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타
감독 제임스 카메론 (2009 / 미국)
출연 샘 워딩튼, 조이 살디나, 시고니 위버, 미셸 로드리게즈
상세보기


-J양: 마치 게임 한편을 보는 거 같았다..
-미리미 : 극장 홈페이지에 달린 어떤 댓글에 신대륙에 영국인들이 원주민 인디언들이 공격하는것이 연상되었다는 글이 떠올랐다..비슷했다..틀린거라면 원주민이 이겼다는거...내용이 단순한게 아쉽기는 해지만..카메라 7대를 비치해서 촬영했다는데..그건 잘모르겠고 산에서 밑으로 보는 장면에서 그 아찔한 느낌이 그대로 느껴졌다.



♡ 제 블로그가 유용하시면 구독해주세요~^^
♠그냥 가시지 마시고 댓글을 써주시면 블로거는 큰힘이 된답니다~~*^^*♠
-아참..문의는 제멜로 문의를 해주세요*^^*(rjlim@hanmail.net)-



2년전에 드라마 부활이 좋아 리뷰북 제작한다고 신청을 했는데...지금은...- -;;...진척상황이 더디어 가는거 같네요..혹시 지원할 수 있으신분들은 도움을 드렸으면 좋겠네요..

부활 갤러리  http://gall.dcinside.com/lifeagain/

http://gall.dcinside.com/lifeagain/74586


♡ 제 블로그가 유용하시면 구독해주세요~^^
♠그냥 가시지 마시고 댓글을 써주시면 블로거는 큰힘이 된답니다~~*^^*♠
-아참..문의는 제멜로 문의를 해주세요*^^*(rjlim@hanmail.net)-


 

 

Daum 아고라

서명진행중 보건복지부에게 바랍니다!
의사.한의사가 물리치료하는것을 반대합니다!

3776분께서 참여해 주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물리치료과 다니고 있는 학생입니다.
우리나라 물리치료사들이 지금 힘든 상황에 처했습니다. 제가 물리치료과 라서 가 아니라 우리국민들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의사 한의사 들이 물리치료의 영역을 또 침범하려고 합니다. 지금도 솔직히 의사 한의사가 물리치료 영역을 3가지를 시행하고는 있습니다 .
그때부터 아예 확실히 제지했어야 하는데 위에 선배님들이 그렇게 하지못한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현재가 중요하니깐요 .
의사와 한의사들이 물리치료를 잘 할수있을까요 과연?
저희 물리치료과 학생들부터 저희는 3년 4년 배웁니다 물리치료에 관련된것만요.
하지만 의사 한의사들. 1년도 안배웁니다 그런 사람들이 과연 물리치료를 하려고 저희 영역을 탐하는 걸까요?
지금 현재 물리치료사 들은 1인당 하루 30명의 환자를 볼수있습니다 . 그렇게 보험을 청구할수 있지요 .
다시 말하자면 한 병원에 하루 환자가 60명입니다 그럼 물리치료사가 두명이 있어야 겠지요? 근데 그걸 의사 한의사들이 한다고 하면. 30명은 자기네 이름으로 보험을 청구하겠다는 겁니다 .
그럼 물리치료사 한명은 일을 그만두게 되는거죠 . 그렇게 되면 한명이서 60명을 보는겁니다 .
여기서 보면 저희 물리치료사들이 자기네 밥그릇 뺏겨서 이러는거 아니냐 .
뭐 이런말씀 하실수도있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작게보면 저희 밥그릇 문제도 있지만.
크게 봐서는 우리나라 국민여러분들이 더 손해 보는것입니다.
병원 가보셨을지 모르겠지만 물리치료실 가보세요 하루 30명인데도 큰병원 사람많은 병원들 보면 대충대충 하기 바쁩니다. 그래도 밀려있는 사람이 더 많구요 .
하루 30명 보기도 바쁜데 60명을 보게되면 뭐 환자들 몸이 어떤지 볼 정신이 있겠습니까?
핫팩 하나 얹어 주고 전기치료 대충 붙혀서 기계 작동만 시켜놓고 그렇게 대충하고 끝내고 그렇게 되는겁니다 .
그럼 어느천년에 환자들은 치료 받겠습니까. 그래서 치료가 되겠어요?
근데 의사들은 자기네 밥그릇 채우려고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하려고 합니다.
이번년 12월부터 이 법이 통과 된다고 합니다 . 그렇게 되버리면. 지금 물리치료과에 다니는 학생은 물론 전국에 있는 물리치료사들이 모두 힘들게 되고
아울러 국민여러분들은 더 허술한 물리치료를 받게 되는것입니다 .
좋은병원 가면 되지않느냐 . 뭐 이런생각하실수도 있겠지만. 좋은병원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 의사 한의사들이 이렇게 무모한짓을 하고 있다는거 모두들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주변 사람들에게도 한번씩 말해주세요
물리치료는 물리치료사들이 전공입니다.
저희가 누구보다 자신있고 저희가 누구보다 잘 압니다.
저희의 밥그릇 때문이 아닌
물리치료의 질을 떨어뜨릴수는 없기에 드리는말입니다.
저희가 지금으로서 할수있는일이 이것밖에 없기때문입니다.
의사 한의사의 물리치료범위 침범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국민여러분들이 이 상황을 알아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청원 원문보기



♡ 제 블로그가 유용하시면 구독해주세요~^^
♠그냥 가시지 마시고 댓글을 써주시면 블로거는 큰힘이 된답니다~~*^^*♠
-아참..문의는 제멜로 문의를 해주세요*^^*(rjlim@hanmail.net)-

[출처: 신명나는 한국사(고준환 著 p.61~69)] 중간에 들어간 이미지는 첨부한 내용입니다.

 

환단고기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사료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대식민사학자들에게 개인 이익이나 떼거리 이익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의 평화세계를 향해 마음을 열어 민족국가역사를 복원할 때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그들의 주장을 유지하려면 다음 23가지 실증사례에 답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는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겠다.(여기서 [! 고구려]의 저자 허성정 씨와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의 저자 구길수 씨의 일부 학설을 받아들여 통합한 것임을 밝혀둔다.)

 

 

첫째환단고기에 단군조선 13세 흘달(屹撻) 단군 50(서기전 1733) 5성취루五星聚婁'라고 하여 5개의 별이 루성 중심으로 모이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했는데, 이것이 천문학자인 서울대 박창범교수와 라대일 박사 등에 의하여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된 것이다.

오행성 결집현상 관련 영상 vod

   

박교수는 환단고기단기고사 등에 기록된 일식 등 천문현상을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했다.

 

환단고기는 고려시대 이암이 썼고, 단기고사는 발해의 대야발이 편찬했으나, 일부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과학적 검증 없이, 삼국사기 전인 것과 후대의 조작 흔적이 있다는 것을 내세워 무조건 위서로 몰고, 외면하여 진지하게 연구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는 이를 딱하게 여기어 두 책에 기록된 5성취루, 일식 등의 현상이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었는지를 천문학적으로 연구, 검증했다.

 

박창범 교수는 특히 두 책에 모두 기록된 5성취루현상에 주목하여 추적 조사한 결과, 실제로 서기전 1734년 7월 13일 일몰 직후 금성, 목성, 토성, 화성 그리고 추가로 초승달까지 일렬지어 하늘에 나타나는 장관이 연출됐음을 확인하였다.

 

박창범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을 우연히 맞출 확률은 0.007%에 불과하며, 책의 조작 여부에 관계없이 역사적인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확인했다.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이것은 우리 민족 문화사 가운데, 상고사를 실증적 규명단계로 진입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단군조선이 민족국가로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창조했음과 더불어 환단고기의 실체를 입증한 것이라 사료된다.

 

 

둘째환단고기 등장 이전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발해 3대 문왕 대흠무의 연호가 환단고기에 대흥大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서기 1949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 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 존호를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歷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 하고 불법의 수호자로 자처한 데서 드러나, 환단고기가 사료로서 가치 있음이 과학적으로 실증되었다.

 정효공주묘 벽화(연변 화룡현 용두산) 3대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묘는 당나라 양식을 다른 것이나 석실 내부의 벽에 백회를 바르고 12명의 인물을 그린 벽화는 고구려의 전통 화법을 이은 것이다.


셋째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중국 중동부 15개 주에 대제(大齊, 평로치청)라는 큰 나라를 세우고, 4 58년간 다스린 기록이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에 처음 나오는데, 이것도 1997년 처음으로 발간된 책 <고구려를 위하여>(김병호, 하서출판), 그리고 KBS 역사스페셜 중국 속에 또 다른 고구려가 있었다, 이정기 왕국(2001.5.16)에서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

 

 

넷째강화도 마니산에 제천단 참성단이 있어 역사적으로 각 왕조마다 해마다 천제를 지내온 바, 그 첫 기록이 환단고기 단군세기 단군왕검 무오 51(BC 2282)에 쌓았다는 것이 나온다. 마니산 참성단은 지금도 의연히 그 자태를 빛내고 있으며, 서울올림픽, 월드컵축구와 전국체전 성화채취의 기본성지가 되고 있다. 강화도에서는 이 밖에도 고조선 유물로 정족산성과 고인돌 127기가 있다.

 

 

다섯째는 단군조선의 실재를 보여 주는 것으로, 평양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에서 단군릉이 1993년 발굴되었다. 여기에서는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북한은 단군릉을 거대하게 개건하여 성역화하였다. 그리고 1926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모금운동을 하여 평양 강동현 단군릉을 보수하고 헤마다 제사를 올린 바도 있다.

 

 

여섯째,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 노온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고구려 불상에는 건흥오년세재병진建興五年歲在丙辰 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때 백제 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임자년인 412년에 사망하게 된다.

즉위년 칭원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삼아 본다. 그러면 장수왕 즉위 5년은 병진년이다. 따라서 병진년 불상 광배병과 <택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 대의 연호라는 새로운 지견을 추가할 수 있게 된다.

 

 

일곱째는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태조太祚,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연개 소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한 어떠한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의 묘지에서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자유로 명기하고 있어서 <태백일사>의 진가가 드러나게 되었다.

 

 

여덟 번째는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현재 태국에 있는 아유타국과 백제 상인이 교역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는 지역적 근접성으로 보아 백제가 현대의 캄보디아인 부남국扶南國과 교역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뒷받침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백제 해외경영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아홉 번째는 실증사학을 내세운 사대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 박사가 과거에는 단군을 신화로 몰다가, 친구인 재야사학자 최태영 박사와 국사 찾기협의회원들(김세환, 박창암 씨 등)의 우정 있는 충고를 받아들여 참회하고, 단군은 실존의 우리 국조이며, 역대왕조가 단군제사를 지내왔으나 일제 때 끊겼고, 삼국사기 이전의 환단고기 등 고기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고 1986년 10월 9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에 쓴 사실이다.

단군조선의 사실과 환단고기를 믿으라고 쓴 것이다.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그들 태두의 말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열 번째는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실증적 입장에서 깊이 연구하여 6하 원칙에 입각하여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위조했는지 명백히 제시해야 하는데, 이를 제시한 사람이 현재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열한 번째는 갑골문의 귀방이다.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도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유물,유적이 발견되었다. BC 1291년 단군조선 제21대 소태단군 재위 때 은나라 왕무정이 귀방을 쳤다는 기록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남아 있는데, 과연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는 은나라의 귀방 정복 사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환단고기는 이토록 확실한 역사적 근거와 고고학적 근거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열두 번째는 비파형동검이다. 단군조선의 비파형동검은 단군조선이 지나와 구별되는 선진 청동문화를 가진 정치세력 집단이었음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적,유물이다. 이 정치집단의 분포도는 환단고기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와 역사적 강역이 너무도 일치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비파형동검의 분포지는 만주, 한반도, 중국대륙의 동편으로 환단고기가 설명하고 있는 역사 강역과 완전히 일치하며 그 연대도 완전히 일치한다.


열세 번째는 고인돌 유적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가 설명하고 있는 고인돌에 대한 기록 또한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을 유적유물로 뒷받침하는 단군조선의 실증적 증거물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서는 배달국 신시시대의 장묘문화부터 고인돌 시대 장묘문화와 삼국시대의 장묘문화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이와 같이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실상을 연대기와 역사기록과 역사 강역을 정확히 표시하고 있는 아시아의 대표적 역사서이다.

 

 

열네 번째는 하북성 중산의 천자명문이다. 하북성 중산묘에서 BC 10세기 것으로 보이는 청동도기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천자건방중산후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핵심강역인 서요하 지역에서 출토된 BC 22세기의 도자기 부호와 양식이 완전히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BC 22세기부터 BC 10세기까지 북경과 하북성 일대를 다스린 것은 단군조선의 천자였음을 기록한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지나인들이 최초로 천자(황제)를 참칭한 것은 BC 221년의 진시황이었다.

 

 

열다섯 번째는 요녕성의 번한 명문이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환단고기가 기록하고 있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번한(번조선)의 명문이 나타나 환단고기의 사실성을 증명하고 있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番汗(번한)을 나타내는 番汗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은 도장이 발견된 것이다. 단군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진한(요하지역)과 번한(황하/하북성)과 마한(한반도/만주)등의 삼한(삼조선)으로 나누어 다스렸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유물,유적이 출토된 것이다.

 

 

열여섯 번째는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나사대 지역에서는 환웅과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의 곰녀를 상징하는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 출토되었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흥산유적지에서는 갑골문의 초기형태가 발견되어 은나라의 갑골문이 홍산문화 담당자들에 의해 전해졌음을 밝히고 있다. 이 흥산문화와 나사대 문화는 대체적으로 배달국 시대(BC 3898년과 BC 2333년 사이)와 일치하고 있다.

 

 

열일곱 번째는 배달국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 이다. 환단고기에는 BC 3898 18분의 황웅 중 배달국을 건국한 제1세 거발환 환웅께서 신지에게 녹도문을 창안할 것을 명하고, 배달국의 역사기록을 담당시킨다. 그러데 이 녹도문이 한국의 평양에서도 발견되었고, 산동성의 창성조적비에서도 발견되었다. 평양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의 글씨는 모양과 형태가 배달국의 녹도문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이 이렇게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열본 구주신가의 가림토문 비석이나 이세신궁의 가림토문 청동거울은 한글 비석과 한글 청동거울이라 명명하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완벽한 가림토문이다. 또 스리랑카 패엽경사 발위글과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역시 그 형태와 내용이 한글(가림토문)과 흡사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열아홉 번째는 요하는 압록이고 난하는 요하란 것이다. 환단고기 택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 이고, 지금의 요하가 압록 이고, 지금의 나하가 요수(요하) 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란 사실은 중국 요사지리지와 삼국유사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나하가 요수임은 서토의 고지도 지리도 연산도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에도 나타나 있다. 환단고기가 얼마나 정확한 기록을 반영한 역사서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스무 번째는 낙랑군과 낙랑국이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는 낙랑군과 낙랑 국에 대한 근거를 가장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낙랑이란 지명이 나타나는 것은  BC 1767년 제13세 흘달단군, BC 1237년 제23세 아흘단군, 그리고 BC 195년에는 낙락왕 최승이 보물을 싣고 마한의 서울 왕검성으로 가는 장면이 적혀 있다. 이때부터 하북성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이 구분되어 나타난다. 환단고기는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스물한 번째는 단군조선 12세 아한단군 때 가림토로 추정되는 순수관경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겼다는 내용이 환단고기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에 나오는데, 엄청난 시차를 두고 사항을 기록함에 위작을 했을 리 없는 것이다.

단기고사에는 아한단군과 유위자 선인의 먼 국가장래에 관한 대화 속에 사방국경에 제왕의 명호를 본국의 문자로 비석에 새겨 국문을 영원히 보전케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아한단군 52(BC 1833) 4월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났다. 8월 천제께서 나라 안을 순시하시고 요하 좌측에 이르러 관경순수비를 세웠는데, 여기에 역대 제왕의 명호를 새겼는데 이것이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스물두 번째는 환단고기에 원형 한글을 같은 의미로 가림토加臨土와 가림다加臨多라고 하는 표현이 있는데 단군세기의 가림토나 태백일사의 가림다는 각기 다르게 전해져 오는 기록들 가운데 이암은 가림토(행촌,단군세기)를 이맥은 가림다(십일당 주인, 태백일사 소도경전 본훈)라는 표현을 참고한 것이다.

가림토는 가림(분별)하는 토대 즉 땅이라는 의미로 그 뜻을 택해 토()를 썼고, 가림다는 가림하는다(,)라고 다를 썼으나 같은 뜻이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한가지로 표현했을 것이다.

 

 

스물세 번째는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제4 마한세기 상의 소도蘇塗가 세워지는 곳마다 산상웅상山像雄常을 보게 되었다.는 표현에 비밀이 숨어 있다.

이맥 선생이나, 안호상 박사, 환단고기를 번역한 임승국 교수도 뜻을 잘 몰랐는데, 구길수 선생이 최치원의 천부경 81자는 본 천부경 16(하나,,,,다섯,여섯,일곱,여덟,아홉,)을 풀어낸 시첩이라는 비밀을 풀어내면서, 남근상이 모셔진 소도라 풀어 산상웅상이 남근이라는 것을 밝혔다.

소도는 솟다에서 와서 솟터 솟토 소토 소도나 솟대가 되었고, 소도에 솟은 것은 처음에는 박달나무로 된 환웅상인데 그것이 여음(돌무더기로 표현)에 삽입된 남근상(힌두교의 시바 링가)이 솟아 있다는 것이다.

이는 환단고기를 쓴 이가 전해지는 말이나 책의 내용을 자신도 이해하지 못해 원저본을 그대로 썼던 것이므로,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는 한 증거이다.
 

[출처: 신명나는 한국사(고준환 著 p.61~69)]



<내용출처:한류열풍 사랑>


♡ 제 블로그가 유용하시면 구독해주세요~^^
♠그냥 가시지 마시고 댓글을 써주시면 블로거는 큰힘이 된답니다~~*^^*♠


"Korea표기는 일제의 계략"

알파벳순 Japen 뒤로가게 Corea서 바꿔

13세기 이후 600년 넘게 ‘Corea’로 표기한 우리 나라의 영문 국호가 ‘Korea’로 바뀐 것은 일제의 치밀한 식민지배 정책의 일환이라는 북한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나왔다.

영문 국호가 바뀐 과정은 최근 한국일보 주최로 평양에서 열린 남북 역사학자 공동학술토론회를 취재하기 위해 방북한 본사 취재진이 북한 학자들로부터 입수한 연구 논문에서 처음 밝혀졌다. 북한의 역사ㆍ언어 학자들은 지난해 12월 26일 대대적인 학술대회를 열어 일제의 국호 바꾸기 과정을 추적한 보고서 12편을 발표했다.

이 논문들에 따르면 일제가 우리 국호 표기를 ‘Korea’로 정한 것은 영문자 표기 순으로도 조선이 일본에 종속됐음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일제는 1909년 7월 26일 조선 정부와 조인한 ‘중앙은행에 관한 각서’ 영문판에 우리 국호를 ‘Corea’로 쓰는 등 조선과 체결한 각종 영문 조약에는 ‘C’로 표기했다. 이후 외교권을 박탈한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통감부 관보를 비롯한 문서에는 대부분 ‘Korea’로 써 두 표기를 병용했다. 그러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을 앞두고 만든 병합준비위원회가 일부 이견에도 불구하고 가쓰라 타로(桂太郞) 내각수상 등의 주장에 따라 ‘Korea’로 일원화했다.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공명성 연구실장은 “일본은 통상 외래어 표기에 적용하는 전자법(轉字法ㆍ소리가 아니라 문자 정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방식)에 따라 ‘K’로 통일했다고 하지만 우리 국호가 ‘Corea’로 널리 쓰인 것이 한글 창제ㆍ보급 이전이기 때문에 논리에 맞지 않는다”며 “우리 국호 표기는 역사 어원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공 실장은 “올림픽이 명실상부한 국제 대회가 된 1908년 제4회 런던 대회 이후 나라별 입장을 영문 표기 순으로 한 점을 고려해 ‘Korea’ 표기를 강제, 일본의 지위를 국제사회에 부각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우리 국호는 19세기 말까지 유럽의 문서와 지도는 물론 20세기 초반을 전후해 외국과 체결한 각종 조약서에서 대부분 ‘C’로 표기됐다. 유럽에서 세계지도 간행이 활발했던 16세기 초~19세기 말의 세계ㆍ아시아 지도 20여 종 가운데 대부분이 한반도를 ‘Corea’로 썼다. 하지만 20세기 초 이후의 유럽 지도에는 이 표기가 ‘Korea’로 싹 바뀐다.

흥미로운 것은 북한의 연구가 지난해 월드컵 때 ‘Corea’라는 응원 구호가 등장한 데 착안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연구를 주도한 주진구 조국통일연구원 부원장은 1일부터 서울에서 열리는 ‘평화와 통일을 위한 3ㆍ1 민족대회’에 북한 학자들과 함께 참가해 이 내용을 설명하고 남북 공동연구를 촉구할 예정이다.

북한 학자들의 논문을 검토한 안병욱(安秉旭) 가톨릭대 인문학부 교수는 “남북을 통틀어 국호 영문 표기 첫 철자가 ‘C’에서 ‘K’로 바뀌는 과정을 학문적으로 광범위하게 연구한 것은 처음”이라며 “그러나 주장의 근거 자료들이 충실하게 제시돼 있지 않은 점이 아쉬우며 앞으로 남북학자들의 더욱 활발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내용출처:한류열풍카페>


♡ 제 블로그가 유용하시면 구독해주세요~^^
♠그냥 가시지 마시고 댓글을 써주시면 블로거는 큰힘이 된답니다~~*^^*♠
1998년 11월 19일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제독(李舜臣提督;1545.3.8.- 1598.11.19)이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전투중에 54세를 일기로 순국하신지 4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여러 나라의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생도들에게 역사적으로 유명한 세계 4대 해전(世界四大海戰)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 B.C. 480년 그리스의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제독의 살라미스(Salamis)해전

- 1588년 영국 하워드(Howard) 제독의 칼레(Calais) 해전

- 1592년 거북선을 앞세워 승리를 거둔 이순신(李舜臣) 제독의 한산대첩(閑山大捷)

- 1805년 영국 넬슨(Nelson) 제독의 트라팔가(Trapalgar) 해전 등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순신 제독의 승리는 가장 값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07년 막강한 러시아 극동함대(露西亞 極東艦隊)와 싸워 이김으로써 전세계를 놀라게 한 일본의 토고제독은 주위에서 그를 이순신 제독과 같은 위인이라고 칭송하자 이에
“나의 공로를 영국의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 이순신 제독의 업적에는 따라갈 수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순신 제독은 국가를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서 구한 세계적인 위인으로 존경 받고 있으며, 그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거북선(龜船)은
미국 워싱톤의 전쟁기념관 (War Memorial Museum), 영국 해사박물관(Maritime Museum), 중국, 독일, 불란서, 캐나다 등 세계 각지의 역사기념관(歷史紀念館)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순신제독 관련 말말


글은 조금 오래된 글입니다...

읽어보면 꽤, 흥미로울겁니다..
===========================================================================
"옛부터 장군으로서 奇正分合의 묘법을 다한 자는 한둘에 그치지 않는다. 나폴레옹이 '全으로써 그 分을 쳤다'라고 하는 것도 이 뜻에 틀림없다. 그런데 해군장군으로서 이를 살피면 먼저 동양에 있어서는 한국의 장군 李舜臣, 서양에서는 영국의 장군 넬슨을 들지 않으면 안된다. 이순신은 실로 蓋世의 海將이다. 불행히도 생을 조선에 태어났기 때문에 勇名도 智名도 서양에 전하지 않고 있지만, 불완전하지만 임진왜란에 관한 문헌을 보면 실로 훌륭한 해군 장군이다. 서양에 있어서 이에 필적할 자를 구하면 확실히 네덜란드의 장군 로이텔(Ruyter Michiel, 1607~1678) 이상이라 하지 않으면 안된다. 넬슨과 같은 사람은 그 인격에 있어서 도저히 어깨를 견줄 수 없다. 이 李장군은 실로 長甲艦의 창조자이며 300년전에 이미 훌륭한 해군전술로써 싸운 戰將이다. 야간의 경계법이라든가 또는 '붐스'의 응용이라든가 실로 감복할 것이 많다. 사람들은 방어수뢰를 공격수뢰로 전환한 우리 해군의 큰 업적을 떠들 것이나, 이것은 과연 후세에 전하여 자랑할 자격이 있다. 그러나 어찌 알랴, 李장군은 이미 300년전에 '붐스'를 공세작전에 이용했던 것이다. 벽파정에서 管正陰의 전사는 이 소식을 전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여간 이 蓋世의 해장 이순신은 견내량의 해전에서 확실히 포위, 집중포화의 전술을 썼다고 보인다."
(해군대좌 사토오 데츠다로, '帝國國防史論', 1908)

"이순신은 서양 사학가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그로 하여금 넉넉히 위대한 해군 사령관 중에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 정신인 불굴의 공격 원칙에 의하여 항상 鼓舞된 통솔 정신을 겸비하고 있었다. 어떠한 전투에서도 그가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의 물불 가리지 않는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은 아니었다. 그는 전투가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서 넬슨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 영국인으로서는 넬슨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해군제독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기란 항상 힘든 일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인정될 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고 전투 중에 전사한 이 위대한 동양의 해군 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영국 해군 준장 G.A.Ballard,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 New York, 1921)

위 두 글은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의 전략 전술'(문화관광부-전쟁기념관)에 있는 글들입니다.



"저를 넬슨과 비교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나 이순신 장군과는 감히 비교할 대상이 못됩니다. 무릇 전쟁에서 군인의 몫은1%요 국민의 단합된 힘이 99%입니다. 넬슨은 온 국민의 성원과 지지를 받으면서 전쟁을 치렀고 이순신 제독은 온갖 시기와 모함을 무릅쓰면서 싸웠습니다. 이 점 하나만 보더라도 저는 이순신 장군의 비교 대상이 못되며 그분(이순신 장군)이 보여준 전략도 제가 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도고 헤이하치로 연합함대 사령관, 동해해전 승전축하 리셉션에서)

이 말은 아주 유명한 말이죠. 이 글 출처는 엉뚱하지만 애니메이션 잡지 '모션'이 난중일기를 소개하면서 덧붙인 글입니다.



"세계제일의 해군 장군인 조선의 이순신을 머리에 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인격, 그의 전술, 그의 발명, 그의 통제 능력, 그의 계략, 그의 용맹, 그 모든 것이 최고라고 진심으로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가와다 이시오 소좌, 동해해전 직전 이순신 장군 영정에 빌며 한 말)

이 말은 '일본인이 쓴 조선왕조 멸망기'(가다노 쯔기오 저) 라는 책에 나옵니다.

이 글은 하이텔 군사동호회에서 퍼온 글입니다. 저자는 김정민이란 분입니다. 저자께는 허락받지 않고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외국인들이 알고있는 이충무공
언젠가 홈월드(우주에서 함대전을 벌이는 벌이는 3차원 전략 시물레이션 게임입니다) 에서 영국인들을 본 적이 있었다. 스코틀랜드 사람이라고 했던가.
대단한 고수들이었다. 하이퍼 스페이스를 이용한 신출귀몰의 게릴라전과 스트라익
크래프트의 능숙한 운용술. 나는 4번중 그들에게 3번을 맥없이 깨지고 말았다.
그래도 마지막판에서 이를 악물고 플레이하는 나에 대해서 그들은 대단해 하는
눈치였다. 그들은 나에게 물었다. 내가 어느나라 사람이냐고.
나는 솔직히 한국인이라고 하는것이 부끄럽기가 그저없었다. 베틀넷에서의
한국인들의 행패. 그들이라고 모를리 없다. 전세계 게이머들이 알고있는 사실이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인이라고 정직히 대답했다. 다음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들이 던진 질문은 이러한 것이었다.
"do ya know Admiral Yi sun shin"
그의 황당한 질문에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 있었지만 그는 분명 이충무공에 대해
묻고있는 것이었다. 나는 당연히 안다고 대답했다. 한국인이라면 이충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또한 일본에서도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거라고 대답했다. 그 말이
있은후 우리는 한참동안 이충무공에 대해 토론했다. 정말, 생각만 해도
경이롭고,신비스런 일이다. 넬슨이라면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져 있더라도 서양에서
이충무공을 알고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 파트너였던 사람
역시 이충무공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름만 들어봤다고 했고, 나에게 처음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은 한국인보다야 못해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놀랍지 않은가?
학익진도 알고 있었다.
마지막판에서 나의 극적인 승리도 그의 주력함대가
학익진에 완전히 넘어가 버린 탓이었다. 그는 홈월드 최강의 화력이라 할 수 있는
헤비크루저를 무려 13대를 가지고 있었고, 그밖에 미사일 디스트로이어 몇대와
아이언프리깃까지 거의 40대에 육박하는 대규모 함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에비해
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은 미사일 디스트로이어 24대,아이언 프리깃 10대. 나는
언제나 학익진을 시작할 때 처럼 어택버머를 회피모드로 놓고 적 함대를 해집고
다녔다. 에너지가 떨어진 유닛은 즉각 가미가제를 시키면서 계속 유린하자 은근히
화가난 그는 주력함대와 스카웃 수십기를 이끌고 나를 뒤쫓았다. 그러다 내
주력함대가 언뜻 보였지만 그리 당황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길수 있다고
자신했는지 그는 함대를 월 대형으로 해 놓고 그대로 돌진해 왔다. 나는 계속
도망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모든 함대를 학익진으로 돌렸다.
다행히 그의 스카웃은 적극적 모드로 되어있었는지 미사일 디스트로이어가
뿜어대는 미사일에 모두 격추되었고,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서포트 프리깃 몇대와
세부대로 이루어진 멀티건 콜벳 수십대로 완전히 감싸버렸다. 처음엔 자신만만하던
그도 이렇게 넓게 포위되어 버리자 완전히 굳어버린것 같았다. 게다가 나는 미사일
디스트로이어가 그에비해 월등히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포위되어 있는 상황이라면
내가 훨씬 유리할 수 밖에 없었다. 헤비크루저가 많았지만 공격범위로 치면 미사일
디스트로이어에 비해 훨씬 불리하다. 결국 학익진 대형을 넓게 잡았던 나는 월
대형으로 밀집해 있던 그의 함대를 철저히 유린할 수 있었다. 이에는 뒤에서 포위를
한 세부대의 멀티미사일 콜벳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 내가 제일 처음으로 노린것은
역시 몇기의 미사일 디스트로이어. 아이언 프리깃으로 그의 미사일 디스트로이어를
하나하나 찍으니 디스트로이어들은 금방 괴멸하고 말았다.
남은 함선들,특히 헤비크루저들은 선회력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뒤에서 멀티건
콜벳이 쉴세없이 쏴 대는 포에 그대로 다 맞아줄 수 밖에 없었고 나는 결국 미사일
디스트로이어 10대정도만을 잃고 승리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쓴 이 전술을 알고 있다고 했다. 책에서 얼핏봤던 동양 최고의
해군전술가 이순신의 'harpy wing' 대형이 아니냐고. 하피 윙이라. 학익진이 그렇게
알려져 있었나. 진짠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충무공에 대한 극찬을 들으니 기쁘기가 그지없다. 그저 우리나라에서만
최고의 전술가라고 평하는 이충무공이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외국에서도 넬슨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의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 생각만 해도 흐뭇한 일이다.
그의말에 따르면 유럽의 많은 해전전술가들이 이충무공을 넬슨보다 한수 위라고
평하고 있다는데 그게 진짠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럼 모두들 즐통세요^^


 

<내용출처:한류열풍카페>


♡ 제 블로그가 유용하시면 구독해주세요~^^
♠그냥 가시지 마시고 댓글을 써주시면 블로거는 큰힘이 된답니다~~*^^*♠

슈메르 언어와 한국어의 발음비교
이정도 모티브로 닮았다고 주장한다고 정통사학자들이 꼬집는다면 다음의 증거를 제시하겠다. 결정적으로 쐐기를 박는 증거이다.

봉황의 상징과 같은 동양인의 공통점, 역사의 뿌리가 같다면 반드시 닮은꼴이 있기 마련이다. 슈메르의 언어와 현재의 언어와 현재의 한국어를 비교하여 보자.


고대슈메르어 한국어
아누(Annu)[최고 신] 하느님 [하느님,上帝]
Bad 바드 [ 밭 ] 밭 (Bat) [밭, 田 ]
안 (An) [天] 하늘 (ha) [ 하늘, 天 ]
Na 나 [나 1인칭] 나 Na [ 나,我 ]
기르(Gir) 길 (Gil) [路]
Ge 그 [3인칭 ] 그 Ge [ 3인칭 ]
라 (Ra) [~ 에서 ] 로 (Ro) [ 조사 ]
I 이 [1 인칭 ] 이 [지시대명사]
아비 Abi [ 아버지 ] 아비 (Bo) [ 夫 ]
Uhma 움마[엄마 母] 엄마 Uhma [엄마 母]
니므 Nim [ 님 任 ] 님 (Nim) [ 사람 任]

여기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문자와 발음의 변천원리를 간단히 배워두고 넘어가자

음운의 변천은 문화와 유적의 원뿌리를 밝히는데 중요한 수단이 된다.

이와 같이 기초 단어가 의미까지 모두 같다. 특히 조사를 사용해서 문장의 의미가 달라지는 언어는 교착어의 유일한 특징이라 할수 있다. ~로, ~가, ~의 , ~를 와 같은 조사를 사용하는 언어는 교착어가 유일하다.

교착어를 쓰는 종족은 전세계적으로 어떤 민족인가? 동이족 계열 뿐이다. 터키도 교착어를 쓴다. 어순체계가 약간 다른데 터어키에서는 현재에도 학교에서 국사시간에 한국을 형제국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터키의 역사 교과서는 2000년전에는 한국과 터키는 같은 민족이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외 지구촌의 소수종족중에 교착어를 쓰는 곳이 그외 몇몇 종족은 중국의 묘족과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교착어를 사용한다.(이 부분도 민족의 뿌리에서 차후에 자세히 언급하도록 하겠다)



위의 도표에서 보듯이 슈메르의 주신은 아느(Annu), 최고의 신을 뜻한다. 우리말의 하느님, 하늘님, 한울님과 같은 의미이다. 중세 이전에 쓰던 아래아 한눌님 으로 기준하면 이단어는 전부 같은 발음이 된다. 하(아)가 뜻하는 것이 하늘과 위와 남성적인 것이라면 '느'가 뜻하는 것은 땅, 아래, 여성적인 것이다.(누리(땅), 누이(누나) 같은 말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고 며느리, 마누라도 이 어원에서 나온, 여자를 지칭하는 말) 하느님이라는 말은 하늘과 땅 즉 천지를 부모로써 떠 받드는 것이며 모든 사람은 천지부모의 자식이란 뜻이 언어속에 그대로 전해진다. 삼일신고의 내용을 살펴보라. 사람 하나 하나에게 하느님의 씨알이 그대로 내려와있다는 사상과 정확히 일치한다.이것은 우리 민족의 근본사상과 정확히 일치 하는 것이다.


--------------------------------------------------------------------------------

특히 기본단어와 같은것은 발음과 뜻이 수천년을 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음운과 구강구조상 ㅇ,,ㅎ,ㅋ 의 자음은 서로 변천이 되기도 한다.한글 고어 중에서 ᅙ, ᅓ, ᅘ의 발음중 ᅙ발음은 ᅓ, ᅘ 발음은 칸으로 각기 변천한 것으로 보인다. 한자 상으로도 한(汗)과 간(干)은 원래 같은 발음의 글자이다. 한자의 회의자는 특수부수를 넣어서 같은발음으로 다른의미를 만드는 것을 잘알 것이다. 또한 위의 한(汗)의 글자를 순수 우리말에서는 또한 칸으로 읽기도 한다. 1000년전 징기스칸이 세계정복을 할 때 한자로는 성길사한(星吉沙汗)이라 표기했고 또한 징기스칸 이라 했다.성길사한의 이두식 발음이 징기스칸이 아닌가 한다. 같은 한(汗)을 쓴 것이다. 또한 신라시대 왕의 호칭이 거슬막한(汗)이다. 필자는 이문자와 발음이 더 고대로 올라가서는 안(AN)이었을 것이다. 모음은 강약에 따라 (아래아 한)字는 훈도 되고 혼도 되고 한도 된다. 아래 아 ᅙㅏ字의 정확한 발음이 ㅗ와 ㅜ의 ㅏ의 중간 발음임은 독자들은 고등학교때 이미 배우셨을 것이다.



슈메르어 An은 하느님을 뜻한다. 또한 이 An은 제정일치 사회에서 군왕의 표상이 되었다. 원래 제왕이란 우주의 최고신을 대신하여 이땅을 다스리는 성인을 말한다. 고대에서는 그 시대의 최고의 지혜와 덕을 갖춘 성인을 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세습제로 바뀌게 되면서 여러 가지 폐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원래 왕조는 세습제가 아니었다. 선출방식에서 심각한 문제가 드러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습제로 바뀌면서 여러 가지 폐단도 같이 발생하게 된다.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이렇게 변천된것도 그 이유가 있다. 이 역사적 원리를 나중에 설명하겠다. ) 한민족은 하늘과땅의 민족이란 뜻이고 천손민족의 뜻이다. 제왕은 스스로 솔선수범하여 스스로를 희생하고 고난에 놓이게 하여 백성들을 보살피는 그런 존재이다.


또한 지혜와 덕성을 갖추고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서 수많은 백성들을 더 살기 좋고 이롭게 한 존재이다.



슈메르인들이 사용했던 12궁도와 우리의 12간지, 60진법과 60천간, 흑해/홍해와 황해의 오행흔적, 한단고기의 12환국에 묘사된 수밀이(須密爾)와 슈메르는 같은 뿌리라고 단언할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나타난 아카드 문명이 그후 바빌로니아, 아시리아와 힛타이트, 박트리아, 페르샤 등등으로 연결되는데 반해 찬란한 슈메르 문명은 후계를 잃어버린, 바람같은 역사가 되어버렸다. 그들의 문명은 그야말로 불가사의(不可思議) 취급을 받지만, 역사적으로 분명히 바빌로니아-그리스-동로마-아랍(오스만투르크 등)-서유럽 르네상스로 그 계보를 잇는다. 『


인도의 힌두교 사원에서 발견한 나칼 점토판의 해석구절에는 다음 구절이 등장한다.'라마 야나'에 '동방의 미지의 땅에서 미얀마로 온 것'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동방은 바로 태평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태평양일 수도 있고 필자는 고대의 환국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이 번역을 한 처치워드는 슈메르문명의 모체가된 동방의 환국문명을 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또한,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트로아노 고사본'은 유카탄 반도와 고대 마야족에 대한 기록인데, 여기에도 무(MU) 대륙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인도나 미얀마, 이집트에서 발굴된 상형 문자는 모두 나칼 점토판에 새겨져 있는 무 제국의 기호를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직접적인 기록 말고도 무(MU) 대륙이 실재했다는 증거는 세계각지에 흩어져 있다고 처치워드는 주장한다.


이스터, 망가이, 마리아나 제도 등 남태평양의 섬들에 남아 있는 온갖 유적에서 무 대륙의 자취가 발견되고 있고, 유카탄 반도의 우슈말 사원 비문에 새겨진'서방의 나라, 우리는 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는 표현도 그 증거의 하나다. 멕시코시티 남쪽에 있는 피라미드의 비문에는 '어머니 나라의 붕괴를 기념해 세웠다'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제임스 처치워드는 어머니 나라의 붕괴는 뮤대륙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필자는 어머니나라를 슈메르제국이라고 본다. 피라미드속의 왕의 무덤이 만들어지는 연대와 실제 뮤대륙의 멸망의 연대와는 수천년의 시간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뮤대륙의 문명을 이어받은 중간 매개자의 역할을 한 고대 문명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할 수 있을것이다.

슈메르문명과 이집트의 고대벽화를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혹자는 고대의 건축물이 돌무더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 건축물들은 오늘날의 기술로도 건축하기가 간단하지 않은, 매우 정교한 것들이다. 이런 건축물들은 대홍수로 휩쓸려간 여러 유물들과는 달리 아직도 굳건하게 남아 과거의 찬란한 문명을 증거하고 있다.

<내용출처:한류열풍카페>


 


♡ 제 블로그가 유용하시면 구독해주세요~^^
♠그냥 가시지 마시고 댓글을 써주시면 블로거는 큰힘이 된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