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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에 올릴려고 한 사진들을......지금 한꺼번에 업로드 하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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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들어온 중국식 가부장제가 식민시대 거치며 제도와 규범으로 굳어져
원래는 상속·제사·족보에서 남녀와 친가·외가 차별 없고 차가살이가 일반적 풍속 

 
한국사에 가부장제가 형성되는 계기는 15세기 주자학과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수용이다.
이로써 가부장제의 이념적 틀이 마련되었고, 주자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주자가례의 실천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결정적 계기는 식민지 지배다. 우리가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가족상은 굳이 따지자면 100~200년 정도의 짧은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전통 중국 사회에서 여성은 두 번 출생한다.
여성은 혼인으로 사회적으로 출생하며 주어진 역할을 하게 된다. 맹자(孟子)가 말했듯이, 여성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남자 가문을 잇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할 뿐이다. 여성은 남성에게 부속된 채로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을 따르는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미덕으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중국과는 달랐다.
여성에 대한 제약이 별로 없는 고려의 분위기는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조선은 중국 고대를 이상으로 삼고 사회를 변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변혁의 도구로 주자가례를 활용하였다. 관혼상제(冠婚喪祭)를 규정한 주자가례는 가정의 일상생활에서 가부장제를 실천하는 매체였다.
이러한 개혁은 기존의 풍속과 마찰을 일으키며 또 어느 정도 변용되면서 한국 사회에 정착하여 지금까지 우리의 사고를 규정하고 있다.

지금 사람들은 시집살이가 우리의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론 시집살이가 아닌 처가살이가 일반적인 혼속(婚俗)이었다. 남자들은 외가에서 자라 장가를 가 처가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장가든 사람이 처가 피붙이들과 잘 지내기 위한 의식이 필요하다.
신랑은 처가 사람과 몸으로 부딪치면서 더욱 가깝게 된다. 이는 ‘신입생 환영회’이다. 요즘 결혼식 피로연에서 친구들이 신랑에게 장난을 치는 것은 여기서 유래한다.

이러한 혼인풍속은 16세기에 접어들어 바뀌기 시작하였다.
“처가살이하는 것은 남녀의 질서, 하늘과 땅이 거꾸로 된 것”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고유의 풍속이라는 반론 역시 강하였다. 결국 타협책으로 장가를 가서 일정기간 동안 처가에 머물렀다. 후대로 올수록 그 기간이 단축되었다.
처가살이하는 혼인풍속은 남녀평등의 사회적 여건을 만들었다. 놀라운 것은 그 전통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신혼여행 후 처가로 돌아와 며칠을 지낸 후 시집으로 그리고 그들의 보금자리에 둥지를 튼다.

 

 

조의선인 평...

 

단군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이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사상이다. 하지만 이 홍익인간에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평등사상이 내재되어 있다. 단군신화, 고주몽 설화를 보더라도 우리나라 역사에서 여성의 역할은 상당함을 알 수 있다. 곰에서 인간이 된(물론 이는 웅족의 공주인 웅녀가 계율을 지켜 한웅의 부인이 된다는 것을 신화로 표현한 것이다) 웅녀,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할 때 곡식을 준 유화부인을 보더라도 우리나라 역사에서 여성이 가진 상징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소서노라는 여걸은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국하는데 막대한 공을 세운 한민족 최초의 여왕이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울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온조가 백제를 건국할 수 있었던 건, 여걸 소서노가 있기에 가능했다.

 

고구려의 풍습 중에 서옥제와 데릴사위제가 있다. 이 풍속은 남녀가 결혼을 하면 남자가 일정기간 동안 처가집에 얹혀사는 제도이다. 바로 이 서옥제가 우리의 본래 결혼 풍속이었다.

 

본래 우리민족은 조선 초까지만 해도 남녀 구분이 없었다. 재산상속 역시 남녀 가리지 않고 균등상속을 하였다. 즉 우리는 이웃의 중국, 일본과 달리 남녀평등사상이 있었다. 이는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유럽, 미국, 그리고 일본을 보면 여자가 남자와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른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러한 남녀평등사상은 우리민족이 내세운 파격적이고, 인간적인 사상이었다.하지만 중국의 유교사상으로 인해 우리 고유의 풍속인 남녀평등사상은 점차 가부장제로 바뀌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여성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제 우리는 중국의 유교사상에서 벗어나 본래 우리의 사상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상식

고구려의 데릴사위에서 유례된 “남귀여가혼”이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의 혼인풍습으로 그

대로 전해졌기때문이다. ‘남귀여가혼’은 말 그대로 혼인 후 남자가 여자 집에 머물며 생활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조선 중기까지 광범위하게 행해진 혼인 주거의 형태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집에 살고 있는 여성의 발언권이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셀 수밖에 없었

다. 따라서 혼인 제도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고 이를 중국의 결혼제도인 ‘친영제도(親

迎制度)’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세종대왕은 즉위 17년(1435년) 3월에 파원군(坡原君) 윤평(尹坪)과 숙신옹주(淑愼翁主)와의

혼인을 친영의식으로 치르는 모범을 보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친영제도를 행하는 사대

부는 극히 드물었으며,

300여년이 지나 호란이후 질서를 잡기위해 주자학이 경직화되는 조선 후기(17세기 말∼18세

기 초)에 와서야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

이것도 완전하지가 않아서 예전에는 아이가 다 클동안 처가에서 살던것에서

‘반친영’이라는 이름으로 이전의 혼인제도와 절충, 혼례는 여전히 여자의 집에서 하고, 다

만 신랑이 신부집에서 2 ∼ 3일 정도 머무는 것으로 기간이 대폭 줄어 들었다

그래서 18세기 어느정도 친영제도가 정착되기전까지는 결혼을 할 때에도

꼭 신랑이 먼저 신부 집으로 가서는 그 집 마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서는

첫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그냥 그 집에서 사는데...

신랑은 장인의 집, 즉 장가(丈家)에서 3년에서 10 여 년까지도 생활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아무개가 장가를 갔다”라고 했다.

그리고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그제서야 신부가 신랑의 집 쪽으로 움직이는데...(이제는 신랑신부도 아니지만)

사람들은 이를 두고 “아무 집 아기씨가 시집을 갔다.”라고 했다.

그래서 옛날에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결혼후 20여년이 지난 나이40 에 율곡등 자식들을

데리고 친정인 강원도 땅을 떠나 시집인 한양으로 올 때에 발길이 안 떨어진다면서 애절한

한시를 지은 적이 있고...

또 율곡이 장가 갔다가 본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퇴계의 댁에 들렀다가 자고 왔다는 기록

도 보인다.

그리고 이순신이 장가 갔을 때에는 시골 무관 출신인 장인 영감이 “제발 공부 좀 해라”는

등쌀에 못 이겨서 무과 과거 시험을 보았다는 기록도 보이고... (28살 때의 첫 시험은 말에

서 떨어지는 통에 불합격했고, 32살 때의 두 번째 시험은 거의 턱걸이로 합격한 적이 있다)

참, 이런 전통은 중국식 친영제도가 상당히 정착된 18세기에도 보이는데..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장가에 갔을 때에는 처삼촌이라는 사람이 매일 꽉 붙들어 놓고 사마천

의 “사기”를 비롯한 온갖 책들을 가르치는 바람에 박지원의 실력이 엄청나게 늘었다는 기

록도 보인다.

거기다 같은시기 정약용도 고향인 경기도를 떠나 서울에 와있을때 처가에 살면서

기반을 닦아나간 기록도 남아있다...

( 조선시대의 영웅들이 처가에서 쿠사리좀 먹은듯 싶습니다. ^^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여성들의 목소리가 컷습니다. )

그리고 재산 문제에 있어서도

부모님이 돌아 가시면 출가한 딸까지도 맏아들과 똑같은 규모의 유산을 상속했던 것이 조선

중기까지의 우리나라 전통이었다. 그리고 재산을 상속 받은 형제자매는 아들딸 구분없이 그

집안의 제사를 똑같이 나누었다. (그러니까 장남이 증조 할아버지 제사를 가져가면, 출가한

맏딸은 증조 할머니 제사를 가져가고.... 하는 방식임. 제사까지도 남녀 평등했지요 ^^)

하지만 이런것에 실질적 첫 브레이크가 걸리는데 양반등 모든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자학 신봉자 성종은 여자가 재혼하면 자식의 과거길을 막아버리면서

양반가 여인들의재혼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지만 일반 90%이상의 백성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었

다.

 

(이당시 유럽에서도 남녀가 평등하게 재산을 상속받았을까요??? ^^)

그러나 양반가의 연인들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두 번의 큰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전국적

으로 흩어진 가족들이 너무 많아져서 막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살았으면 어디에 있는지 모

르는 상황에서 부모님 유산이 장남에게만 단독으로 상속시키는 사례가 늘어 났고....(물론

집안 제사도 다 가져 갔지요)

재산이 장남에게로 몰리자 그 때부터 조선은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사회로 급속히 변화해 갔

는데.... 이후 2- 300년 간이야말로 우리 역사에 유례가 없는 여성 수난사가 전개되었지요.

여기에 이런 사회적 변화와 호란이후집권층의 사회통제를 목적으로 한 주자학의

경직화는 오래 전에 만들었던 과부재혼금지법도 그제서야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햇고...

천년 넘게 내려온 결혼제도 마저 바꿔면서 이것들이 복합작용을 일으켜

조선후기 이로 인한 여성 피해 사례도 생겨 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법적으로는 균등상속이 조선후기에도 보장되 있었고 일제시대에 와서야

차등상속이 시행되다가 해방이해에도 이를 계속 적용하지만 민주화이후 10여년전

균등상속으로 복귀하죠.(정말 쪽바리들 ㅅ ㅂ ㄹ ㅁ)

조선후기에 와서도 서민들의 성문화나 재혼은 자유로웠지만 결혼제도만은 양반들의

영향으로 중국식 친영제도가 양반들에 이어 서민들에게 까지 전파되죠..

거기에다가 일제의 침략은 여성 수난사에 더욱 기름을 부었습니다. 일본은 원래부터 여자를

재산목록의 일부로 간주하는 나라이라서 여자를 대단히 우습게 보는 전통이 있는데, 우리 남

자들이 그 때 그것은 확실히 배워 두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 그래서 일제 시대 때부터 남편이 부인에게 반말하는 풍조가 생겼다고 함 ---

그 당시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평등했던 남녀관계가 호란과 특히 왜국의 침략

시절에 많이 변질 됐습니다.

<출처 : 한류열풍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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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중국 산동성 황하유역의 선사유적지 능양하를 발굴하던 중국 고고학자들은 알쏭달쏭한 문양이 새겨진 팽이꼴 토기를 발견하고 고민에 빠졌다.

높이 57cm의 토기 상단에는 (1)과 (4)가 합쳐진 문양이 있었다. 왜 이런 문양을 새겼을까. 궁리 끝에 학자들은 이곳이 청동기시대 고대중국문명의 터전인 대문구(大汶口)문화 유적지이자 갑골문자를 고안한 은나라 문화기반임에 착안해 토기문양을 한자원형으로 점찍었다.

그러나 (1)과 (4)로 구성된 문양의 의미는 기존 한자체계로 명확히 설명되지 않고 토기모양도 다른 지역 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난점이 남았다.

사진설명 :(왼쪽)산동성 능양하 유적에서 출토된 고조선 특유의 팽이형 토기. 신용하 교수가 아사달 문양으로 추정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신용하 교수의 설명

민족기원사 연구에 천착해온 신용하 서울대교수(사회학)는 최근 <한국학보> 봄호에서 이와 관련해 이 능양하 토기의 문양이 바로 고조선의 도읍지로 기록에 언급된 아사달을 뜻한다는 이색견해를 제기했다.

`고조선, `아사달'문양이 새겨진 산동 대문구문화 유물'이란 논문에서 그는 상형된 모양새로 비춰 (1)문양의 ○는 태양, (3)은 구름 또는 바다(또는 바다에 비친 태양의 불빛)를 상징화한 것이며 이를 합친 (1)은 옛 고조선말로 `아사'(아침), (4)는 달(따뜻한 양지의 산)을 나타낸다고 풀이했다.

따라서 두 문양을 합치면 고조선 말에서 나라와 서울이름을 뜻하는 `아사달'이 되고, 이를 한자로 옮긴 것이 조선이 된다. 신 교수는 논문에서 “중국 고고학·역사학자들은 한국어의 특질을 파악하지 않은 채 ◇을 단순히 한자 기원으로만 간주했으며 팽이형 토기가 고조선문명 특유의 토기양식이라는 사실도 간과했다”고 비판했다.

중국학자들은 (1)을 `아침 단'(旦)이나 `여름하늘 호'(昊), `빛날 경'(炅) 등의 기원으로 보았으나 그 밑의 (4)를 합친 문양은 해석하지 못하거나 불 또는 (1)문양의 변형이라는 등 억지맞춤식 해석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같은 문양의 토기가 부근에서 11개나 출토됐고, 고구려 벽화에서도 이 문양이 발견돼 이 가설은 짐짓 흥미롭다.

팽이형 토기도 논란거리다. 이는 기원전 3000년~2000년 청천강 이남부터 한강이북에 나타난 양식으로 김원룡 등 남한 일부학자와 북한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양식으로, 남한학계는 지방양식이라고 평가절하해 왔다.

신 교수는 북한가설을 토대로 팽이형 토기가 산동에서 발굴된 것은 당연히 고조선인들이 활동한 근거라고 주장한다. 중국사서에는 산동 고대문화의 주역으로 황하상류 화족과 다른 동이족을 제시했으나 고조선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고조선 산동 진출설을 주장한 신채호의 주장을 연계시켜 동이는 고조선 후국세력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신 교수는 이전부터 여러 논문에서 한·맥·예 3부족 연맹으로 성립한 고조선이 만주, 중원에 후국을 거느린 거대문명권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한국학보의 글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주류 사학계에서는 신 교수 주장에 대해 고고학적 논증이 미흡하고, 지나치게 민족중심의 주관적 해석이라는 입장을 보여왔다.

그러나 산동고대문화의 주역인 동이족 실체에 대해서는 억측 또는 무관심의 극단적 태도가 엇갈려왔다는 점에서 이 논문은 성찰의 여지를 남긴다. 팽이형토기 양식논란을 주류학계가 정밀한 검토없이 사실상 묵살해왔다는 점에서도 중국지역의 고조선 문화연구의 허술함을 겨냥한 신 교수의 주장은 일단 검증하고 재론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노형석 기자nuge@hani.co.kr  한겨레신문 2001. 3. 1

 

<출처 : 한류열풍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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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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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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