘었으나, 남북이 갈린 지금 남은 한국(남한)은 다가오는 후천 가을의 곤도(坤道 : 후천은 음시대의 통일기)수 6수의 원리에 따라 6도(경기, 강원, 충청, 전라, 경상, 제주)로 나누어져 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한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있다. 미국은 전국을 주(洲), 중국은 성(省), 일본은 현(懸)등으로 나누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왜 하필 절대 이상세계요 진리의 본체를 지칭하는 도(道)자를 써서 전국을 나누고 있을까? 우리 선조들은 전국 각지의 이름을 지을 때 반드시 그곳의 지형지세에 따라 그의 생김과 혈(穴)을 보고 지명을 붙였다(부여와 고려 때에도 전국을 道로 나누었다). 이러한 우리 선조들이 전국을 나누는데 아무 생각없이 이름을 붙였겠는가? 한반도를 도(道)로 나누고 한민족이 도민(道民) 즉 도인(道人)이 된 것은 먼 훗날(이제는 수년내에) 한민족을 명현도인(名賢道人) 도통군자(道通君子)로 만들어 음(陰)의 후천 5만년 시대를 다스리게 하겠다는 약속이었던 것이다.


한반도는 간(艮)의 이치가 작용하는 독특한 성지(聖地)다. 열매를 의미하는 완성과 씨로서 다시 시작한다는 시종(始終)의 의미를 갖고 있다. 선천이 끝나고 후천이 새롭게 열리는 땅이 간방이므로 개벽도 이 땅에서 시작한다. 개벽의 주재자는 하늘님, 즉 옥황상제다.


결론적으로, 한반도는 ‘하늘 땅’, 즉 ‘하늘의 뜻이 있어 미리 준비한 선택된 땅’이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만세(萬歲)토록 무궁할 땅이다. 그래서 애국가에까지 ‘하느님’이 보호한다고 되어있고, 독립운동을 할 때도 항상 ‘대한민국 만세’의 만세(萬歲) 삼창을 한 것이다.



<내용출처:한류열풍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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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靑) 황제는 왜 신라(新羅)를 사모하는가

1.금나라와 청나라의 조상은?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後金)을 세운 왕의 이름을 우리는 누루하치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들의 성(性)은 무엇인가?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府儀)의 성도 당연히 애신각라이다. “애신각라”라는 성에는 무슨 뜻이 숨어있는가? 애각(愛覺) 신라(新羅)라, 신라를 사랑하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신라(新羅)? 삼국시대의 그 신라? 그렇다. 그 신라다. 다름 아닌 그 신라다. 청나라와 신라가 무슨 관계냐고? 다름 아니라 청나라의 왕족과 신라의 왕족은 멀리멀리 가면 그 뿌리가 같다. 사실이냐고? 지금부터 이 이야기에 기 막힌 사연을 따라가 보련다. 너무나 확연한 심증을 드러내는 고대사 X 파일의 첫 장면이다.

2.금은 곧 김(金)

우리가 오랑캐 청나라라고 알고있는 만주족이 세운 첫 나라는 청나라가 아니다. 대진국(발해)이 망한 후 북방 종족들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그중 거란(글안)족이 세운 나라가 요(僚)이고 만주족이 세운 나라가 금(金)이다. 나중 명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의 패자가 되는 시점에서 이때의 전통을 이어받아 나라 이름을 후금(後金)이라고 할 정도로 “金”이라는 이름에 집착하는데, 바로 이 金이 “심증”의 근거다.
金이라고 써놓으면 이 성씨를 가진 사람이 워낙 많아서 두 셋 중에 하나는 이 사람일 것이다. 그 이유가 무언가? 신라가 워낙 오래전에, 그리고 오랜동안 나라를 유지했기에 왕족의 숫자가 이리 많아져 이제 와서는 나라 성의 사분의 일을 차지하는 정도가 되었다. 남과 북의 보스가 죄다 김씨니 신라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 든다. 김은 곧 금이다. 금을 잘 다루고 세공을 잘하던 사람들이라고 해서 김이라 했다.

3.신라는 대륙에서 온 기마족

그런데 만주족의 나라이름이 金이라니! 김씨더러 너는 만주족 출신이다, 라고 하면 아마 열받는 정도가 아니고 이빨을 악물고 명예회복을 하러 덤벼들 사람이 한 둘이 아니리라. 그러나 어쩔 것이랴, 그 말은 사실이다. 신라계 김씨의 조상은 김알지가 대표하는 부족으로, 거세와 석탈해 다음으로 왕족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왕은 세습이 아니라 여러 종족 중 한 종족이 번갈아가며 맡아 하였는데 종국적으로 김씨종족이 왕족을 맡아 나라를 이끌어 나간 것은 우리가 익히 일고 있다. 김알지는 어디서 왔는가? 만주에서 왔지.(물론 종족 연원이라는 의미이며 지역적 의미는 아니다) 신라족을 구성하는 주요한 종족인 김씨족은 우리가 알다시피 신라의 중건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을 지킨 왕조이다. 사실상 신라왕족을 칭하는 김씨족의 근원은 어디일까?

김씨들 스스로도 잘 알지못하는 이 부분은 그저 경주김씨라는 관향명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살펴본다면, 경주, 서라벌, 금성, 동경으로 칭하는 신라의 도읍이 현재의 경상도 경주라고 명시해놓은 책자나 문헌은 없다! -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어쨌든 상상력을 발휘해보는 것도 크게 나쁠 것 없다. 특히 여기에는 상당히 신비로운 이야기가 많아서 인디아나존스를 능가하는 모험의 세계가 가득하다. 아마 21세기 우리 문화·경제권의 영화소재의 상당부분은 여기서 가져올 수 있으리라.)

4.일요스페셜에서 증거 보여줘!

아닌게 아니라 지금도 이 이야기들은 다큐멘터리의 소재감으로는 아주 적절하다. 특히, 동방과 서방을 마구 넘나드는 기마종족(스키타이족)의 이야기를 꾸밀 때면 빠질 수 없는 것들이다. 카스피해와 흑해부근의 스키타이 유물과 한반도 신라의 그것은 너무 닮아서 러시아 학자들조차 구분하기가 불가능하다. (KBS 일요스페셜.97.3) 특히 천마총에서 발굴한 금관(金冠)은 스키타이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줄줄이 달린 곡옥은 지금도 흑해남부와 터키지방에서 발굴되는 스키타이 종족의 그것과 너무 똑같다!
고구려와도 다르고 백제와도 다른 이 금관의 주인공들의 강역은 카스피해 근처다. 이런 추정이 틀리더라도 최소한 동일한 문화를 뿌리고 가지고 그곳과 한반도에 정착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같은 유물과 같은 문화양식이라는 공통점만으로 그들이 같은 연원이라고 추정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완강히 “아니라”고 말한다. 역사에서 “추정”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실증이란 문헌에 의지하는 것이고, 결국 문헌을 남기지 못한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동방스키타이족은 “역사도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주요 근거로 남용된다. 그것도 주로 식민사학자나 그 후계자들(주로 관변사학자)이 잘 쓰고 우리도 그 바탕에서 교육을 받았길래 절대 자유롭지 못하다. 살짝 눈을 돌리면 그 유명한 토인비의 가설은 “추정”을 위한 논리틀이다. 이것은 영국사람 것이라 인정해주고 조선사람이 이런 틀을 만들면, 실증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사이비고 도라이고 괴변이다?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더군다나 문헌대신 그 광대한 영역에 흩뿌려놓은 흔적만 보아도 기마종족의 역사가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기마종족을 “페라스키야”라고 불렀다. 말을 탄 야만족이라는 이 뜻은 알고보면 “페라”와 “스키야”의 합성어인데, 페라는 “페르”,“펴라” 등과 같은 어원으로 고대 동,서,중앙아시아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던 “불(fire)” “벌(field)”의 뜻이다. 어떤가? 발음도 비슷하지 않은가? 평양도 이 어원에서 왔고 부여도 이 어원에서 왔다. 더욱더 신기하게는 페르-샤(터키지방의 고대제국)도 똑같은 의미이다. 더군다나 그들의 종교는 조로아스터교, 즉 배화교다. 불을 신앙하는 불종족인 셈이다.

강역이 여기까지 가는데, 당신은 만주족이 그저 만주에서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거기서 왔을 것이라 믿는가? 만주족의 또다른 호칭인 “여진(女眞)족”만해도 그렇다. 그 말은 이두문자다. 즉, 한자의 음을 빌려 호칭을 적어놓은 것이다. 이 여진이라는 말이 숙신(肅愼), 조선(朝鮮), 주신(珠申)과 똑같은 뜻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아는가? 그 말은 “밝은 온누리”를 뜻하는 말로써 마찬가지로 박달(밝은 들), 배달과 같은 뜻이라는 말을 그대는 아시는가?

단지 우리 민족(현재의 대한민국경제권을 형성하는)만이 아니고 고대 기마종족 전체가 밝은 들판을 지향해 뻗어나가는 이념(준 이념이라고 해두자)을 공유했다는 추정을 그들의 흔적에서 찾아내는 것이 그대는 도라이들이 하는 일이라고 치부하고 말텐가? 만약 그렇다면, 단언하건데, 그대는 없다.
못난 것은 우리들이지 그 넓은 광역을 누비던 우리 조상들이 아니다. 경주 김씨들은 경주에 정착하기 전만해도 카스피해와 태평양 사이를 오가던 종족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황금족이라 칭하였으며 자칭 황금족들은 반도경주에서만 정착한 것이 아니고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대륙과 만주 곳곳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밝다는 뜻을 가진 金이라는 뿌리말을 지켰고 한 가지가 신라(새라불, New Land/Field)를 세웠고, 통일의 전통을 이어받고자한 후금(황금족의 후예)의 누루하치는 중원을 제패했다.

물론 이 때는 이미 우스꽝스러운(북방 기마종족들의 입장에서 보면)“단일민족”으로 전락한 조선은 그들을 오랑캐라며 중국편을 들었지만, 누루하치의 신라사랑은 변함이 없었다고나 할까?

고대사 X파일 첫장면에서 나는 독자들에게 “상상력”을 강조한다. 사실 중국역사의 속을 들여다보면 “상상”을 넘어선 “공상”이 난무하고 이런 이야기들을 학계의 거두들이 마치 대단한 이론인 것처럼 내세우면 그게 곧 사실의 역사로 추인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리 역사에 이런 상상력을 내세우면 어떻게 될까?
당장 얼마전 SBS 방송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에 나온 사람들처럼 “도라이”취급을 받을 뿐이다. 물론 이 사람들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말도 못하나?

아니 아메리카에 들어온 것치고 원래 아메리카적인 것이 있었나? 중국도 마찬가지다. 거기는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유입된 사람들의 인종통합 실험장이었다. 따라서 중국종족의 것만 있었다고 한다면 웃기는 이야기다. 하다못해 그들 종족은 수시로 다른 민족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고대는 물론이고 근세의 청나라도 그렇고 1000년만 넘어가면 몽고족의 원나라가 그렇다. (5호16국시대에서 5胡가 누구인가? 북방 오랑캐 아니던가?)

고대 소아시아와 우랄산맥, 중앙아시아를 마구 휘둘러 다니던 여러 제국의 역사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이들은 “코난, 바바리언”이라는 영화의 소재이기도 하지만 고대 세계사의 수수께끼인 “스키타이”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분명 오늘 김씨 성을 가진(김알지계열을 말함. 김수로 계열은 다음에 이야기하겠음)사람들의 뿌리라고 믿는다.

바바리언, 스키타이, 야만족이라고? 아니다. 문화는 상대적인 것이고 아마 스키타이들은 말도 탈 줄 모르는채 한 곳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을 “패쇄적이고 우둔하고 느린 곰탱이들”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둘 다 맞는 말일 수 있다. 혹시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위대한 “말(言)의 문화”가 사라졌다는 자막을 보신 일이 있는가? 사라져버린 X파일을 찾는 것은 그들을 선조로 인정하는 우리들의 몫이다.

독자여러분, 제발 상상력을 죽이지 마시라. 오늘의 비참한 신세 때문에 과거를 상상할 힘을 잃는 것은 미래에 대한 꿈도 버리는 짓이다.

이 상상력만 살아있다면, 제깟 춘추사관과 식민사관을 순간에 깔아뭉갤 무궁무진한 흔적들은 아시아 전역에 살아있다.(최소한 몽고가 지배했던 영역은 스키타이들의 것이다) 때가 되면 죄다 살아나 춤을 출 것인즉, 그 때를 기대해보자!

5.환단고기에 기록이 있다.
안함로의 삼성기전 상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乙未(을미) 漢昭時(한소시)에 進據夫餘故都(진거부여고도)하여
稱國東明(칭국동명)하시니 是乃新羅故壤也(시내신라고양야)라.

을미(BC 86년)년, 한나라 소제때에 고두막한은 부여의 옛서울을 점령하여 나라를 동명이라 칭하니, 이곳은 신라의 옛 땅이다.



<내용출처:한류열풍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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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s 뉴스 화면캡쳐 : 위의 환단고기의 한사군 위치 지도와 비교해보십시요 >

“고조선 중국내륙에”

 

앵커: 고조선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 넓었다는 학설이 제기됐습니다. 고조선 계통의 유물이 중국 요서 지방에서 출토됐습니다. 김성우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기원전 108년, 한나라에 의해 설치된 한 4군은 지금의 평양의 낙랑, 오른쪽에 임둔 , 오른쪽에 진번 그리고 만주 동부와 함경도에 현도가 위치했는 게 통설입니다. 그런데 임둔 이라는 글자가 적힌 유물이 중국 요서지방인 요녕성 진시시(錦西市) 소왕대에서 발견된 사실이 최근 단국대 박물관 복귀대 박사의 논문에서 밝혀졌습니다.

 

공문서를 넣은 상자 등에 함부로 뜯어볼 수 없도록 진흙을 바르고 직인을 찍은 봉니가 바로 그 유물인데 규격과 서체로 볼 때 한의 중앙 정부가 인근 태수에게 보낸 것입니다. 더욱이 복리 출토 성토에서는 고조선 계통의 유물이 다량으로 나와 바로 이곳이 임둔 소재지임을 밝혀준다고 복 연구원은 말합니다. 임둔 이 요서지방에 있었다면 낙랑은 그 왼편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따라 한 4군의 전신인 위만조선과 고조선의 위치가 한반도가 아니라 요하를 중심으로 한 중국 내륙쪽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커졌습니다.

 

인터뷰: 우리나라의 상고사인 고조선이 만주지역으로 비장이 될 수 있는 것이고 그럼 만주지역으로 비정이 된다고 할 때는 우리나라 상고사 전체의 틀이 한번 바뀔 수 있는 거죠.

 

기자: 이번 연구결과로 일제시대 일인학자들이 한반도 위치설의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했던 평양지역의 낙랑유물 유적부터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MBC뉴스 김성우입니다.


[김성우 기자]

 

 

 

 

 

김종서씨 “고조선-한사군 中대륙 깊숙한 곳에 위치”

 

 

출처 : [동아닷컴]2006.2.27일자 옮김

 


고대 한반도 북부에 존재한 것으로 알려진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를 수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중국 허베이(河北) 성 동쪽에서 랴오허(遼河) 서쪽으로 길게 자리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종서(51·중앙대 강사) 씨는 최근 중앙대 사학과 박사학위 논문으로 통과된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 비정 연구’에서 문헌 고증과 수학적 위치 고증방법을 통해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가 중국 대륙 깊숙한 곳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 논문에서 적용한 수학적 위치 고증방법은 중국 사서에 나오는 거리를 현재의 지도에 적용해 그 위치를 역추적하는 방법.


중국 한대의 역사서인 ‘후한서(後漢書)’의 군국지(郡國志)에는 당시 한의 수도였던 뤄양(洛陽·허난 성 서쪽의 도시) 동북쪽으로 5,000리에 낙랑군이, 4,000리에 현도군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한서(漢書)’의 무릉서(茂陵書)에는 장안(뤄양보다 더 서쪽에 있는 현재의 시안·西安)에서 6,138리에 임둔군이, 7,640리에 진번군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1리는 당대(唐代) 이후 0.393km로 고정된다. 그러나 한나라 시절, 1리가 얼마인가에는 논란이 있다. 김 씨는 위나라 기록에 등장하는 뤄양 및 장안과 현재까지 남아 있는 도시들의 거리를 비교해 한대의 1리가 현재 거리의 75% 미만일 것으로 추정했다. 또 한대의 기록과 현재 지도상의 거리 비교를 통해 한사군의 위치를 추정했다.


이에 따르면 지금까지 평양지역으로 추정돼 온 낙랑군의 경우 중간에 산악지대가 하나도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랴오닝 성 서부 진저우(錦州)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 또 압록강 북쪽에 있었다고 알려진 현도군은 허베이 성 동쪽과 랴오닝 성 서부를, 황해도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진번군은 압록강 서북쪽을 넘어설 수 없다.


김 씨는 여기에 한대의 도로 굴곡지수를 감안할 경우 한반도에서 가장 멀었던 현도군은 현재 베이징(北京) 동북쪽 지역,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웠던 진번군은 랴오닝 성 서부 다링허(大凌河) 유역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1990년대 초반 랴오닝 성 진저우에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이라는 직인이 찍힌 봉니(封泥·공문서 등을 봉할 때 사용한 진흙덩이)가 발굴된 고고학적 발굴 결과와 일치한다.


이 논문은 랴오허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초기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지 않아 고조선의 실재를 뒷받침할 수 없다는 ‘물증 부족’의 비판에 대한 새로운 반론이다. 또 흥륭와, 홍산, 하가점 등 랴오허강 유역의 고대 신석기·청동기 문명과 고조선의 연관관계를 뒷받침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네이버 “한사군, 고조선 멸망전 한반도에 있었다”

[도깨비뉴스   2005-05-05 19:31:30]
 
 

 

[도깨비 뉴스]

 


'한사군(漢四郡)'이란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곳에 설치한 4개의 행정구역으로 '낙랑군'·'임둔군'·'현도군'·'진번군'을 말한다고 중국의 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국내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고조선이 망하기 전 지도에 망한 후에 설치된 '한사군'중 '임둔'과 '진번'이 한반도 중북부지방에 있었던 것으로 표기되어 있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위 이미지는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백과사전에서 '고조선(古朝鮮)'을 검색했을때 나오는 지도입니다. 지도의 이름은 '고조선의 위치'이고, '고조선'이란 붉은 글지가 대동강 오른쪽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글자의 위에는 '임둔'이 적혀 있고, 아래에는 '진번'의 오타인 '짐번'이 적혀 있습니다.

 

이 지도만 보면 마치 고조선이 망하기 전부터 한반도에 중국 한나라의 식민지격인 '임둔'과 '진번'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한서' 등 중국 사서의 기록에도 나와 있듯이, '한사군'은 BC 108년 고조선 멸망 후에 설치된 것입니다. 또한 이를 두고 한국의 학자들은 "조작된 것이다" VS "실제로 있었던 것이다", "중국 요서 지방에 있었던 것이다" VS "한반도 북부에 있었던 것이다"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으로 한사군은 아직까지 뚜렷한 실체 및 위치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더하여, 연합뉴스는 2002년 "중국의 요서지방에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이라고 적힌 임둔의 봉니(封泥)가 출토되었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었습니다. '봉니'란 고대 중국에서 공문서 등을 봉할 때 사용한 진흙덩이 를 말합니다. 당시 연합뉴스에 소개되었던 복기대 박사의 논문에는 "이 봉니는 한나라 중앙에서 임둔군 태수에게 보낸 것이 확실하고, 출토된 곳이 한사군 중에서도 임둔군에 속했을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93~94년 중국 랴오닝성(遼寧省)의 진시시(錦西市)에서 출토된 임둔의 봉니 [연합뉴스]

 

이 복기대 박사의 논문으로 인해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논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고, 리포터가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 접속해 확인해 본 결과 현행 국정 국사 교과서에는 한사군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네이버 백과사전의 '고조선 위치' 지도에는 학계에서 인정하지도 않고 국사교과서에도 없는, 한사군 중 임둔과 진번이 각각 현재의 평안남도와 함경남도 부분에 표기되어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 지도는 고조선의 수도를 '왕검성(王儉城)'이 아닌 '완검성'이라고 적어 놓기도 했습니다. '왕검성'은 고려시대의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에 나오는 지명으로, 한민족 최초의 국가 '고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이 아사달로 도읍을 옮기면서 만든 이름입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왕검성'을 현재의 평양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리포터는 "혹시라도 '王儉城'을 중국어 발음으로 적어 놓은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 검색해 봤지만, '왕검성'의 중국어 발음은 '왕졘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완검성'이라고 지도에 표기해 놓은 것은 오타인 것이 확실합니다.

 


왼쪽 붉은 상자는 임둔의 봉니 출토 지역, 오른쪽은 네이버 백과사전에 표시된 임둔 지역

 

그렇다면, 고조선이 망하기 전인 이 지도에 진번과 임둔이 표기되어 있고, 오타가 적힌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네이버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백과사전은 '두산 엔싸이버'에서 제공받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전화를 받은 '두산 엔싸이버' 담당자는 이 지도에 대해 "80년대에 나온 두산세계대백과에 수록된 것이다. 당시에 오류가 있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바로 수정할 수 있냐"라는 질문에 "바로는 불가능하다. 최대한 빨리 수정하겠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중국은 고조선과 고구려가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근거로 "한국의 역사가 중국의 식민지 '한사군'에서 시작되었고, 그 위치는 지금의 북한 지역이었다"라고 말하고 있고, 바로 이를 근거로 '동북공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즉 네이버 백과사전에 올라온 지도는 중국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일조한 꼴이 되는 것입니다. 포털사이트 네이버는 어린 학생들도 많이 찾는 곳입니다. 이 지도를 보는 학생들은 한국 고대사에 혼란을 일으킬 것 같습니다.

 

지도 바로가기 : http://100.naver.com/media.php?type=image&media_id=1062&id=14543&dir_id=10020202

 

'임둔 봉니' 기사 :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01&article_id=0000152227&menu_id=106

 

도깨비뉴스 리포터 아사달 youngkang21@dkbnews.com 

 

 

 

 

 

[주몽깨기]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 





 

  

 

드라마 주몽 1회는 정말 영화같이 시작한다 액션도 과감하고 판타스틱한 면도 있다.
그러나 어쩌랴 역사의 큰 틀은 있는 그대로를 그려야 하는 것이 제작자의 책임인 것을..

불행하게도 첫 도입부의 성우의 설명부터 우리나라 역사를 호시탐탐 노리는
중국의 입맛에 맞게끔 제작되었다고 하는것은 나만의 기우일까?
 
주 무대가 되는 한사군 중 일부인 현토군이 그렇다.

주몽 드라마에 나오는 한사군 .... 그 중에서 드라마의 배경인  현토군은 어디에 있는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한 한사군의 위치

안타깝게도 위의 지도와 드라마 화면과 동일하다 ㅠㅠ

 

 

 

 

위 사진은 환단고기에 나온 한사군의 위치라는 군요.

 

 

 

 

 

참 신기하다. 과학적으로 분석한 것과 위의 '임둔'이란 글자가 새겨진 봉니가 출토된 지역이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위치와 거의 일치한다.

 

 

 

 

 

 

 

 

 

 

하여튼 주몽은,, 정말,,,,

 

 

 

 

 

 

 

 

 

 

 

 

 

 

 

 

 

 

 

 

그리고 위 논쟁과 상관 없는 건데,,,

 

 

 

 

 

 

 

 

 


고조선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3조선으로 분류되는데 빨라야 BC 15세기에 청동기문명이 시작되었다면 BC 23세기에 수립된 단군조선은 자연히 허구가 되고,우리 역사는 기자,위만 등 중국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시작된다. 중국인들이 만주사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한들 현행 교과서를 가지고는 반박의 논리가 궁색하다.

그러나 현재 단군조선의 중심지였던 만주지역에서는 BC 20세기 이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청동기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어서 단군조선이 역사적 사실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현행 국사교과서는 이런 내용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채 국민들의 역사관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

우리 사학계에 팽배해 있는 친일사관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반성을 통해 단군조선의 문제도 현재의 신격화차원에서 탈피해 한반 도 및 한반도 북부에 실존한 국가라는데 대한 연구 범위를 확대해야한다 (열린우리당 정봉주 의원)

우리 스스로 왜곡시킨 국사 교과서로 인하여 우리는 단군조선의 역사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있습니다현재 우리의 교과서가 그런 지경이니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학술적인 반발도 제대로 못하고잇는 실정입니다 단군조선을 인정해야합니다 고조선이 세워졌다 카더라 라고 하는 추측적인 역사서술이 아니라
진정 우리땅에 있었던 실증의 역사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

아래의 천문학적 근거 하나만으로도 단군조선은 실제있었던 역사로 인정받아야 하며 환단고기는 사서로써 마땅히 검토되어야 합니다 .


TV책을 말하다 -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편



박창범 교수는 기록에 나타난 기원전 1733년을 기점으로 전후 약 550년 동안의 오행성의 결집 현상을 조사한 결과 기록보다 1년 전인 기원전 1734년에 오행성 결집 현상을 발견했다. 이 해 7월 13일 초저녁 다섯 개의 별이 지상에서 볼 때 약 10도 이내의 거리에 모여 있었다. 1년의 오차는 3700년 전과 현재의 시간계산법의 차이로 생기는 오차로 거의 정확한 수치이다. 천문기록은 당시의 국가라는 틀 안에서 측정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후대에 누군가가 이 현상을 작위적으로 기술했을 경우 정답이 될 확률은 0.007퍼센트로 가필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단기고사(檀紀古事)』와 『檀君世紀』의 신빙성도 함께 증명된 셈이다.




기원전 1733년 7월 13일의 오행성 결집 현상. 『단기고사』와 『단군세기』에 기록된 오행성 결집 현상이 사실로 판명됨으로써 이들 기록의 신빙성이 증명되었고 당시의 고조선이 강력한 국가의 틀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문기록으로 보나, 임둔 위치를 거의 정확히 묘사한 거나,,,  환단고기를 그냥 위서로 치부할 만한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단순히 우리가 배워왔던 내용과 달라서? 그렇다면,,, 할말 없고요..

 

물론 확인이 불가능한 것도 있겠지만 저위 임둔의 위치나 천문기록 같은 것은 정말 연구해야할 만한 가칠를 지니고 있는데,,

 

 

위서라 치부하고 완전 거기 나온 건 다 뻥으로 몰아부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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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명나는 한국사(고준환 著 p.61~69)] 중간에 들어간 이미지는 첨부한 내용입니다.

 

환단고기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사료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대식민사학자들에게 개인 이익이나 떼거리 이익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의 평화세계를 향해 마음을 열어 민족국가역사를 복원할 때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그들의 주장을 유지하려면 다음 23가지 실증사례에 답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는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겠다.(여기서 [! 고구려]의 저자 허성정 씨와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의 저자 구길수 씨의 일부 학설을 받아들여 통합한 것임을 밝혀둔다.)

 

 

첫째환단고기에 단군조선 13세 흘달(屹撻) 단군 50(서기전 1733) 5성취루五星聚婁'라고 하여 5개의 별이 루성 중심으로 모이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했는데, 이것이 천문학자인 서울대 박창범교수와 라대일 박사 등에 의하여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된 것이다.

오행성 결집현상 관련 영상 vod

   

박교수는 환단고기단기고사 등에 기록된 일식 등 천문현상을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했다.

 

환단고기는 고려시대 이암이 썼고, 단기고사는 발해의 대야발이 편찬했으나, 일부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과학적 검증 없이, 삼국사기 전인 것과 후대의 조작 흔적이 있다는 것을 내세워 무조건 위서로 몰고, 외면하여 진지하게 연구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는 이를 딱하게 여기어 두 책에 기록된 5성취루, 일식 등의 현상이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었는지를 천문학적으로 연구, 검증했다.

 

박창범 교수는 특히 두 책에 모두 기록된 5성취루현상에 주목하여 추적 조사한 결과, 실제로 서기전 1734년 7월 13일 일몰 직후 금성, 목성, 토성, 화성 그리고 추가로 초승달까지 일렬지어 하늘에 나타나는 장관이 연출됐음을 확인하였다.

 

박창범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을 우연히 맞출 확률은 0.007%에 불과하며, 책의 조작 여부에 관계없이 역사적인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확인했다.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이것은 우리 민족 문화사 가운데, 상고사를 실증적 규명단계로 진입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단군조선이 민족국가로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창조했음과 더불어 환단고기의 실체를 입증한 것이라 사료된다.

 

 

둘째환단고기 등장 이전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발해 3대 문왕 대흠무의 연호가 환단고기에 대흥大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서기 1949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 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 존호를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歷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 하고 불법의 수호자로 자처한 데서 드러나, 환단고기가 사료로서 가치 있음이 과학적으로 실증되었다.

 정효공주묘 벽화(연변 화룡현 용두산) 3대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묘는 당나라 양식을 다른 것이나 석실 내부의 벽에 백회를 바르고 12명의 인물을 그린 벽화는 고구려의 전통 화법을 이은 것이다.


셋째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중국 중동부 15개 주에 대제(大齊, 평로치청)라는 큰 나라를 세우고, 4 58년간 다스린 기록이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에 처음 나오는데, 이것도 1997년 처음으로 발간된 책 <고구려를 위하여>(김병호, 하서출판), 그리고 KBS 역사스페셜 중국 속에 또 다른 고구려가 있었다, 이정기 왕국(2001.5.16)에서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

 

 

넷째강화도 마니산에 제천단 참성단이 있어 역사적으로 각 왕조마다 해마다 천제를 지내온 바, 그 첫 기록이 환단고기 단군세기 단군왕검 무오 51(BC 2282)에 쌓았다는 것이 나온다. 마니산 참성단은 지금도 의연히 그 자태를 빛내고 있으며, 서울올림픽, 월드컵축구와 전국체전 성화채취의 기본성지가 되고 있다. 강화도에서는 이 밖에도 고조선 유물로 정족산성과 고인돌 127기가 있다.

 

 

다섯째는 단군조선의 실재를 보여 주는 것으로, 평양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에서 단군릉이 1993년 발굴되었다. 여기에서는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북한은 단군릉을 거대하게 개건하여 성역화하였다. 그리고 1926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모금운동을 하여 평양 강동현 단군릉을 보수하고 헤마다 제사를 올린 바도 있다.

 

 

여섯째,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 노온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고구려 불상에는 건흥오년세재병진建興五年歲在丙辰 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때 백제 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임자년인 412년에 사망하게 된다.

즉위년 칭원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삼아 본다. 그러면 장수왕 즉위 5년은 병진년이다. 따라서 병진년 불상 광배병과 <택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 대의 연호라는 새로운 지견을 추가할 수 있게 된다.

 

 

일곱째는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태조太祚,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연개 소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한 어떠한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의 묘지에서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자유로 명기하고 있어서 <태백일사>의 진가가 드러나게 되었다.

 

 

여덟 번째는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현재 태국에 있는 아유타국과 백제 상인이 교역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는 지역적 근접성으로 보아 백제가 현대의 캄보디아인 부남국扶南國과 교역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뒷받침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백제 해외경영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아홉 번째는 실증사학을 내세운 사대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 박사가 과거에는 단군을 신화로 몰다가, 친구인 재야사학자 최태영 박사와 국사 찾기협의회원들(김세환, 박창암 씨 등)의 우정 있는 충고를 받아들여 참회하고, 단군은 실존의 우리 국조이며, 역대왕조가 단군제사를 지내왔으나 일제 때 끊겼고, 삼국사기 이전의 환단고기 등 고기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고 1986년 10월 9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에 쓴 사실이다.

단군조선의 사실과 환단고기를 믿으라고 쓴 것이다.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그들 태두의 말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열 번째는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실증적 입장에서 깊이 연구하여 6하 원칙에 입각하여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위조했는지 명백히 제시해야 하는데, 이를 제시한 사람이 현재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열한 번째는 갑골문의 귀방이다.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도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유물,유적이 발견되었다. BC 1291년 단군조선 제21대 소태단군 재위 때 은나라 왕무정이 귀방을 쳤다는 기록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남아 있는데, 과연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는 은나라의 귀방 정복 사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환단고기는 이토록 확실한 역사적 근거와 고고학적 근거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열두 번째는 비파형동검이다. 단군조선의 비파형동검은 단군조선이 지나와 구별되는 선진 청동문화를 가진 정치세력 집단이었음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적,유물이다. 이 정치집단의 분포도는 환단고기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와 역사적 강역이 너무도 일치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비파형동검의 분포지는 만주, 한반도, 중국대륙의 동편으로 환단고기가 설명하고 있는 역사 강역과 완전히 일치하며 그 연대도 완전히 일치한다.


열세 번째는 고인돌 유적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가 설명하고 있는 고인돌에 대한 기록 또한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을 유적유물로 뒷받침하는 단군조선의 실증적 증거물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서는 배달국 신시시대의 장묘문화부터 고인돌 시대 장묘문화와 삼국시대의 장묘문화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이와 같이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실상을 연대기와 역사기록과 역사 강역을 정확히 표시하고 있는 아시아의 대표적 역사서이다.

 

 

열네 번째는 하북성 중산의 천자명문이다. 하북성 중산묘에서 BC 10세기 것으로 보이는 청동도기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천자건방중산후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핵심강역인 서요하 지역에서 출토된 BC 22세기의 도자기 부호와 양식이 완전히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BC 22세기부터 BC 10세기까지 북경과 하북성 일대를 다스린 것은 단군조선의 천자였음을 기록한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지나인들이 최초로 천자(황제)를 참칭한 것은 BC 221년의 진시황이었다.

 

 

열다섯 번째는 요녕성의 번한 명문이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환단고기가 기록하고 있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번한(번조선)의 명문이 나타나 환단고기의 사실성을 증명하고 있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番汗(번한)을 나타내는 番汗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은 도장이 발견된 것이다. 단군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진한(요하지역)과 번한(황하/하북성)과 마한(한반도/만주)등의 삼한(삼조선)으로 나누어 다스렸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유물,유적이 출토된 것이다.

 

 

열여섯 번째는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나사대 지역에서는 환웅과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의 곰녀를 상징하는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 출토되었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흥산유적지에서는 갑골문의 초기형태가 발견되어 은나라의 갑골문이 홍산문화 담당자들에 의해 전해졌음을 밝히고 있다. 이 흥산문화와 나사대 문화는 대체적으로 배달국 시대(BC 3898년과 BC 2333년 사이)와 일치하고 있다.

 

 

열일곱 번째는 배달국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 이다. 환단고기에는 BC 3898 18분의 황웅 중 배달국을 건국한 제1세 거발환 환웅께서 신지에게 녹도문을 창안할 것을 명하고, 배달국의 역사기록을 담당시킨다. 그러데 이 녹도문이 한국의 평양에서도 발견되었고, 산동성의 창성조적비에서도 발견되었다. 평양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의 글씨는 모양과 형태가 배달국의 녹도문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이 이렇게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열본 구주신가의 가림토문 비석이나 이세신궁의 가림토문 청동거울은 한글 비석과 한글 청동거울이라 명명하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완벽한 가림토문이다. 또 스리랑카 패엽경사 발위글과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역시 그 형태와 내용이 한글(가림토문)과 흡사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열아홉 번째는 요하는 압록이고 난하는 요하란 것이다. 환단고기 택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 이고, 지금의 요하가 압록 이고, 지금의 나하가 요수(요하) 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란 사실은 중국 요사지리지와 삼국유사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나하가 요수임은 서토의 고지도 지리도 연산도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에도 나타나 있다. 환단고기가 얼마나 정확한 기록을 반영한 역사서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스무 번째는 낙랑군과 낙랑국이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는 낙랑군과 낙랑 국에 대한 근거를 가장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낙랑이란 지명이 나타나는 것은  BC 1767년 제13세 흘달단군, BC 1237년 제23세 아흘단군, 그리고 BC 195년에는 낙락왕 최승이 보물을 싣고 마한의 서울 왕검성으로 가는 장면이 적혀 있다. 이때부터 하북성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이 구분되어 나타난다. 환단고기는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스물한 번째는 단군조선 12세 아한단군 때 가림토로 추정되는 순수관경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겼다는 내용이 환단고기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에 나오는데, 엄청난 시차를 두고 사항을 기록함에 위작을 했을 리 없는 것이다.

단기고사에는 아한단군과 유위자 선인의 먼 국가장래에 관한 대화 속에 사방국경에 제왕의 명호를 본국의 문자로 비석에 새겨 국문을 영원히 보전케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아한단군 52(BC 1833) 4월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났다. 8월 천제께서 나라 안을 순시하시고 요하 좌측에 이르러 관경순수비를 세웠는데, 여기에 역대 제왕의 명호를 새겼는데 이것이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스물두 번째는 환단고기에 원형 한글을 같은 의미로 가림토加臨土와 가림다加臨多라고 하는 표현이 있는데 단군세기의 가림토나 태백일사의 가림다는 각기 다르게 전해져 오는 기록들 가운데 이암은 가림토(행촌,단군세기)를 이맥은 가림다(십일당 주인, 태백일사 소도경전 본훈)라는 표현을 참고한 것이다.

가림토는 가림(분별)하는 토대 즉 땅이라는 의미로 그 뜻을 택해 토()를 썼고, 가림다는 가림하는다(,)라고 다를 썼으나 같은 뜻이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한가지로 표현했을 것이다.

 

 

스물세 번째는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제4 마한세기 상의 소도蘇塗가 세워지는 곳마다 산상웅상山像雄常을 보게 되었다.는 표현에 비밀이 숨어 있다.

이맥 선생이나, 안호상 박사, 환단고기를 번역한 임승국 교수도 뜻을 잘 몰랐는데, 구길수 선생이 최치원의 천부경 81자는 본 천부경 16(하나,,,,다섯,여섯,일곱,여덟,아홉,)을 풀어낸 시첩이라는 비밀을 풀어내면서, 남근상이 모셔진 소도라 풀어 산상웅상이 남근이라는 것을 밝혔다.

소도는 솟다에서 와서 솟터 솟토 소토 소도나 솟대가 되었고, 소도에 솟은 것은 처음에는 박달나무로 된 환웅상인데 그것이 여음(돌무더기로 표현)에 삽입된 남근상(힌두교의 시바 링가)이 솟아 있다는 것이다.

이는 환단고기를 쓴 이가 전해지는 말이나 책의 내용을 자신도 이해하지 못해 원저본을 그대로 썼던 것이므로,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는 한 증거이다.
 

[출처: 신명나는 한국사(고준환 著 p.61~69)]



<내용출처:한류열풍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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