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에 들어온 중국식 가부장제가 식민시대 거치며 제도와 규범으로 굳어져
원래는 상속·제사·족보에서 남녀와 친가·외가 차별 없고 차가살이가 일반적 풍속 

 
한국사에 가부장제가 형성되는 계기는 15세기 주자학과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수용이다.
이로써 가부장제의 이념적 틀이 마련되었고, 주자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주자가례의 실천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결정적 계기는 식민지 지배다. 우리가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가족상은 굳이 따지자면 100~200년 정도의 짧은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전통 중국 사회에서 여성은 두 번 출생한다.
여성은 혼인으로 사회적으로 출생하며 주어진 역할을 하게 된다. 맹자(孟子)가 말했듯이, 여성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남자 가문을 잇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할 뿐이다. 여성은 남성에게 부속된 채로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을 따르는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미덕으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중국과는 달랐다.
여성에 대한 제약이 별로 없는 고려의 분위기는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조선은 중국 고대를 이상으로 삼고 사회를 변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변혁의 도구로 주자가례를 활용하였다. 관혼상제(冠婚喪祭)를 규정한 주자가례는 가정의 일상생활에서 가부장제를 실천하는 매체였다.
이러한 개혁은 기존의 풍속과 마찰을 일으키며 또 어느 정도 변용되면서 한국 사회에 정착하여 지금까지 우리의 사고를 규정하고 있다.

지금 사람들은 시집살이가 우리의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론 시집살이가 아닌 처가살이가 일반적인 혼속(婚俗)이었다. 남자들은 외가에서 자라 장가를 가 처가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장가든 사람이 처가 피붙이들과 잘 지내기 위한 의식이 필요하다.
신랑은 처가 사람과 몸으로 부딪치면서 더욱 가깝게 된다. 이는 ‘신입생 환영회’이다. 요즘 결혼식 피로연에서 친구들이 신랑에게 장난을 치는 것은 여기서 유래한다.

이러한 혼인풍속은 16세기에 접어들어 바뀌기 시작하였다.
“처가살이하는 것은 남녀의 질서, 하늘과 땅이 거꾸로 된 것”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고유의 풍속이라는 반론 역시 강하였다. 결국 타협책으로 장가를 가서 일정기간 동안 처가에 머물렀다. 후대로 올수록 그 기간이 단축되었다.
처가살이하는 혼인풍속은 남녀평등의 사회적 여건을 만들었다. 놀라운 것은 그 전통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신혼여행 후 처가로 돌아와 며칠을 지낸 후 시집으로 그리고 그들의 보금자리에 둥지를 튼다.

 

 

조의선인 평...

 

단군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이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사상이다. 하지만 이 홍익인간에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평등사상이 내재되어 있다. 단군신화, 고주몽 설화를 보더라도 우리나라 역사에서 여성의 역할은 상당함을 알 수 있다. 곰에서 인간이 된(물론 이는 웅족의 공주인 웅녀가 계율을 지켜 한웅의 부인이 된다는 것을 신화로 표현한 것이다) 웅녀,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할 때 곡식을 준 유화부인을 보더라도 우리나라 역사에서 여성이 가진 상징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소서노라는 여걸은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국하는데 막대한 공을 세운 한민족 최초의 여왕이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울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온조가 백제를 건국할 수 있었던 건, 여걸 소서노가 있기에 가능했다.

 

고구려의 풍습 중에 서옥제와 데릴사위제가 있다. 이 풍속은 남녀가 결혼을 하면 남자가 일정기간 동안 처가집에 얹혀사는 제도이다. 바로 이 서옥제가 우리의 본래 결혼 풍속이었다.

 

본래 우리민족은 조선 초까지만 해도 남녀 구분이 없었다. 재산상속 역시 남녀 가리지 않고 균등상속을 하였다. 즉 우리는 이웃의 중국, 일본과 달리 남녀평등사상이 있었다. 이는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유럽, 미국, 그리고 일본을 보면 여자가 남자와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른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러한 남녀평등사상은 우리민족이 내세운 파격적이고, 인간적인 사상이었다.하지만 중국의 유교사상으로 인해 우리 고유의 풍속인 남녀평등사상은 점차 가부장제로 바뀌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여성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제 우리는 중국의 유교사상에서 벗어나 본래 우리의 사상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상식

고구려의 데릴사위에서 유례된 “남귀여가혼”이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의 혼인풍습으로 그

대로 전해졌기때문이다. ‘남귀여가혼’은 말 그대로 혼인 후 남자가 여자 집에 머물며 생활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조선 중기까지 광범위하게 행해진 혼인 주거의 형태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집에 살고 있는 여성의 발언권이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셀 수밖에 없었

다. 따라서 혼인 제도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고 이를 중국의 결혼제도인 ‘친영제도(親

迎制度)’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세종대왕은 즉위 17년(1435년) 3월에 파원군(坡原君) 윤평(尹坪)과 숙신옹주(淑愼翁主)와의

혼인을 친영의식으로 치르는 모범을 보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친영제도를 행하는 사대

부는 극히 드물었으며,

300여년이 지나 호란이후 질서를 잡기위해 주자학이 경직화되는 조선 후기(17세기 말∼18세

기 초)에 와서야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

이것도 완전하지가 않아서 예전에는 아이가 다 클동안 처가에서 살던것에서

‘반친영’이라는 이름으로 이전의 혼인제도와 절충, 혼례는 여전히 여자의 집에서 하고, 다

만 신랑이 신부집에서 2 ∼ 3일 정도 머무는 것으로 기간이 대폭 줄어 들었다

그래서 18세기 어느정도 친영제도가 정착되기전까지는 결혼을 할 때에도

꼭 신랑이 먼저 신부 집으로 가서는 그 집 마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서는

첫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그냥 그 집에서 사는데...

신랑은 장인의 집, 즉 장가(丈家)에서 3년에서 10 여 년까지도 생활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아무개가 장가를 갔다”라고 했다.

그리고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그제서야 신부가 신랑의 집 쪽으로 움직이는데...(이제는 신랑신부도 아니지만)

사람들은 이를 두고 “아무 집 아기씨가 시집을 갔다.”라고 했다.

그래서 옛날에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결혼후 20여년이 지난 나이40 에 율곡등 자식들을

데리고 친정인 강원도 땅을 떠나 시집인 한양으로 올 때에 발길이 안 떨어진다면서 애절한

한시를 지은 적이 있고...

또 율곡이 장가 갔다가 본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퇴계의 댁에 들렀다가 자고 왔다는 기록

도 보인다.

그리고 이순신이 장가 갔을 때에는 시골 무관 출신인 장인 영감이 “제발 공부 좀 해라”는

등쌀에 못 이겨서 무과 과거 시험을 보았다는 기록도 보이고... (28살 때의 첫 시험은 말에

서 떨어지는 통에 불합격했고, 32살 때의 두 번째 시험은 거의 턱걸이로 합격한 적이 있다)

참, 이런 전통은 중국식 친영제도가 상당히 정착된 18세기에도 보이는데..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장가에 갔을 때에는 처삼촌이라는 사람이 매일 꽉 붙들어 놓고 사마천

의 “사기”를 비롯한 온갖 책들을 가르치는 바람에 박지원의 실력이 엄청나게 늘었다는 기

록도 보인다.

거기다 같은시기 정약용도 고향인 경기도를 떠나 서울에 와있을때 처가에 살면서

기반을 닦아나간 기록도 남아있다...

( 조선시대의 영웅들이 처가에서 쿠사리좀 먹은듯 싶습니다. ^^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여성들의 목소리가 컷습니다. )

그리고 재산 문제에 있어서도

부모님이 돌아 가시면 출가한 딸까지도 맏아들과 똑같은 규모의 유산을 상속했던 것이 조선

중기까지의 우리나라 전통이었다. 그리고 재산을 상속 받은 형제자매는 아들딸 구분없이 그

집안의 제사를 똑같이 나누었다. (그러니까 장남이 증조 할아버지 제사를 가져가면, 출가한

맏딸은 증조 할머니 제사를 가져가고.... 하는 방식임. 제사까지도 남녀 평등했지요 ^^)

하지만 이런것에 실질적 첫 브레이크가 걸리는데 양반등 모든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자학 신봉자 성종은 여자가 재혼하면 자식의 과거길을 막아버리면서

양반가 여인들의재혼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지만 일반 90%이상의 백성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었

다.

 

(이당시 유럽에서도 남녀가 평등하게 재산을 상속받았을까요??? ^^)

그러나 양반가의 연인들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두 번의 큰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전국적

으로 흩어진 가족들이 너무 많아져서 막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살았으면 어디에 있는지 모

르는 상황에서 부모님 유산이 장남에게만 단독으로 상속시키는 사례가 늘어 났고....(물론

집안 제사도 다 가져 갔지요)

재산이 장남에게로 몰리자 그 때부터 조선은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사회로 급속히 변화해 갔

는데.... 이후 2- 300년 간이야말로 우리 역사에 유례가 없는 여성 수난사가 전개되었지요.

여기에 이런 사회적 변화와 호란이후집권층의 사회통제를 목적으로 한 주자학의

경직화는 오래 전에 만들었던 과부재혼금지법도 그제서야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햇고...

천년 넘게 내려온 결혼제도 마저 바꿔면서 이것들이 복합작용을 일으켜

조선후기 이로 인한 여성 피해 사례도 생겨 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법적으로는 균등상속이 조선후기에도 보장되 있었고 일제시대에 와서야

차등상속이 시행되다가 해방이해에도 이를 계속 적용하지만 민주화이후 10여년전

균등상속으로 복귀하죠.(정말 쪽바리들 ㅅ ㅂ ㄹ ㅁ)

조선후기에 와서도 서민들의 성문화나 재혼은 자유로웠지만 결혼제도만은 양반들의

영향으로 중국식 친영제도가 양반들에 이어 서민들에게 까지 전파되죠..

거기에다가 일제의 침략은 여성 수난사에 더욱 기름을 부었습니다. 일본은 원래부터 여자를

재산목록의 일부로 간주하는 나라이라서 여자를 대단히 우습게 보는 전통이 있는데, 우리 남

자들이 그 때 그것은 확실히 배워 두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 그래서 일제 시대 때부터 남편이 부인에게 반말하는 풍조가 생겼다고 함 ---

그 당시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평등했던 남녀관계가 호란과 특히 왜국의 침략

시절에 많이 변질 됐습니다.

<출처 : 한류열풍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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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중국 산동성 황하유역의 선사유적지 능양하를 발굴하던 중국 고고학자들은 알쏭달쏭한 문양이 새겨진 팽이꼴 토기를 발견하고 고민에 빠졌다.

높이 57cm의 토기 상단에는 (1)과 (4)가 합쳐진 문양이 있었다. 왜 이런 문양을 새겼을까. 궁리 끝에 학자들은 이곳이 청동기시대 고대중국문명의 터전인 대문구(大汶口)문화 유적지이자 갑골문자를 고안한 은나라 문화기반임에 착안해 토기문양을 한자원형으로 점찍었다.

그러나 (1)과 (4)로 구성된 문양의 의미는 기존 한자체계로 명확히 설명되지 않고 토기모양도 다른 지역 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난점이 남았다.

사진설명 :(왼쪽)산동성 능양하 유적에서 출토된 고조선 특유의 팽이형 토기. 신용하 교수가 아사달 문양으로 추정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신용하 교수의 설명

민족기원사 연구에 천착해온 신용하 서울대교수(사회학)는 최근 <한국학보> 봄호에서 이와 관련해 이 능양하 토기의 문양이 바로 고조선의 도읍지로 기록에 언급된 아사달을 뜻한다는 이색견해를 제기했다.

`고조선, `아사달'문양이 새겨진 산동 대문구문화 유물'이란 논문에서 그는 상형된 모양새로 비춰 (1)문양의 ○는 태양, (3)은 구름 또는 바다(또는 바다에 비친 태양의 불빛)를 상징화한 것이며 이를 합친 (1)은 옛 고조선말로 `아사'(아침), (4)는 달(따뜻한 양지의 산)을 나타낸다고 풀이했다.

따라서 두 문양을 합치면 고조선 말에서 나라와 서울이름을 뜻하는 `아사달'이 되고, 이를 한자로 옮긴 것이 조선이 된다. 신 교수는 논문에서 “중국 고고학·역사학자들은 한국어의 특질을 파악하지 않은 채 ◇을 단순히 한자 기원으로만 간주했으며 팽이형 토기가 고조선문명 특유의 토기양식이라는 사실도 간과했다”고 비판했다.

중국학자들은 (1)을 `아침 단'(旦)이나 `여름하늘 호'(昊), `빛날 경'(炅) 등의 기원으로 보았으나 그 밑의 (4)를 합친 문양은 해석하지 못하거나 불 또는 (1)문양의 변형이라는 등 억지맞춤식 해석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같은 문양의 토기가 부근에서 11개나 출토됐고, 고구려 벽화에서도 이 문양이 발견돼 이 가설은 짐짓 흥미롭다.

팽이형 토기도 논란거리다. 이는 기원전 3000년~2000년 청천강 이남부터 한강이북에 나타난 양식으로 김원룡 등 남한 일부학자와 북한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양식으로, 남한학계는 지방양식이라고 평가절하해 왔다.

신 교수는 북한가설을 토대로 팽이형 토기가 산동에서 발굴된 것은 당연히 고조선인들이 활동한 근거라고 주장한다. 중국사서에는 산동 고대문화의 주역으로 황하상류 화족과 다른 동이족을 제시했으나 고조선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고조선 산동 진출설을 주장한 신채호의 주장을 연계시켜 동이는 고조선 후국세력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신 교수는 이전부터 여러 논문에서 한·맥·예 3부족 연맹으로 성립한 고조선이 만주, 중원에 후국을 거느린 거대문명권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한국학보의 글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주류 사학계에서는 신 교수 주장에 대해 고고학적 논증이 미흡하고, 지나치게 민족중심의 주관적 해석이라는 입장을 보여왔다.

그러나 산동고대문화의 주역인 동이족 실체에 대해서는 억측 또는 무관심의 극단적 태도가 엇갈려왔다는 점에서 이 논문은 성찰의 여지를 남긴다. 팽이형토기 양식논란을 주류학계가 정밀한 검토없이 사실상 묵살해왔다는 점에서도 중국지역의 고조선 문화연구의 허술함을 겨냥한 신 교수의 주장은 일단 검증하고 재론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노형석 기자nuge@hani.co.kr  한겨레신문 2001. 3. 1

 

<출처 : 한류열풍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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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구한 역사를 두고 채 60년도 존속하지 않았던 위촉오 삼국의 역사를 과대포장한 ‘소설 삼국지’를 우리는 왜 숭상하고 있는가 ?

청소년들의 필독서가 아니라 동이의 역사를 망각시키기 위한 소설책일 뿐이다


아래의 표는 차이나역사 연표입니다.

현 차이나인들이 왜 한(漢)나라나 당(唐)나라 시기가 자기네들 최고의 전성시대라고 이야기하는지 이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차이나인들이 한과 당을 최고의 국가로 여기는 또 한가지 이유는

유사이래로 차이나인들에게 항상 두통거리였고 두려워했던 아시아의 강국인 조선(한나라시기)과 고구려, 백제(당나라시기)를 멸망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유전자 속엔 우리 민족에게 공포와 두려움의 인자가 뿌리깊게 박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조상 국가를 멸망시킨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래 표에서 보듯이 차이나(한족)가 중원의 대륙을 차지하고 있었던 시기는 별로 되지 않습니다.  그 국가의 존속기간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말로 사이(四夷)가 중원에 나라를 세워도 자기들의 역사로 하지 않으면 역사의 단절과 단명으로 인하여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요, 금, 원, 청, 심지어 서하’까지도 그들의 역사에 포함을 시켜 놓고 있고  이제는 고구려도 달라고 합니다.

고구려가 가게 되면 옛 부여나 고조선은 물론이고 발해까지도 저들의 역사의 범주안에 들게 됩니다.
  
고구려가 차이나의 역사에 들게 되면 차이나 역대 최장수국가가 되기 때문에 정통성 확보와 미래의 민족간 분열 방지 등을 막을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날 갑자기 중화민족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게 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중화민족은 차이나가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모두를 포함한 현 중화인민공화국의 전체종족을 의미하는 말로서 하나를 지향하는 한족의 치밀한 계산속에서 출발된 것입니다.

아래의 표를 보시고 과거의 소위 한족이라는 족속이 중원에 얼마나 존재하고 있었는지를 알아 보시기 바랍니다.

배달민족역사침탈음모(동북공정)를 이길 수 있는

 

 

첫번째는 저들이 말하는 고구려는 일개 중앙정부의 변두리의 지방정권국가라는 말을 깨는 것으로서 바로 우리의 대륙사관이 확실하게 증명이 되면
오히려 저들이 우리의 변방국가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차이나는 하나를 추구하는 나라입니다.  그 넓은 땅 덩어리에 하나의 시간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또한 그들의 민족은 하나의 민족 즉 새로운 중화민족이라는 종족입니다.
하나를 추구하는 획일을 깨는 것이 바로 차이나를 이기는 것이며
차이나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왕조와 왕조 존속기간)



왕조                       존속기간        

진 (秦)      :    前 221 ~ 前 206 (15년)

서한 (西漢)  :        前 206 ~   8 (214년)

신  (新)       :            9 ~  23 (  14년)
       
동한 (東漢)  :           25 ~ 220(195년)


삼국시대    :   위(魏)    220 ~265 (45년)

          촉(蜀)    221~263 (42년)

          오(吳)    222~280 (58년)

진 (晉)     :        서진(西晉)   265~316  (51년)

              동진(東晉)  317~420  (103년)


5호 16국 (五胡十六國)
          
                           전조(前趙)  304~329  (25년)   
                     전촉(前蜀)  304~347  (43년)
                           후조(後趙)  319~350  (31년)
         전량(前?)  324~376  (31년)
         전연(前燕)  337~370  (33년)
                           전진(前秦)  351~394  (43년)
           후진(後秦)  384~417  (33년)
         후연(後燕)  384~409  (25년)
         서진(西秦)  385~431  (46년)
         후량(後?)  386~403  (17년)
         남량(南?)  397~414  (17년)
         남연(南燕)  398~410  (12년)
         서량(西?)  400~420  (20년)
         북량(北?)  401~439  (38년)
         하(夏)      407~431  (24년)
         북연(北燕)  409~436  (27년)

남북조(南北朝)
         송(宋)    420~479  (59년)
         제(齊)    479~502  (23년)
         량(梁)    502~557  (55년)
         진(陳)    557~589  (32년)
         북위(北魏)  386~534  (148년)
         동위(東魏)  534~550  (16년)
         서위(西魏)  535~556  (21년)
         북주(北周)  557~581  (24년)
         북제(北齊)  550~577  (27년)

수  (隋)             581~618  (37년)

당  (唐)             618~907  (289년)

오대  (五代)          
                          후량(後梁)  907~923  (16년)
          후당(後唐)  923~936  (13년)
          후진(後晉)  936~946  (10년)
          후한(後漢)  947~950  (3년)
          후주(後周)  951~960  (9년)
10국  (十國)     
                오(吳)      902~937  (35년)
          전촉(前蜀)  907~925  (18년)
          오월(吳越)  907~978  (71년)
          초(楚)      907~951  (44년)
          남한(南漢)  907~971  (64년)
          민(?)      909~945  (46년)
                남평(南平)      924~960  (36년)
          후촉(後蜀)  934~965  (31년)
          남당(南唐)  937~975  (38년)
          북한(北漢)  951~979  (28년)


북송   (北宋)                         960~1127  (167년)

남송   (南宋)                         1127~1279  (152년)

요      (遼)            907~1125  (218년)
  
금      (金)            1125~1234  (109년)

원      (元)            1206~1367  (161년)
  
명      (明)            1368~1644  (276년)

청      (淸)                                1616~1911  (295년)



(사무불통)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

차이나의 배달역사찬탈음모(동북공정)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차이나는 고구려가 차이나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을 하는데, 아래 표를 보면 고구려가  과연 차이나의 지방정권이었는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아래표는 고구려 존속기간 동안에 차이나의 국가들의 존속기간 및 존속년수를 나타냅니다.  고구려 1 개 국가가 존속하는 동안 차이나의 국가는 무려 36개 국이나 세워지고 멸망을 합니다.

 

어디가 중앙정권일까요 ?



<출처:한류열풍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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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에 대한 도전-바다에 잠겨있는 고대 유적

현재 학계에서의 문자사용연대는 5천년전

지구는 46억 년 전에 생겨났고 영장류는 신생대 4기의 빙하기에 비로소 출현했다고 하는데 그 때가 대략 180만년 전 일이다.

인류의 사회활동과 문화는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무렵에야 나타났는데 그때가 약 1만2천년 전이라고 본다. 그리고 학계에서는 문자와 상징체계의 기록5천년 전에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보는데, 이 시대 이전 즉 문자를 사용하기 이전 시대를 사람들은 선사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발굴된 유물은 발달된 문명 소유

그러나 오늘날 해저에서 건져 올린 점점 더 많은 선사시대 유적들이 위와 같은 견해에 도전하고 있어서 과학자들은 당황하고 있다.

해저 유적 중 건축물들은 정교한 건축 기술과 예술적 기교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발달된 문명의 흔적을 보여준다.게다가 그 문명의 주인공들은 문자를 알고 있었으며 피라미드를 건설하기도 했다.

현대의 과학기술로 보면 그곳이 1만년 혹은 그 이전에는 육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석기시대 훨씬 이전의 선사시대에 발달된 문명이 존재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문명들은 사라졌고 바다 속에는 그 유적만 남았다.

아래에서 이들 문명이 존재했다는 몇 가지 증거들을 살펴보자.
 

  지중해 연안에서 발견한 해저도시

이집트 해안 근처 해저에서 고고학자들이 거의 완전히 폐허로 변한 고대도시의 유적들을 찾아냈다. 2,000년 6월에 프랑스와 이집트 연합팀은 1,000여 년 전에 가라앉은 메누티프와 헤라클레이온이라는 도시를 알렉산드리아에서 6km정도 떨어진 지중해 해저에서 발견했다.

파리에 본부를 둔 유럽 해양고고학연구소 소장인 프랭크 고디오 씨는 "아마 그것들은 지진 때문에 사라졌던 것 같다. 지진으로 지중해의 해수면의 갑자기 상승했다가 가라앉았거나 아니면 기후의 변화가 그 도시들의 멸망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그 도시에는 세라피스, 이시스, 오시리스 신들에게 바쳤던 수많은 사원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부와 예술이라는 면에서도 고대의 전설이었다. 해저에서 건져 올린 정교하게 조각된 키 1.5m의 검은 이시스 여신상을 매스컴에 공개하면서 고디오씨는 "나에게는 그녀가 17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마 1,200 살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발굴한 금화로 볼 때 이 지역들은 적어도 8세기까지는 물속에 가라앉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같은 지역에서 카노푸스와 토니스라는 수몰된 다른 두 도시를 확인하였다.
 

  버뮤다의 수중피라미드와 바하마제도의 해저 건축물

1958년에 몇몇 미국의 과학자들이 바하마제도 주위의 바다 속을 탐사하던 중 이상한 건축물들을 발견했다. 이 건축물들은 특이한 기하학적 양식이었는데 수 마일이나 곧바로 뻗어 있었다. 10년 후에 길이가 120m에서 150m에 이르는 거대한 돌 벽들을 그 근처에서 발견하였다.

그 이후에 복잡한 연단, 도로, 항구, 다리 등과 같은 것들을 발견하였다. 이 전체 유적들이 마치 항구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유럽과학자들은 버뮤다 삼각지대를 조사하던 중 예전에 알려지지 않은 거대한 수중 피라미드를 발견했다. 그 피라미드는 한 변이 300m, 높이는 200m였다. 피라미드에는 사람이 만든 것이 분명한 거대한 구멍이 두 개 있었다.

바닷물이 이 구멍으로 밀려 들어와서 회오리치며 밀려나와 피라미드 근처에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그 소용돌이가 해수면을 구름모양으로 만들었다. 육지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것은 수 만년 이전 일이기 때문에 이 피라미드를 언제 만들었는지 추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일본 요나구니 섬 해저에서 발견한 상형문자

약 50년 전에 몇몇 잠수부들이 류큐 군도에 있는 요나구니 섬 남단의 바다 속에서 인간이 만든 건축물 유적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산호로 뒤덮인 사각형 모양 건축물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거대한 연단이었다. 모퉁이, 통로, 계단, 아치형 부속 건축물을 갖춘 연단이었다.

그 유물은 고대도시의 제단과 비슷하게 생겼다. 길이는 동서로 약 200m, 남북으로 약 140m에 이르렀다.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이 약 26m 정도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놀라운 발견은 “상형문자”였다. 그 상형문자들은 돌 벽에 새겼는데 고도로 발달한 어느 고대인류문명이 후세에 남긴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요나구니 섬 남쪽의 유명한 리센얀 주위의 바다 속에서 사람의 머리상을 발견하였는데 안면 특징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 후에 그 거대한 인간의 머리상 근처에서 상형문자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그 해저 유적을 건설한 사람들이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마사키 기무라 씨는 류큐 대학 지질학 교수이다. 그는 1999년 9월 어느 인터뷰에서 “그 유적들이 인간이 만든 건축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머리상과 상형문자를 발견하였다는 것은 요나구니 섬 남쪽의 해저 유적이 바다 속으로 침몰되기 전에는 지상에 존재했던 선사문명의 산물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하겠다.

  일본에서도 발견한 해저 피라미드(1만 년 전)

요나구니 섬 남쪽은 물론 서쪽에서도 중요한 유적을 발견하였다. 1990년에 잠수부들이 바위로 만든 거대한 피라미드를 발견했다. 이 피라미드는 폭이 183m, 높이가 27.43m였는데 직사각형 바위로 만들었고 5층으로 되어 있었다. 근처에는 이 거대한 피라미드와 비슷한 작은 건축물들도 몇 개 있었는데 소형 피라미드라고 할 만했다.

이 탐사에 참여한 류큐 대학의 지질학자들은 이 유적이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인조 건축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런던대학교의 고고학자들은 그 피라미드를 만든 사람들은 적어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인더스 문명과 같은 고대문명 수준이라고 믿었다.

도쿄 대학의 한 지질학 교수는 그 지역이 약 1만 년 전마지막 빙하시대에 바다 속으로 침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과학지식으로 이해한다면, 그 시기 인류는 아직 동물을 사냥하며 생활하던 원시인이었다. 그런 원시인들이 피라미드와 같은 구조물들을 축조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만 펑후에 있는 고대 해저도시 벽

펑후 현의 고대 사료보관소 기록을 보면 “후징 지역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바다 속에 길게 뻗어있는 도시의 벽을 볼 수 있다.”라고 나와 있다. 예전에 사람들은 그곳을 “후징의 깊은 물웅덩이”라고 불렀다. 1982년에 전문 잠수부들이 후징의 침몰된 도시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했다.

이곳은 그레이엄 헨콕의 “신들의 지문” 등과 같은 저서를 통하여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바다 속에 가라앉은 도시에서 건져 올린 돌 건축물들은 천연 석조물들과는 확실히 달라서 그 시대의 사람들이 그 건축물들을 만들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말하기를

“현재 인간사회에는 이미 확립된 학설이 있다. 그러나 이 학설로는 최근에 발견한 고고학적 유물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오늘날과 선사시대의 건축물들이 서로 어느 정도 관계가 있을까?

사실 현재의 역사는 사라진 고대문명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 건축물들이야말로 사라진 고대문명을 우리들에게 말해주는 단서들이다. 다시 말하면 후징의 해저도시나 유사한 유물들이 과거 인간문명에 대한 숨은 증거를 담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전설적인 무 대륙의 문명

무 대륙은 태평양에 위치해 있었다. 무 문명은 매우 번성하여 높은 수준의 문학, 예술, 공예기술, 기계류 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강력한 식민지 제국을 건설하기까지 했다. 그 당시에 무 제국을 “세계문화의 절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번창했던 무 대륙은 일시에 사라졌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지각변동으로 무 대륙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고 말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 엄청난 비극은 격렬한 화산 용암분출에 이은 강진, 태풍과 함께 시작하였고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발생했다. 육지는 파도처럼 소용돌이쳤고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모든 것이 장난감처럼 무너졌고 즉시 용암과 바다 물이 이를 덮어 버렸다.

해저 유적은 선사문명이 존재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교과서에서는 아직 그런 것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현대의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현존하는 역사적 지식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용출처:시인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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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역사 모독하는 일본]


서양 사학자가 본 한일관계 “한국은 부모, 일본은 부모 버린 불효자식”




일본이 오래 전부터 한국문화의 산물을 일본 국적의 것으로 기만하고 역사를 왜곡해온 사실을 폭로한 서양 학자가 있다.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1912~96) 박사가 그 주인공.

컬럼비아대에서 일본미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백인 최초의 일본학 박사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문화를 연구하다가 그 근원인 한국문화에 심취해 깊이 있는 연구활동을 벌였다.

1978~86년엔 한국에 머물며 한국미술, 한국불교, 한일 고대사, 도자기 등에 대한 1000여 편이 넘는 칼럼을 썼고, ‘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일본의 숨겨진 역사’ ‘조선호텔 70년사’ ‘뿌리’ 등 5권의 한국문화 관련 저서를 펴냈다.

그의 아들, 앨런 코벨 박사 역시 부여족을 연구하며 한일관계에 대한 많은 글을 썼다.

다음의 글은 1982~83년 존(사진 왼쪽)과 앨런 코벨이 한국과 일본 역사적 진실에 대해 쓴 칼럼을 요약한 것이다(#6과 #7이 앨런 코벨의 글).

비록 20여 년 전 씌어진 글이지만 오늘날 일본의 행보를 정확하게 내다봤을 뿐 아니라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제3국 학자의 냉철한 시각을 엿볼 수 있다.

 

① 자작나무 말다래에 무속적 통치자의 흰말을 그린 5세기 신라의 천마도. 일본의 스사노오노 역시 흰말을 탔다고 전해진다.
② 백제 근초고왕 때 왕세자가 왜왕에게 하사한, 7개 곁가지가 있는 칼 ‘칠지도’.
  

 

[#1] 역사왜곡은 712년부터 이어졌다



일본인이 쓴 글에는 한일관계를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 아주 많은데, 한국인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히틀러는 “거짓말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은 잘 믿는다. 거짓말이라도 자꾸 되풀이하면 머잖아 많은 사람이 진실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첫 번째 왜곡은 1300여 년 전 씌어진 첫 일본 역사책에서 일어났다.

당시 나라(奈良)의 왜(倭) 지배자들은 일단의 학자들에게 사서 편찬을 의뢰했다. 편찬 목적은 당대의 일왕들이 정통성을 가진 지배자임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역사가들은 369년 가야 부여족의 왜 정벌 이래 700년까지 한국이 정치·문화적으로 일본을 전적으로 지배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춰버렸다.
히틀러가 말한 것처럼, 거짓말은 클수록 사람들을 속이기가 쉬운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본 사가들은 역사를 뒤집고 가야에서 온 부여족이 왜를 정복한 게 아니라 왜가 가야를 정복했다고 썼다.

‘일본에서 와 가야와 신라를 정복했다’고 알려진 유명한 신공(神功)왕후는 사실은 선단을 이끌고 왜를 침략해 정벌한 강인한 의지의 한국왕녀였다.

369년의 오진왕부터 게이타이왕 이전까지(또는 일본역사에 등장하는 15대 천황부터 25대까지)는 전혀 일본인이 아닌, 순수 한국인 혈통의 왜왕이었다.

일본 건국자로 알려진 초대 일왕 진무는 4세기 부여인들이 일본을 정벌한 사실을 반영할 뿐이다. 해의 여신인 천조대신(天照大臣)은 무당이며, 그녀의 오빠 스사노오노 미코도(素尊)는 신라인이다.
그러나 8세기 역사가들은 이 두 인물에게 일본옷을 입혔다.
20세기에 와서 이들의 정체가 드러나기까지, 역사가들은 사람들을 속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나이 든 부모를 버리는 불효자식 이야기가 있다.

일본인들은 두 세대 전 한국인들에게 한국문화는 열등한 것이라 며 일본말과 일본 이름, 일본식 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강권했다.

한국의 수많은 서책이 불에 타 없어지고 예술 활동도 금지됐다.
숱한 보물이 나라 밖으로 실려 나갔다. 석굴암을 해체해 돌 하나하나를 일본으로 옮기려고까지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은 거짓말과 날조를 통해 한국인에 대한 문화적 대량학살을 감행했다.
그러나 진실은 일본이 초기 역사부터 8세기에 이르도록 한국이 떠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자란 어린아이였다는 것이다.

정말 배은망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제 한일강제합방이 ‘한국을 위한 선택’이었으며, ‘한국인들이 원한 일’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역사를 재구성하려 한다.

일본이 일으킨 지금의(1982년) 교과서 파동은 첫 단계에 불과하다.
다음 단계는 일본 헌법의 전쟁 금지조항을 삭제하고, 셋째 단계에 가서는 천황가를 ‘성스러운 권력체’로 되살린다는 게 일본의 속셈이다.

이것이 실현 가능할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집권여당이 된 자민당은 그 이름과는 동떨어지게 보수성과 상업성을 추구하는 정당으로 군림했다.
이제 자민당은 상징적인 존재인 일왕을 실제적인 국가원수로 키우고 싶어한다.


자민당 내 헌법조사위원회는 현행 헌법에 대한 다양한 개정안을 마련해놓고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왜곡을 서슴지 않고 헌법에서 전쟁금지조항이 삭제된다는 것은, 1920년대 전후에 그러했듯이 군부 세력의 득세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로 현행 일본헌법 제4조를 삭제하려는 시도는 정세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결정적으로 말해준다. 현행 일본헌법 4조는 ‘천황은 국가적 문제에 결정권이 없다’는 것이다.


‘신성한 日王’의 부활?

1920~30년대에 ‘신성 천황’ 개념은 일본 군부가 녹슨 칼 휘두르듯 내세우던 구호였다.
천황을 손아귀에 넣고 조종하던 군부는 ‘만세일계의 현인신(現人神) 천황’의 이름으로 각종 군사조직을 강화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지금(1982년) 그런 것처럼, 교과서 내용을 왜곡했다.

한국과 일본의 건국신화의 시대적 배경은 모두 청동기 문화시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신화내용이 엇비슷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건국신화는 일본보다 더 일찍 생겨났다. 한국인들이 석기시대 일본으로 이주해 가면서 우수한 무기와 건국신화도 따라서 이동했다.
이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공통된 현상으로, 앞선 문화와 앞선 기술의 무기를 가진 민족은 늘 그보다 못한 민족을 정복했다.

역사왜곡 또한 인간이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이래로 수많은 나라에서 행해진 일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보다 정직한 미술사를 선호한다.
중국 역사가들이 남긴 전형에서 보듯, 새 왕조를 연 개국공신들은 언제나 전 왕조를 비난했다.
공산주의 국가는 역사를 아예 사상의 선전도구로 활용했는데, 옛 소련이나 북한이 책을 정직하게 기술하길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에 비해 일본과 서독은 민주국가를 표방한다.
민주국가라는 일본이 한일강제합방이나 난징 대학살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부인한다면 독일이 히틀러를 영웅이라고 정당화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일본의 왕에게 아무 권력도 없던 중세에는 역사가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됐다.

그러나 일본 군부가 아시아를 침탈하는 팽창정책에 천황이 이용되면서, 일본의 교과서는 선전도구가 되고 말았다.
최근 자민당은 일왕을 상징적 존재 이상으로 만들려 노력하고 있어 그 실현은 시간문제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일본인들은 이를 ‘국내 문제’라 할 것이다.
어떤 면에선 그렇다.
불행하게도, 수백만명이 그것이 일본 내 문제가 아닌 세계의 문제’임을 알고도 말할 수 없게 됐다.
죽었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한때 아시아 8개국에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고 여타 국가에도 말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친 ‘세계의 문제’였다.


악명 떨치던 일본 경찰

일본이 상대적으로 빈곤국가이던 1920년대에도 군국주의의 대두는 그처럼 심각한 것이었다.
이제 일본은 세계 제2의 부국이며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국가로 성장했다.
따라서 군국주의는 백배 더 가공할 사태를 불러올 것이다.
한때 한국인들은 누구나 일본 경찰을 두려워했다.
한낱 동네 경찰이라 해도 일본에서조차 1930년대의 양식 있는 시민에게는 막강한 군부세력의 말단조직원으로 진정 두려운 존재였다.

일본에 머물 때의 일이다.
나는 여행길에 배의 상갑판에 올라가 있었다.
그때 “천황의 초상화를 싣고 가는 배의 상갑판에 올라간 것은 불경죄에 해당하니 당장 내려오라”고 해서 억지로 내려서야 했다.

또 말이 날뛰는 바람에 위험에 처한 일왕비에게 뛰어들어 목숨을 구해준 어느 남자는 ‘신성한’ 왕비의 비단옷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손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흔히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일본은 정말 ‘신성’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중인가.
히로히토 천황이 취미인 물고기 표본에 심취하는 팔순의 멋진 노인으로 남아 있기를 나는 바란다.



[#2] 일본인은 솔직해질 수 없다



1980년 나는 유네스코 강당에서 3대의 영사기로 컬러 슬라이드를 비춰가며 한국·중국·일본의 예술형태를 통해 극동의 세 나라를 비교하는 강연을 했다.

세 나라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할 말을 찾다가 영어의 C자로 시작하는 낱말을 떠올렸다.

중국은 통제(Control), 한국은 무심함(Casual), 일본은 작의적(Contrived)이라고. 이런 대비는 삼국의 도자기를 비교해보면 뚜렷하게 드러난다.

중국 도자기는 가마와 유약의 사용을 철저하게 관리한 결과 특히 도자기에서 완벽의 경지를 이뤄냈다.
한국의 도공은 언제나 자연스럽기 짝이 없고 무심해서, 이들이 만들어낸 도자기에는 도공의 기질과 불이 어떻게 작용했는지가 그대로 반영된다.


일본인들은 15세기 이도다완 전쟁에서 보듯, 이러한 한국적 무심함을 높이 취해서 과도하게 발전시킨 나머지, 그들의 도자기는 자의식이 담긴 작의적인 것이 됐다.

일본인들은 가마에서 구워낸 화병의 한 귀를 일부러 구부리거나 깨버림으로써 한국 도자기가 갖는 것 같은 ‘무심함’의 미를 주려고 한다.

미국인이 보기에 한국 도자기의 이런 무심함은 솔직함과 통한다.

내가 일본의 교토보다 서울에서 더 편히 지내는 이유는 지극한 미소로 일관하는 교토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솔직한 서울사람들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10여 년 동안 매년 여름과 겨울을 교토 대덕사(大德寺)의 유명한 선사찰 진주암에서 보냈는데, 그 무렵 나는 주지스님과 삶에 있어 ‘솔직함’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자주 다투곤 했다.

면전에서 하는 말과 등뒤에서 하는 말이 다른 일본인의 이중성에 대해 지적하면 그는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정당화하곤 했다. 그것이 바로 ‘호벤(方便)’, 즉 편의라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솔직함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자기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일본인들은 어떤 상황이라도 거기에 맞는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있다.
그들이 진짜로 느끼는 감정은 속에서 억제되고 대신 ‘작의적 얼굴’로 외부에 알려지는 것이다.
일본인에게 인생은 이미 오래 전에 의도된 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니 누구든 자신을 거기 맞춰 살아야지 예상에 없는 짓으로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

 진주암은 일본 역사상 아마도 유일하게 100% 솔직했던 인물을 받드는 절이기 때문에 나는 그런 개념을 특별히 더 기만적이라 생각했다.

겉으로는 독신을 내세우면서 뒤로는 온갖 난잡한 일을 다 저지를 대신 승려 잇큐(一休)는 거리낌 없이 여자들과 즐겼고 그로 인해 계율로 엄격하게 금지된 것들에 대해 잘 알았다.
이 때문에 잇큐는 호벤, 혹은 ‘편의상의 거짓말’을 생의 방편으로 정당시하는 사찰에서 받드는 인물이 됐다.

진주암에서 이런 문제로 한바탕 논쟁이 벌어지면 스님이 으레 하는 말이 “그래, 당신이 옳소. 잇큐는 솔직한 사람이고 우리도 그래야겠지만 여기는 일본이요. 잇큐처럼 정직한 건 미국에선 괜찮겠지만 일본에선 맞지 않아요”.

나는 일본에 있는 절이 모두 그런 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거짓말이 살아 있는’ 진주암에서 지냈다.
적어도 잇큐를 추모하는 사찰인 이곳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고 벽에는 섬세한 수묵화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여기서의 표준개념인 ‘살아 있는 거짓말’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했다.


한국적 무심함과 일본적 작의성

잇달아 2년간 한국식 솔직함과 일본식 편의(결과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해서 거짓말하는 것)의 차이를 경험할 기회가 왔다.
하와이대에서 1975년 여름에는 일본 후류(風流) 연구여행을, 1976년에는 한국의 풍류 연구여행을 지원한 것이다. ‘후류’와 ‘풍류’ 모두 한자로 ‘風流’라고 쓴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풍류’라는 말을 격하시켰지만 한국과 일본에서는 그 의미가 약간 다르긴 해도 지식인층에서 맥이 이어졌다.

미학적이며 심리적인 이 단어의 첫 글자는 ‘바람’이라는 뜻이고, 다음 글자는 ‘흐른다’는 뜻이다.
일본에서 후류를 연구하는 동안 중국 시인 왕웨이(王維), 타오위안밍(陶淵明)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시를 읽었다.
그 시들은 세속의 부귀영화를 떠나 매화나 달의 아름다움을 찾는 선승의 검박한 생활과 잘 어울리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속물적인 도락이었다.

또한 후류 연구를 위해 일본에서 가장 섬세하다는 음식점 몇 군데를 소개받았다.
모두 후류의 자부심을 뽐내는 곳이었는데, 아름다운 솔밭 사이로 졸졸 흐르는 물가에 앉아 조그만 히바치(화로) 위에 끓여낸, 한입거리도 안 되게 적은 세 숟갈의 생선요리를 먹었다.
그것은 매우 아름답고 눈으로 즐기기 딱 좋았지만 허기를 달래기엔 너무도 적은 양이었다.
그들은 그것은 ‘대단한 후류’라고 설명했다.

다음해인 1976년 여름에 접한 한국의 풍류는 보다 명확해 보였다.

풍류는 엘리트를 위한 절묘한 음식맛이 아니라 시인 김삿갓이나 기생 황진이가 그런 것처럼 솔직하고 매인 데 없이 사물을 즐기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풍류에는 ‘인생은 흘러가는 것, 머잖아 죽음이 올 테니 우리는 살아가야지’ 하는 실존적 느낌의 움직임이 가득했다.

서예에서도 한국적 무심함과 일본적 작의성은 차이가 난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유명한 선승들의 붓글씨 어느 것이나 그러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한국의 서예는 글씨가 자연스럽게 흐르고 무심한 경지를 보인다.
일본 서예에서는 작의성이 엿보인다.


이러한 작의성(Contrivance) 또는 호벤, 솔직함이 없고 자연스러움도 없는 이 기질은 일본인의 성격에 배어난다.
그러니 일본 교육부가 나서서 (교과서 왜곡을 두고) 사죄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어떻게 해야 일본인들이 솔직해질까.

1300여 년에 이르는 한일관계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일본.
어떻게 해야 그들이 역사왜곡을 바로잡고 솔직해질 것인가.


교과서 왜곡과 전쟁 징후

나는 일본이 절대 그럴 리 없다 확신한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사이러스 피크 교수는 원자폭탄의 끔찍한 경험이 겨우 일본헌법의 전쟁금지 조항을 이끌어냈을 뿐이라고 썼다.
이후 신세대가 성장했고 국방비를 지출하지 않는 데 힘입어 일본의 1인당 소득수준은 엄청난 것이 되었다.
이제(1982년 현재) 세계인은 일본에서 군국주의 파워가 서서히 고개 드는 것을 실감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이것이 일반 일본인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들 또한 일생을 이중적 얼굴로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면, 한국인만큼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기뻐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사회규범은 엄격하기 짝이 없고 거기서 헤어나올 방법이 없다.
자민당이 계속 집권한다면 신군국주의를 지속적으로 강화할 것이 뻔하다.
그것도 점점 더 대담하게 말이다.

아무도 고등학교 교과서 쓰인 몇 줄 글을 두고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는 징후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배우는 청소년들은 곧 군인 적령기가 된다.

노골적으로 군을 미화하는 정책이 지속된다면 일본 당국은 자기들이 저지른 침략과 전쟁의 흔적을 제거하는 데 나설 것이다.
시간이 흘러 진상을 아는 사람들이 모두 사망하고 나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될 것인가.



[#3] 조지 샘슨에게 배운 일본사




영국 사학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영국에서 일본사의 권위자로 알려진 조지 샘슨 경은 컬럼비아대학 재학시절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내 박사학위 논문을 심사한 9명의 위원 중 한 사람이고, 일본 정부가 주는 훈장을 받았다.
오랜 기간 일본에서 살아온 조지 샘슨은 저서 ‘1334년까지의 일본사’에 ‘이즈모 후도키(出雲 風土記)에 전해지는 일본 고대사의 흥미로운 전설’에 대해 썼다.

‘이즈모 후도키’는 713년에 나온 책이다.
당시 겐메이(元明) 여왕은 각 현에 그 지방의 역사와 지리, 희귀한 일 등을 기록해놓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3군데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하는데, 그중 하나가 신라에서 온 한국인들이 정착해 살던 이즈모(出雲)에 관한 것이다.
이즈모는 적어도 2~4세기 당시에는 일본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샘슨이 후도키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신이 어느 날 살펴보니 한반도 남부에 땅이 아주 넓었다. 그래서 신라 땅을 조금 떼어내 바다 건너로 끌어다가 이즈모 자리에 붙였다.’

‘땅 끌어가기’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빙하시대의 지표이동은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샘슨 경은 “이것은 남아돈 땅이 이동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주한 것을 민간 설화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는 침입한 것이 아니라 이주해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신라 사람들이 대규모 이즈모로 이주해 갔음을 뜻하는 것이다.

석기시대 일본에는 인구가 아주 적었으므로, 많은 한국인이 오늘날 미국 이민을 떠나듯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당시 일본으로 가 정착한 것은 아주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천조대신 아마데라스의 오빠이며 일본의 역사서에 ‘맹렬한 남성’으로 기록된 스사노오노는 일본으로 이주한 한국인 가운데서도 아주 정력적인 남자였던 듯하다.

‘그는 김해에서 바다 건너로 금과 은을 보냈다’고 한다. 또 신라지역인들의 무속적 지도자로 흰말을 탔다고 전해진다.

히로히토 천황도 1930년대 거동할 때 흰말을 탔다.
1973∼74년 천마총 고분에서 자작나무 말다래에 무속적 통치자의 흰말을 그린 5세기경 신라의 천마도가 발굴됐다.

영리한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들어온 무속사상에 흰말, 곡옥, 왕관과 기타 등을 연계시켰다. 1920~30년 군국세력이 팽창할 때 통치자 숭배사상이 되살아났다.

내가 샘슨 경에게서 배운 일본사에는 ‘일본의 성스러운 통치자’로 불리던 일왕 중에도 15세기에는 너무 가난해서 그저 글씨를 써서 팔아 연명하던 사람도 있다.

어떤 왕은 장례 치를 돈이 없어 몇 달 동안이나 매장되지 못했다.
군권을 장악한 권력자나 장군들이 왕위를 마음대로 세우고 찬탈했다.
14세기에는 차남이 장남계열을 밀어내고 왕권을 차지했다.
적통 장자의 후손은 지금(1982년 현재) 오사카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고, 차남으로 왕좌에 오른 사람의 후손은 지금 도쿄의 왕궁에서 지낸다.


판소리를 말살하려던 이유

그렇다. 내가 컬럼비아대학에서 배운 일본사 중 어떤 부분은 지금 일본 정부의 인가를 받아 출판된 역사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들이다.

샘슨 경이 예술문화사 분야의 스승으로 여기던 사람이 바로 도호쿠(東北)대학의 후쿠이 리키치로(深井陸次郞) 교수다.

후쿠이 교수는 “15세기 아시카가 막부시대의 뛰어난 수묵화가 대부분이 한국인이다. 그들은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으로 절이 핍박받자 더 이상 절에 의탁할 수 없게 된 나머지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의 불교미술가들”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편 학자다.

나는 이 영국인 일본사학자로부터 일본 역사의 매우 민감한 부분인 초기 고대사와 1910년 이후 전쟁을 포함한 현대사 과정을 배웠다.
현대사 부분은 아직도 그때를 증언할 사람들이 살아 있다.
그런데 초기 고대사는 1930년대 일본이 세계의 정복자를 꿈꾸며 군국주의를 팽창시킨 기저로 활용된 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2차 세계대전사를 다시 쓰는 순간에도 자국의 건국 기초가 된 고대사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이다.

712년에 씌어진 ‘고사기’는 과거 문자기록이 불가능하던 때 역사 속 왕의 치적과 영웅담을 자자손손 내려가며 노래처럼 외워 부르던 내용을 편집한 것이다.
한국의 판소리와 같은 유형이다.
일본이 과거 왜 한국의 판소리를 말살하려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역사는 620년 성덕태자와 그의 삼촌이자 권력가인 소가 우마코(蘇我馬子)의 합작으로 편찬됐다.

소가 우마코는 한국인 후손으로 일본 내 최고 군사권력자가 된 사람이다.
그러나 645년 소가 가문이 권력을 잃게 되자 그가 쓴 역사서들도 불길 속에 던져졌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그 책의 일부가 불길 속에서 건져졌다고 한다.

두 번째 역사 편찬은 덴무(天武) 일왕 때 시도됐다.
당시 오랜 역사를 모두 기억하는 신하가 한 사람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옛이야기를 모두 글자로 기록하라는 임무가 학자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천황이 바로 죽고 다음 대에 넘어가도록 아무 진척이 없었다.

결국 712년에 와서야 구전 역사를 고사기로 편찬했고 이것이 실존하는 최고(最古)의 일본 역사서가 됐다.

이 책은 한눈에도 엉성해 보인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한국인들의 놀라운 위력을 입증하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국이 일본에 끼친 영향은 너무나도 압도적인 것이기에 이를 완전히 감춰버리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신하 한 사람이 기억해서 풀어놓은 옛이야기는 아마 순수 일본어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29년의 작업 결과 나온 고사기는 순수 한문으로 씌어진 것이었다.
그 작업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능히 짐작이 간다. 또 얼마나 부정확한 것인지도 짐작할 수 있다.

[#4] “일본을 좋아하나 신뢰하진 않는다”




“매켄지. 그도 한때는 일본에 우호적이었다. 그가 쓴 장문의 글이 도쿄의 신문에 보도되고 그의 뛰어난 능력에 감사하는 사설이 실린 바 있다. 그런데 그가 조선이 처한 암담한 현실을 깨닫게 된 이후 일본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하루아침에 ‘황색 저널리스트’라는 경멸적인 것으로 바뀌었다.”(랜슬럿 로슨의 ‘극동의 제국들’ 중에서)

“매켄지는 선교사가 아닌 외국인 중 유일하게 일본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서울에서 시골로 숨어들었는데, 그곳에서 일본인들이 저지르는 짓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됐다.” (E. J 해리슨)

매켄지가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은 무엇이며 무엇이라고 글을 남겼던가.

그야말로 일본이 새로 내놓은 역사책이 거짓투성이임을 확신케 해주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을 도우려고’ 저지른 한일강제합방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일본 교과서 논쟁이 한참인 오늘날(1982년) 흥미로운 읽을거리다.

여기 인용해 본다.


“일본은 한국인을 억누르고 업신여기는 것으로 식민정치를 시작했다. 민(民)과 융합하지 않고는 훌륭한 행정을 도모할 수 없다. 막무가내로 통치하고 모욕을 주는데 융화는 불가능하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의 국가적 이상을 파괴하고, 오래 전부터 내려온 관습과 양식을 뿌리뽑으며, 얼마든지 거저 부려먹을 수 있는 열등한 존재로 만드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런데 일본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한국인을 과소평가했다. 외교와 사회분야에서 일본은 전세계를 마치 어린애인 양 취급했다.

일본인은 한껏 미화하고 한국인은 무능력한 인종으로 여기도록 세뇌했다. 궁극적으로 일본 정부의 교육을 받은 이들은 일본 문명이 세계 제일이라고 믿게 됐다.
한국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그저 노동력 착취 대상인 열등인간으로 대했다.

그러다 일본은 조선을 전시장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건축물을 공들여 세우고 철도를 부설해 국가 경제력은 무시한 채 시설을 지탱해 나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용할 수 없는 것들로, 오직 일본인만이 접근 가능하거나 외국인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한국인이 생각을 하고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도 잊었다.
미성년자들은 때리고, 성인들은 감옥에 보내고 엄벌을 내려 몰아세움으로써 황국신민이 되라고 충성을 강요했다.

1919년 3·1운동은 일본이 반역자들을 키워왔음을 자각하게 된 계기였다. 이에 한국문화를 깡그리 섬멸하고 일본어를 선뜻 배우려들지 않는 한국인들을 족쳤다.”



매켄지는 일본 순사가 어떤 집이든 멋대로 수색하고 누구든 재판 없이도 벌주는 데 대해 썼다.

그들은 사람의 몸이 견뎌낼 수 있는 물리적 고통의 한계가 ‘하루에 태형 30대(대나무 두 개를 묶어서)씩 사흘 연속 90대’이고 그 이상은 고통이 극에 달해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계산을 해냈다.

1916년의 공식 보고서에는 8만2121명이 그런 체형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는데 그후에는 이런 보고서가 출판되지 않았다. 같은 해에 3만2830명이 감옥에 갇혔다.


불온사상, 코끼리 이야기

일본이 이른바 ‘불온사상’이라고 간주한 사례 중에는 영국 선교사 게일이 한글로 번역한 키플링의 유명한 코끼리 이야기도 있었다.
‘코끼리는 두 번째 주인을 따르지 않았다’는 구절이 있는데 일본 당국은 이것을 한국의 아이들에게 두 번째 주인인 천황을 받들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으로 여겼다.

은행은 한국인의 토지를 강탈하는 도구였다.

조선은행은 모든 종류의 통화를 관장하면서 한국인의 토지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다.
세금을 내려면 현금을 마련해야 하니 할 수 없이 땅을 파는 조선인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은 자들에게 이전 가격의 20%밖에 안 되는 헐값에 땅을 넘겼다.

이렇게 땅의 원 경작자들을 축출하는 것으로 일본은 ‘농업을 개량’했다.

난징 대학살도 일본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모양이다.

아마도 일본은 후손에게 일본인들이 갸륵한 이타심을 발휘해 황인종의 문제를 해결하고 한국사회 저변을 발전시킬 소명을 떠안았던 것이라고 가르치려나 보다.

몇 년 동안 나는 칼럼을 통해 일본의 미술사가들이 이미 극동의 예술사를 자기네 뜻대로 다시 썼으며, 그에 따라 한국인이 만든 예술품 다수가 일본 예술의 범주에 편입돼버렸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해 저지른 잘못 중에서도 최악의 것은 한국문화를 말살해서 한국인이 과거에 대한 자부심을 잃고 자신을 비하하게 만든 점이다.

나는 1930년부터 일본어와 그 문화, 역사를 연구해왔기에 일본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안다.

나는 1930년 이래 일본예술사를 진작시킨 공로로 히로히토 천황의 동생 다카마쓰공이 주는 메달과 명예를 받았다.
그러나 시코쿠섬이 해군기지인 것을 모르고 카메라를 갖고 그곳에 갔다가 가택연금되면서 동전의 다른 면도 잘 알게 됐다.

나는 시코쿠섬을 멀리 떨어진 연인들의 소풍지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백인 여성으로는 두 번째로 그 섬에 발 디딘 나를 그들이 매우 수상쩍어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일본 헌병은 내가 밥 먹을 때도 옆자리에 앉아 감시하고 심지어는 화장실 갈 때도 따라왔다(프라이버시는 안중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일본인을 아주 고위층부터 하류층까지 다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신뢰하지는 않는다.

역사를 다시 쓴 일본은 그들의 본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다.




[#5] 1930년대 군국주의로 되돌아가는가





1930년대에 나는 일본에 살면서 과거 컬럼비아대학에서 배운 일본어와 일본 예술, 문화를 더 공부했다.
일본사회에 나 자신을 투영해 일본을 더 깊이 이해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 일본학의 대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느라 기모노를 입고 다비와 조리를 신었다.
서양식으로 발달한 내 신체에 이런 차림으로 도쿄 요코하마간 급행열차를 타려고 옷자락을 휘날리며 뛰던 시절은 악몽 같다.

일본에 있는 동안 두 분의 스승을 알게 됐다.

나보다 갑절로 연세가 많은 분들이지만 모두 영어가 유창하고 열린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한 사람은 신문기자였는데 천조대신 신사에서 모자를 벗지 않았다 해서 불경죄로 심한 처벌을 받고는 기자직을 버리고 ‘안전한 직업’인 사업가가 됐다.
그는 지금 다이마루백화점의 사장이 되어 이를 서구화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 다른 스승 후쿠이 리키시로 교수는 1920년대에 ‘15세기 일본의 유명한 수묵화가 중 몇 사람은 사실 한국인이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했다가 지방으로 쫓겨나 고통받고 있었다.

일본예술사에 박학한 그는 도쿄대학의 최고 교수직을 맡고 있었지만 그 발표 이후 이단으로 몰려 북동부 센다이의 도호쿠대학으로 내려가 있었다.

그의 연구발표는 일본학계에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때 그의 문하생 중 보수파 한 사람은 도쿄박물관장이 됐고, 서양인 문하생인 나는 그의 진보적 가르침을 좇는 미술사가가 되어 지금 서울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일본 내엔 ‘좋은 것은 무조건 일본 것’이라는 사고가 아직(1982년)도 팽배해 있다.

일례로 그들은 진위 여부는 가리지 않고, 7세기 아스카 불교 미술품들도 단지 일본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 것이 아닌 일본 것이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나는 법륭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 아스카시대 불교예술품이 한국에서 비롯된 것임을 역설하고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왔다.

그러자 일본 태생의 한국인 학생 하나는 내 강의를 ‘아집’으로 간주했다.

예술사가인 나는 거만한 일본 미술사가들이 7세기 일본의 중요한 국보급 미술품들이 한국적 진수가 담긴, 한국인 손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잘 안다.

문제는 그보다 더 심각하다.

나는 1930년대 일본에서 살았고 당시의 지배적 정신이 어떠한 것인지를 안다.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그때와 똑같은 정신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친군국주의, 또는 네오 군국주의라고 불러도 좋다. 본질은 같은 것이니까. 선량한 일본사람들은 1930년대의 그러한 군국주의에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다.

1941년 12월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던 날 밤, 나는 일본공보관에서 다몬 마에다 관장과 얘기를 나눴다.
미국 FBI 관계자가 1시간 전쯤 그곳에 와 있다가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관장은 책상 유리판 위에서 무슨 서류를 태우고 있었다.
관장은 한마디로 충성스런 일본인이었다.
그는 사상이 자유로운 사람이어서 맥아더 장군은 일본 패전 후 유일하게 그가 도쿄시장으로 나서는 것을 막지 않았다.

관장과 나 두 사람 모두 일본이 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서로 껴안았다.

“이건 무서운 실수요.”

그는 계속 그렇게 말했다.

“군부가 저 잘났다고 그러는 거요. 시민은 그 사람들을 말릴 수가 없어요.”

일본은 군국주의가 지배하던 1920~40년대의 정신을 되풀이하려는가.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들은 과연 군부의 도전적인 움직임을 막을 수 없는 것인가.

극동문제의 중심축은 한국

처음에 나는 이번(1982년) 교과서 왜곡파동이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리라고 봤지만, 자세히 검토하면서 의문이 나기 시작했다.

일본은 자국 헌법에서 전쟁금지조항을 없애기 위해 홍보해왔다.
현행 일본헌법은 그 골자를 사이러스 피크 교수가 작성한 것으로 서구적 이념의 소산이다.
피크 교수는 자신이 전쟁금지 조항을 삽입하도록 했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시 레이건은 할리우드 배우였을 뿐 아시아 문제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다.
오늘날 레이건은 막강한 세계적 파워를 지닌 대통령으로, 아시아가 얼마나 복잡한 곳인지 알기 시작한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중동이 세계문제의 중심이라고 보지 않는다.
석유는 중요한 것이지만 세계는 지난 수천년간 석유 없이도 지내왔고 앞으로 대체연료를 찾아낼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극동문제야말로 중요한 것이며 한국은 거기서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군국주의가 부활하냐 마냐의 문제는 나이든 한국인들이 걱정하는 감정적 차원을 넘어선 세계적 문제거리다.

정직이 통하지 않고 계속 핍박당한다면 어떻게 평화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단순히 교과서 왜곡이나 전쟁금지조항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패전 이후 집권한 일본 자민당은 개헌위원회를 만들어 일본 천황이 상징적 존재가 아닌 국가기관이 될 것을 제의해놓은 상태다.

이는 바로 과거의 전쟁 주동자들이 했던 짓이다.
그들은 천황을 국가기관으로 이용하고 천황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실제로 천황이 국가문제에 직접적인 권한을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야심만만한 군부 인물들 손에 놀아난 꼭두각시였을 뿐이다.

역사상 일본 천황 혈통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일본 역사교과서에 써놓은 것처럼 일본왕통이 서기전 660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4세기 들어 처음 생겨난 일본왕가는 바로 우수한 무기와 기마병을 이끌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한국 부여족이다.

505년에 일시적으로 교체됐으나 부여족은 계속 중요한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다가 6세기 후반에 가서는 통치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사실이 일본 교과서에 실려 있는가.
아니다. 절대 그렇게 기술하지 않고 있다.

이제 와서 일왕이 권력주체로 나온다면 일본에 1930년대의 군국주의가 부활하지 못할 것도 없다. 내겐 ‘천황폐하’가 교토시내를 지나간다는 이유로 방문과 대문을 모두 걸어 잠가야 했던 기억이 있다. 1971년 자유시대에는 도쿄역 호텔에서 천황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것도 기억한다.


일본은 어째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가. 일본은 군사비를 지출하지 않는 덕분에 이제 1인당 국민소득 대비 세계 제2의 부국이 되었다.

그런데 왜 일본은 한국과 중국, 동남아시아인들이 아직도 잊지 못하는 고통을 들쑤시는가. 일본은 또다시 ‘대동아공영권’을 꿈꾸고 있는가.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면 안 된다.
전쟁을 금지한 일본헌법의 평화조항은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 군부를 그 옛날처럼 파괴적으로 강력하게 만드는 법안에 서명하는 것 같은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일본은 자신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세력이 있어야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


[#6] 14세기 일본 大화가 80%는 한국인




역사왜곡이 문제다.
왜 모든 사람이 일본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데 대해 그처럼 치를 떠는가.

일본은 과거 500년이 넘게 역사를 왜곡해왔고, 대부분의 사람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내가 공부한 한국의 고대사와 고고학에 따르면 바로 한국인들이 고대의 지도자들이었으며 당시 중국인에게 난쟁이들, 혹은 왜구로 알려진 지금의 일본인 이야말로 선진문명을 감지덕지 받아들인 수혜자임을 확신케 하는 것이다.

일본은 ‘난쟁이’ ‘왜구’ 같은 단어를 아주 싫어해 7세기부터 이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왜인들은 오직 백제사신들을 통해서만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이를 증명하는 좋은 자료가 전 주일 미국대사 에드윈 라이샤워가 번역한 ‘옌닌(圓仁)의 일기-입당구법(入唐求法) 순례행기’다.

승려 옌닌은 “한국인 해상왕 장보고의 통치 아래 있던 중국 내 한국 식민지 신라방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배려가 아니었다면 중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썼다.

불교도인 옌닌 일행이 방문한 840년경 중국은 불교를 탄압하고 있었다.
옌닌 일행은 중국인에게 뇌물을 주고 한국인에게도 선물을 주어 중국으로부터 벗어나 금강경을 일본에 가지고 들어왔다. 모든 배편은 한국을 경유했으며 배도 모두 한국 배였다.

오늘날 일본이 저지르는 역사왜곡의 맥락에서라면 머잖아 히데요시의 군사들이 한국인 도공을 ‘초청’해다가 ‘일본에 파견근무’케 하고 이들에게 ‘무료 교통편과 숙식을 제공’하여 ‘그들이 기술을 이곳에 전파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당시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5~6세기에 한국인들이 일본에 전한 스에키 토기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 사이 1000여 년 동안 일본 도공들은 한반도에서 온 도자기 기본을 따라 도자기를 만들어왔는데 16세기에 들어 그들은 조선 도자기산업의 새 피를 수혈할 필요성을 느꼈다.

새 피의 수혈은 뛰어난 기술혁신을 가져다 준 것이기에 이후 일본의 도자기는 한국적 착상에 힘입어 발전을 이룩했다.

한국 점령이 자랑거리?

1923년 도쿄와 요코하마를 덮친 관동대지진 때 한국인은 인명과 재산피해로 광포해진 일본인들의 희생양이 되어 타격을 받았다.

교과서가 씌어진 1930년대에는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빈곤지역을 ‘마늘 먹는 조선인’들이 사는 곳이라 부르며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지역으로 몰아갔다.

미국 정부는 2차대전 당시 광분한 미국인으로부터 재미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일정 지역에 피난시킨 루즈벨트 대통령의 조치를 교과서에 수록하도록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오늘(1982년)에 와서 일본 자본가들은 그때 잃은 땅과 사업을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배상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일본은 이 같은 조치를 한국인들에게 취했는가.

아니다.

일본인들은 과거 한국에 해악을 끼친 사실에 대해 치욕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시건방진 자랑거리로 여기며 수십년 전과 달라진 바 없는 차별과 왜곡을 일삼고 있다.
일본 군부는 2차대전에서 아무 교훈도 못 얻었단 말인가.
겉보기에 그들은 분명히 반성의 기색이 없다.

그런데 일본문화사에서 한국의 영향을 모두 제거한다면 남아나는 것이 거의 없다.
적어도 서기전 3세기부터 8세기까지는 그러하다.

순수한 일본 고유 문화가 이룩됐다고 하는 10세기에 와서도 일본 대궐에서 벌어지는 가장 신나는 일 중의 하나는 대궐 사람들 중 누가 제일 한국춤을 잘 추는지 가려 뽑는 행사였다.

일본이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14세기 새로운 수묵화의 기법은 사실 조선에서 먼저 생겨난 것이다.
일본의 수묵화를 그린 화가들 중에 조선 출신의 수묵화가이던 선승(禪僧)들을 다 추려낸다면 일본이 뽐낼 만한 부분은 거의 없다.
적어도 일본이 내세우는 14세기 수묵화 대가의 80%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다.

16세기에 들어와서도 조선에서 유입된 사상과 노동력이 일본의 예술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일본은 한국을 강제합방해 한국인을 노예로 부려먹었다.

또 있다. 정확히 언제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왜구의 노략질이 고려시대에는 특히 심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역사왜곡까지 새롭게 시도해서 한국을 뒤흔들고 있다.

한국인들이 일본의 이런 압력에 굴복하거나 모욕을 한 귀로 흘려넘기는 한, 일본은 소리 없이 등뒤로 다가와 한국을 밟고 설 것이다.


[#7] 나카소네 총리는 한국계?




1983년 2월 신문은 전두환 대통령과 나란히, 한국을 방문한 나카소네 일본 총리의 사진을 실어 보여주기 바빴다.
나는 수년간 한일 양국에서 생활하며 전형적인 한국인과 전형적인 일본인의 얼굴을 구별해 알아볼 수 있게 됐다.

1983년 2월 한국을 찾은 나카소네 총리(왼쪽)가 전두환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런데 전 대통령과 나카소네 총리의 사진을 살펴보니, 놀랍게도 나카소네 총리의 얼굴이 내가 생각하는 한국인의 얼굴이었다.

다케오 후쿠다 전 일본총리는 대중 앞에서 그의 조상이 1500여 년 전 한반도에서 규슈로 이주해온 도래인(渡來人) 혈통임을 공표했다고 들었다.
나는 나카소네 총리의 가계 또한 후쿠다 전 총리처럼 먼 조상이 한반도에서 이민 온 집안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문화사를 공부하는 내가 들은 나카소네의 만찬 연설 중 핵심은 “6, 7세기 일본의 역사는 한국인들이 일본에 전해준 기술과 문화가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한 부분이다.

이제 일본의 지도자들이 그들이 진 빚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할 때다.
나카소네 총리는 그들이(한국에) 진 문화적·기술적 빚이 6, 7세기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그 이전인 5세기 전체, 부여족의 혈통으로 일본 천황자리가 채워졌던 시대까지 걸쳐 있다고 언급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나는 나카소네 총리의 우호적인 말들이 새로 씌어질 일본 교과서에 반영됐으면 한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나카소네 총리의 조상이 어디서 온 사람인지 궁금하다.   (끝)

<내용출처:연예인?! 이제 그들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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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사관'에 놀아난 한국역사

[데일리안 2005-03-15 10:02]



이병도의 말년 ⓒ 박선협
지금 새삼 '한국사대관(韓國史大觀)'이 생각나는 이유

[데일리안 박선협]이승만 정권에 빌붙어서 전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교육부 장관과 한림원 원장을 맡았던 이병도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그들은 그 이병도를 지금 친일사관의 거두쯤으로 치부한지 오래라.

그는 지금의 강단사학계가 100%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일조한 장본인이다

민족사관을 중심으로한 신진사류들에 의해 그의 일제치하 친일행각은 여지없이 파헤쳐졌다. 그가 끼친 천인공노할 역사왜곡에 찌든 한국민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만, 우리는 다만 그것을 용서하고 기억하는데 그칠 수밖에 없다.

무슨 하해같은 도량이 있어서가 아니라 결코 과거를 먹고 살 수는 없다는 철리에 따르고 싶은 민초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수제자를 자처하며 당대의 실세실력가로 군림하는 이른바 대가군(大家群)의 선두주자 S씨에 이르면 생각이 많이 달라진다.

너무나 유명한데다 특유의 카리스마를 휘두르는 그는 그야말로 당대의 실세중에서도 휘영청 뜬별이다. 걸핏하면, 독도의 수호신으로, 독립협회의 변호인으로, 일제의 만행을 갈파하는데 선봉장임을 자랑하는 인물이라 함부로 다루기가 버거운 존재다.

S씨 그는, 필립제이슨 재필이가 김옥균이 샹하이에서 홍종우(洪鍾宇)지사에 의해 총맞아 쓰러진 것에 겁이나 걸음아 나 살려라고 도망친 그 일제 그늘에서 자라고 일제의 반간계에 놀아나 이역만리에서 사라진 재필이 만든 독립협회를 민족의 태양쯤으로 자랑의 틀을 씌운 그는 역사와는 상관이 없는 사회학도에 다름아니다.

어쩌다 "독립협회연구"로 일약 스타가 되어 유명세를 거머쥔 뒤 동분서주 이르는 곳마다 환호의 물결을 즐기는 명사대열의 선두주자가 된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결코 그런 그의 출세가도에 찬물을 끼얹거나 괜스레 심사가 뒤틀거린다 해서도 아니다.

오늘날 "독립협회"나 "독립신문" 독립문" 등이 친일역사의 상징으로 재조명되면서 그의 행보에 눈이 쏠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아니치 못하면서 대세가 점진적으로 일제만행 규탄에로 에스칼레이트 하고 있는 사실과 더불어 그의 행적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생각해 보잔 뜻이 있어서다.

그 독립협회의 대변지 독립신문의 날 4월7일을 "한국신문의 날" 로 정한 한국의 언론계가 입장정리를 위해 코페르니크스적 발상의 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르는 판국에 당도한 즈음, 그가 심혈을 기울인 독립협회옹호론이 흔들거릴 가능성에 대한 그의 심중이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을 따름이다.

잠시 각설하자. 지금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발효됨에 따라 도대체 일제가 침탈한 적나라한 현장이 어떠했던가를 냉철히 뒤돌아 짚어보고 돌아보자.

그리하여 그동안 미처 정리하지 못한.해방60년사의 새 역사에서 "병도의 사관에 놀아나 호박씨를 깐 인물들을 찾아내어 옥석을 구분 하는데 의미를 두고자 한다.

일제는 조선을 총칼로 침탈하고서 다시 영원히 조선을 탈취하기 위하여 광분했다. 조선의 민족혼 자체를 말살시켜 일본인에 동화될 수 있도록 그들의 역사보다 수천 년이 앞선 조선역사의 왜곡과 조작을 조선 총독부에 의하여 노골적이고 조직적인 차원으로 추진했다.

일본은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이후 민족의 근간을 바꾸기 위하여 민족의 서적을 약탈했다. 1910년 11월부터 조선총독부 산하의 ‘취조국’으로 하여금 1911년 12월까지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를 근거로 하여 ‘51종 약 20만권"정도를 약탈했다. 물론 역사서 또한 포함되었다.

서울에서는 종로 일대의 서점을, 지방에서는 서점, 향교, 서원, 구가(舊家), 양반가, 세도가 등을 샅샅이 수색했다. 다음해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 1차 서적 색출에서 얼마나 압수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판매금지한 서적과 수거된 서적은 총 51종 20여만 권이라고, 광복 후 제헌국회사와 <문정창(文定昌) 저>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가관인 것은 자신들이 1922년 12월에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서 조선사(朝鮮史)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편찬한다. 즉 1938년까지 엄청난 돈을 일본이 부담하여 식민사관에 입각한 자기만의 역사서를 편찬한다.

광개토대왕비문 변조 일본 참모부가 밀파한 군사 스파이 사꼬오 가케노부 중위에 의해 광개토대왕비의 주요 글자가 변조되고 지워지게 됐다.

일제가 역사왜곡에 혈안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 고대 일본의 역사가 동방 한민족 역사의 부속사라는 숙명적인 약점
- 역사적 열등감과 이에 수반되는 침략 명분의 부재
- 열등감을 숨기기 위한 계획적인 역사날조에 있었다.

대륙개척사를 반도수난사로 둔갑시키고 정신적으로 고유의 주체사상을 말살하여, 당쟁만 일삼는 식민지 백성이라는 패배주의를 심어놓는가 하면,

단군을 하나의 신화로 돌리고, 고조선 실사(實史)를 은폐하여 고대사를 압축하고 만주하북성에서 찬란했던 조선족의 역사를 완전히 말살시키는데 혈안이 됐다.

조선은 자고(自古)로 북은 한(漢)의 식민지, 남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억설을 주장하여 조선강점을 논리적으로 합리화시키려는 기도를 일삼았다.

고고학계의 구석기 유물 조작 폭로라는 지다던 소가 웃을 일을 공공연히 자행하다 들통이 나기도 했다. 즉 일본 고고학계는 지난 92년 70만년 전의 구석기 유물이 발되었다고 했다가 2000년 11월 일본 언론에 의해 이것이 한 일본 역사연구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조선 총독부 3~5대 총독 시달 교육시책이 있다.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서,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방조했다.

이로서 한국민은 반드시 실망과 허무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들고자 시도한 요결인 것이다.

『삼국유사』「정덕본」과 「동경제대 영인본」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고치고 동경제대 영인본으로 출판 조선 총독부에서 집필한 『조선사의 길잡이』라는 책은 해방 뒤 유네스코에서 한국사를 소개하는 지표로서 번역되어졌고 지금도 읽혀지고 있는 책이다.

『조선사』35권 (made in Japan)을 만들어 냈다.

치밀한 우리들 한국의 역사 개조작업을 서두른 일본은 드디어 1938년까지 35권의 조선사를 편찬하게 된다. 그곳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참여한 사람이 병도였다. 그는 이마니시 류(今西龍), 즉 이마니시의 수서관보로 들어가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일등 공로자가 됐다.

그것이 맨 앞글에서 밝힌 이승만 정권에 빌붙어서 전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교육부 장관과 한림원 원장을 맡게 되어 지금의 강단사학계가 100%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일조한 병도의 행각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병도는 어떤 인물인가?

일제식민지 시대에 우리나라 역사 왜곡의 주역이었던 병도(1896-1989)는 노론(老論) 유력 가문인 우봉(牛峰) 이씨이다. 열두 살인 1907년에 서울로 올라온 후 일인이 경영하는 불교고등학교를 찾아가 일어(日語)를 배웠다. 나라를 빼앗겨 대한독립을 위하여 수많은 청년 학도들이 목숨을 바쳤으나 병도의 뇌리에는 애초부터 항일 의지 따위는 없었다.

매국노 완용의 후손 병도는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의 장기적 계략에 포섭되어 일본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1919년에 졸업했다.

이때 일인 학자 요시다(吉田東伍)가 이미 한국의 역사를 변조하여 저술한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을 독파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왜곡의 주역 일인 학자 동경제국대학의 이케노우치(池內宏)와 와세다대학의 강사 츠다(津田左右吉)로부터 문헌고증학, 즉 실증사학의 기초를 다지며 한국역사 왜곡에 대한 개인적인 세뇌 지도 교육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귀국한 병도는 이케노우치의 추천을 받아 1925년에 설치된 『조선 반도사』 편수회의 핵심위원으로 들어갔다. 이병도는 촉탁이기 때문에 무보수로 일했다고 변명하면서 이 시절 규장각 도서를 열람할 수 있었던 것이 자신의 학문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합리화하곤 했다.

이 시절 그는 조선사편수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등에 한4군(漢四郡)의 강역을 한반도 내의 존재 설을 강력히 주장하고 고려시대 풍수도참(風水圖讖) 사상, 그리고 조선시대 유학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당연히(?) 일어(日語)로 쓴 것들이었다. 이때 쓴 논문들은 문헌고증학의 관점에서는 꽤 수준이 높은 것이었으나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단제 신채호의 민족주의사학과는 서로 배치되는 논리들이었다.

1920년대 연희전문.보성전문.이화여전 등이 민립대학 건설 운동을 일으키자 일본은 경성제대의 문을 열어 이 운동을 좌절시켰는데, 경성제대는 이런 불순한 목적의 대학답게 식민사학을 맹렬히 전파하여 『조선 반도사』를 합리화 시켰다.

이외에도 호소이(細井肇)를 비롯해 아오야나기(靑柳南冥) 같은 일본 국수주의 국학자들도 조선사편수회와 경성제국대학과 함께 식민사학을 쏟아내어 조선국은 고대로부터 반도국가로서 미개한 민족이라고 역설하고 있었다.

일황의 칙령에 의하여 『조선 반도사』편찬에 착수한 일제는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반도국가로 왜곡시킨 우리역사를 합리화하고 세뇌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어용 학술단체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1922년의 조선사편찬위원회와 1925년의 조선사편수회였다.

『조선 반도사』편찬의 고문에는 일인들과 한국인들이 함께 포함되었는데, 일본측은 경성대 교수인 로이타(黑板勝美).미우라(三浦周行) 같은 학자들인 반면 한국 측은 역사학자가 아니고 친일 정객 완용.영효.윤용, 중현 같은 역적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이 단체의 고문으로 있었다.

당시 초대조선총독은 취조국이 관장하던 업무를 1915년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조선 반도사』"편찬과"를 설치하고 우리민족의 대 역적인 완용과 중현 등 역적들을 고문으로 앉히고 1916년 1월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참의와 부참의 15명에게 『조선 반도사』 편집 업무를 맡기고, 일본 동경제국대학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박사와 일본 경도제국대학 미우라(三浦周行) 교수, 경도제대 이마니시(今西龍) 등 3인에게 지도, 감독을 의뢰하였다.

1922년 12월 일황 훈령(訓令) 제64호를 공포하여 『조선 반도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완용, (권)중현 등 역적들과 일본인 어용학자들이 합작하여 한국인 학자들의 외면으로 『조선 반도사』 편찬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는 "『조선 반도사』편찬위원회"를 “ 조선사편수회 ”로 명칭을 바꾸고, 일황(日皇)의 칙령으로 설치근거의 격을 높이고 확대 개편하였다. 1925년 6월에는 "일황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 관제를 제정 공포하고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접 관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켰다.

독립관청으로 승격된 총독부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는 『조선 반도사』편수회는 막대한 인적.물적 역량을 동원해 삼한과 삼국은 고대부터 한반도 중부이남 지역에 위치한 부족국가로서 중국에서 설치한 한사군(漢四郡 : 낙랑군(樂浪郡).임둔군(臨屯郡). 현도군(玄菟郡).진번군(眞番郡)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고대부터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이론을 수없이 쏟아내 조선의 식민지화를 정당화시켰다.

1926년 문을 연 경성제국대학도 식민사학을 전파한 또 다른 기관을 만들었다. 1930년 5월 경성제대 교수와 조선사편수회원, 그리고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총동원되어 청구학회(靑丘學會)라는 어용 학술단체를 조직하는데 이들 역시 조선총독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일제의 한반도 및 대륙침략 의도에 발맞춰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한 극동문화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어용 단체는 저술 출판.강연 등의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 단체의 회무감독은 경성제대 교수인 일인 쇼우다(小田省吾)였고, 서기는 조선사편수회 서기인 마에다(前田耕造)였는데, 병도는 신석호와 함께 이 단체의 핵심위원이었다.

또한 병도는 이나바(稻葉岩吉)쇼우다 등의 일본인 및 손진태. 홍 희.유홍렬 등 한국인들과 함께 이 어용 학술단체의 기관지인 청구학총(靑丘學叢)의 주요 필자이며 또 다른 식민사학의 학술지인 조선사학의 주요필자 였다.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33년 불교전문학교 강사 시절이었다.

일본인 학자들과 함께한 청구학총이 어용단체로 밝혀지자 이를 두려워한 일제와 병도는 일인을 배제하고 순수 민간 학술단체로 위장하여 1934년 5월에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설립하였다.

즉 일인을 배제하고 순수 민간 학술단체로 위장하여 국내 및 주변 지역에 대한 역사.언어.문학 등 인문학에 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한국 학자의 힘으로 연구하고, 그 결과를 국어로 발표하려는 의도 하에 창립되었다.

초대 편집 겸 발행인 병도(丙燾)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출강하면서 기관지인 진단학보(震檀學報)를 발행하고 일제강점기 1941년 6월 제14호로 종간하고 해산됐다. 그 후 1945년 8.15광복 후 다시 진단학회가 발족된다.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유포시킨 식민사학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 인데, 그 하나는 사대성이론이며 다른 하나는 정체성이론이다.

한국 역사는 고대부터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의 역사이자, 고대 이래로 발전하지 못한 정체된 사회라는 것이 두 이론의 논리였다. 따라서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역사의 퇴보가 아니라 진보라는 것이 이들의 식민지 지배논리였다.

『조선 반도사』 편찬 실무자 스에마쓰(末松保和) 등 20여명의 일인 학자들과 한민족의 반역자 이완용의 후손 두계(斗溪) 병도(李丙燾).신석호(申奭鎬).홍희(洪憙) 같은 한인학자들이 참여하여 드디어 24,409쪽에 달하는 반도 조선사 34권이 완간 했던 것이다.

민족반역자 병도는 1922년 12월 일황의 칙령에 따라"조선사편찬위원회" 설치 때부터 1938년 3월까지 만 16년 동안 24,409쪽에 달하는 .반도 조선사. 34권을 완간하였다. 일본의 계략대로 우리 역사를 왜곡한 병도는 일본의 제 1등 공신으로 인정받아 일본천왕으로부터 거액의 포상 금과 금시계를 받았다.

1945년의 8.15 해방을 맞아 진단학회의 자진해산 후에도 조선사편수회에는 꾸준히 나가던 병도는 해방 후 경성대학과 그 뒤를 이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곧이어 서울대학 대학원장에 취임했다.

그때 김상기.이상백.이인영.유홍렬.손진태 등 사학자들과 조윤제.이숭녕 등 국문학자들이 서울대 교수로 취임해 진단학회는 친일 학자들이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나 병도의 해방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해방 다음날 경제사학 계열의 백남운을 중심으로 조선학술원이 결성되고, 같은 날 진단학회도 재건되었으나 진단학회가 곧 “ 친일파 제명운동 ”에 들어간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조윤제가 주도한 이 운동의 제명 범주에 병도가 들어간 사실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병도는 재건된 진단학회를 주도할 수 없었고 송석하와 조윤제가 위원장과 총무를 맡고, 송석하가 사망하자 1948년 8월 이상백이 그 뒤를 이었다.

병도의 일제시대 행보는 떳떳할 수 없는 경력이었다. 그러나 친일파 식민사학자 병도가 남한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1950년 6.25전쟁이었다. 6.25전쟁은 많은 민족주의 인사들이 납북됨으로써 남한 학계를 가짜 실증사학의 병도 독무대로 만들었던 것이다.

남북휴전 다음해인 1954년에 병도가 진단학회의 이사장으로 취임 할 수 있었다. 6.25전쟁을 계기로 병도는 친일파 청산 제 1호에서 벗어나 국사학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해 병도는 식민사학을 유포하던 경성제대의 후신인 서울대학교 대학원장과 학술원 부원장을 맡아 역사학계의 최고 원로로 부상했다.

병도는 1960년 문교부장관에 등용되고 같은 해 학술원 회장에 선임됐다.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65년 동구학원(東丘學園) 이사장, 1966년 성균관대학교 교수 겸 대동문화연구원장에 취임했으며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에 추대됐다.

1976년 동도학원(東都學院) 이사장에 선임됐고 1980년 85세의 고령으로 국정자문위원(國政諮問委員)에 위촉됐다. 그 동안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학술원 공로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5.16민족상 등을 수상했다.

1986년 10월 9일(목)자 조선일보에 단군은 신화가 아니고 우리나라 국조이며 "역대왕조의 단군제사는 일제 때 끊겼다" 라는 제목으로 특별기고 하여 우리나라 고대역사 왜곡의 사실을 발표하고 1989년에 죽었다. 또한 병도의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고려시대 연구》등이 있다./

<내용출처:한류열풍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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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진계 선각자인 백오 이해선(1905-1983)선생 탄신 100년 기념으로 선생이 생전에 촬영한 사진작품 `사라진 풍물' 등을 모은 사진전이 오는 31일부터 충무로의 싸이드림 포토갤러리에서 열린다. 사진은 출품작 중 영친왕. 순종. 고종. 귀비 엄씨, 덕혜옹주(왼쪽부터) 등 조선황실 가족을 찍은 사진


★...한국사진계 선각자인 백오 이해선(1905-1983)선생 탄신 100년 기념으로 선생이 생전에 촬영한 사진작품 `사라진 풍물' 등을 모은 사진전이 오는 31일부터 충무로의 싸이드림 포토갤러리에서 열린다. 사진은 출품작 중 잠사 일을 마친 창덕궁 상궁들 사이로 기모노 복장을 한 일본 여인이 보이는 사진

 

치우.칭기즈칸.인디언도 다 우리동이족이다

이집트 피라미드도 우리가 전해준비법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풀리지 않는 예언 궁을가를 푼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

대한민국은 밝은 미래가 있습니다.



<내용출처:한류열풍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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