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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靑) 황제는 왜 신라(新羅)를 사모하는가

1.금나라와 청나라의 조상은?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後金)을 세운 왕의 이름을 우리는 누루하치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들의 성(性)은 무엇인가?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府儀)의 성도 당연히 애신각라이다. “애신각라”라는 성에는 무슨 뜻이 숨어있는가? 애각(愛覺) 신라(新羅)라, 신라를 사랑하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신라(新羅)? 삼국시대의 그 신라? 그렇다. 그 신라다. 다름 아닌 그 신라다. 청나라와 신라가 무슨 관계냐고? 다름 아니라 청나라의 왕족과 신라의 왕족은 멀리멀리 가면 그 뿌리가 같다. 사실이냐고? 지금부터 이 이야기에 기 막힌 사연을 따라가 보련다. 너무나 확연한 심증을 드러내는 고대사 X 파일의 첫 장면이다.

2.금은 곧 김(金)

우리가 오랑캐 청나라라고 알고있는 만주족이 세운 첫 나라는 청나라가 아니다. 대진국(발해)이 망한 후 북방 종족들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그중 거란(글안)족이 세운 나라가 요(僚)이고 만주족이 세운 나라가 금(金)이다. 나중 명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의 패자가 되는 시점에서 이때의 전통을 이어받아 나라 이름을 후금(後金)이라고 할 정도로 “金”이라는 이름에 집착하는데, 바로 이 金이 “심증”의 근거다.
金이라고 써놓으면 이 성씨를 가진 사람이 워낙 많아서 두 셋 중에 하나는 이 사람일 것이다. 그 이유가 무언가? 신라가 워낙 오래전에, 그리고 오랜동안 나라를 유지했기에 왕족의 숫자가 이리 많아져 이제 와서는 나라 성의 사분의 일을 차지하는 정도가 되었다. 남과 북의 보스가 죄다 김씨니 신라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 든다. 김은 곧 금이다. 금을 잘 다루고 세공을 잘하던 사람들이라고 해서 김이라 했다.

3.신라는 대륙에서 온 기마족

그런데 만주족의 나라이름이 金이라니! 김씨더러 너는 만주족 출신이다, 라고 하면 아마 열받는 정도가 아니고 이빨을 악물고 명예회복을 하러 덤벼들 사람이 한 둘이 아니리라. 그러나 어쩔 것이랴, 그 말은 사실이다. 신라계 김씨의 조상은 김알지가 대표하는 부족으로, 거세와 석탈해 다음으로 왕족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왕은 세습이 아니라 여러 종족 중 한 종족이 번갈아가며 맡아 하였는데 종국적으로 김씨종족이 왕족을 맡아 나라를 이끌어 나간 것은 우리가 익히 일고 있다. 김알지는 어디서 왔는가? 만주에서 왔지.(물론 종족 연원이라는 의미이며 지역적 의미는 아니다) 신라족을 구성하는 주요한 종족인 김씨족은 우리가 알다시피 신라의 중건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을 지킨 왕조이다. 사실상 신라왕족을 칭하는 김씨족의 근원은 어디일까?

김씨들 스스로도 잘 알지못하는 이 부분은 그저 경주김씨라는 관향명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살펴본다면, 경주, 서라벌, 금성, 동경으로 칭하는 신라의 도읍이 현재의 경상도 경주라고 명시해놓은 책자나 문헌은 없다! -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어쨌든 상상력을 발휘해보는 것도 크게 나쁠 것 없다. 특히 여기에는 상당히 신비로운 이야기가 많아서 인디아나존스를 능가하는 모험의 세계가 가득하다. 아마 21세기 우리 문화·경제권의 영화소재의 상당부분은 여기서 가져올 수 있으리라.)

4.일요스페셜에서 증거 보여줘!

아닌게 아니라 지금도 이 이야기들은 다큐멘터리의 소재감으로는 아주 적절하다. 특히, 동방과 서방을 마구 넘나드는 기마종족(스키타이족)의 이야기를 꾸밀 때면 빠질 수 없는 것들이다. 카스피해와 흑해부근의 스키타이 유물과 한반도 신라의 그것은 너무 닮아서 러시아 학자들조차 구분하기가 불가능하다. (KBS 일요스페셜.97.3) 특히 천마총에서 발굴한 금관(金冠)은 스키타이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줄줄이 달린 곡옥은 지금도 흑해남부와 터키지방에서 발굴되는 스키타이 종족의 그것과 너무 똑같다!
고구려와도 다르고 백제와도 다른 이 금관의 주인공들의 강역은 카스피해 근처다. 이런 추정이 틀리더라도 최소한 동일한 문화를 뿌리고 가지고 그곳과 한반도에 정착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같은 유물과 같은 문화양식이라는 공통점만으로 그들이 같은 연원이라고 추정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완강히 “아니라”고 말한다. 역사에서 “추정”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실증이란 문헌에 의지하는 것이고, 결국 문헌을 남기지 못한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동방스키타이족은 “역사도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주요 근거로 남용된다. 그것도 주로 식민사학자나 그 후계자들(주로 관변사학자)이 잘 쓰고 우리도 그 바탕에서 교육을 받았길래 절대 자유롭지 못하다. 살짝 눈을 돌리면 그 유명한 토인비의 가설은 “추정”을 위한 논리틀이다. 이것은 영국사람 것이라 인정해주고 조선사람이 이런 틀을 만들면, 실증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사이비고 도라이고 괴변이다?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더군다나 문헌대신 그 광대한 영역에 흩뿌려놓은 흔적만 보아도 기마종족의 역사가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기마종족을 “페라스키야”라고 불렀다. 말을 탄 야만족이라는 이 뜻은 알고보면 “페라”와 “스키야”의 합성어인데, 페라는 “페르”,“펴라” 등과 같은 어원으로 고대 동,서,중앙아시아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던 “불(fire)” “벌(field)”의 뜻이다. 어떤가? 발음도 비슷하지 않은가? 평양도 이 어원에서 왔고 부여도 이 어원에서 왔다. 더욱더 신기하게는 페르-샤(터키지방의 고대제국)도 똑같은 의미이다. 더군다나 그들의 종교는 조로아스터교, 즉 배화교다. 불을 신앙하는 불종족인 셈이다.

강역이 여기까지 가는데, 당신은 만주족이 그저 만주에서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거기서 왔을 것이라 믿는가? 만주족의 또다른 호칭인 “여진(女眞)족”만해도 그렇다. 그 말은 이두문자다. 즉, 한자의 음을 빌려 호칭을 적어놓은 것이다. 이 여진이라는 말이 숙신(肅愼), 조선(朝鮮), 주신(珠申)과 똑같은 뜻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아는가? 그 말은 “밝은 온누리”를 뜻하는 말로써 마찬가지로 박달(밝은 들), 배달과 같은 뜻이라는 말을 그대는 아시는가?

단지 우리 민족(현재의 대한민국경제권을 형성하는)만이 아니고 고대 기마종족 전체가 밝은 들판을 지향해 뻗어나가는 이념(준 이념이라고 해두자)을 공유했다는 추정을 그들의 흔적에서 찾아내는 것이 그대는 도라이들이 하는 일이라고 치부하고 말텐가? 만약 그렇다면, 단언하건데, 그대는 없다.
못난 것은 우리들이지 그 넓은 광역을 누비던 우리 조상들이 아니다. 경주 김씨들은 경주에 정착하기 전만해도 카스피해와 태평양 사이를 오가던 종족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황금족이라 칭하였으며 자칭 황금족들은 반도경주에서만 정착한 것이 아니고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대륙과 만주 곳곳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밝다는 뜻을 가진 金이라는 뿌리말을 지켰고 한 가지가 신라(새라불, New Land/Field)를 세웠고, 통일의 전통을 이어받고자한 후금(황금족의 후예)의 누루하치는 중원을 제패했다.

물론 이 때는 이미 우스꽝스러운(북방 기마종족들의 입장에서 보면)“단일민족”으로 전락한 조선은 그들을 오랑캐라며 중국편을 들었지만, 누루하치의 신라사랑은 변함이 없었다고나 할까?

고대사 X파일 첫장면에서 나는 독자들에게 “상상력”을 강조한다. 사실 중국역사의 속을 들여다보면 “상상”을 넘어선 “공상”이 난무하고 이런 이야기들을 학계의 거두들이 마치 대단한 이론인 것처럼 내세우면 그게 곧 사실의 역사로 추인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리 역사에 이런 상상력을 내세우면 어떻게 될까?
당장 얼마전 SBS 방송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에 나온 사람들처럼 “도라이”취급을 받을 뿐이다. 물론 이 사람들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말도 못하나?

아니 아메리카에 들어온 것치고 원래 아메리카적인 것이 있었나? 중국도 마찬가지다. 거기는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유입된 사람들의 인종통합 실험장이었다. 따라서 중국종족의 것만 있었다고 한다면 웃기는 이야기다. 하다못해 그들 종족은 수시로 다른 민족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고대는 물론이고 근세의 청나라도 그렇고 1000년만 넘어가면 몽고족의 원나라가 그렇다. (5호16국시대에서 5胡가 누구인가? 북방 오랑캐 아니던가?)

고대 소아시아와 우랄산맥, 중앙아시아를 마구 휘둘러 다니던 여러 제국의 역사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이들은 “코난, 바바리언”이라는 영화의 소재이기도 하지만 고대 세계사의 수수께끼인 “스키타이”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분명 오늘 김씨 성을 가진(김알지계열을 말함. 김수로 계열은 다음에 이야기하겠음)사람들의 뿌리라고 믿는다.

바바리언, 스키타이, 야만족이라고? 아니다. 문화는 상대적인 것이고 아마 스키타이들은 말도 탈 줄 모르는채 한 곳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을 “패쇄적이고 우둔하고 느린 곰탱이들”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둘 다 맞는 말일 수 있다. 혹시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위대한 “말(言)의 문화”가 사라졌다는 자막을 보신 일이 있는가? 사라져버린 X파일을 찾는 것은 그들을 선조로 인정하는 우리들의 몫이다.

독자여러분, 제발 상상력을 죽이지 마시라. 오늘의 비참한 신세 때문에 과거를 상상할 힘을 잃는 것은 미래에 대한 꿈도 버리는 짓이다.

이 상상력만 살아있다면, 제깟 춘추사관과 식민사관을 순간에 깔아뭉갤 무궁무진한 흔적들은 아시아 전역에 살아있다.(최소한 몽고가 지배했던 영역은 스키타이들의 것이다) 때가 되면 죄다 살아나 춤을 출 것인즉, 그 때를 기대해보자!

5.환단고기에 기록이 있다.
안함로의 삼성기전 상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乙未(을미) 漢昭時(한소시)에 進據夫餘故都(진거부여고도)하여
稱國東明(칭국동명)하시니 是乃新羅故壤也(시내신라고양야)라.

을미(BC 86년)년, 한나라 소제때에 고두막한은 부여의 옛서울을 점령하여 나라를 동명이라 칭하니, 이곳은 신라의 옛 땅이다.



<내용출처:한류열풍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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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명나는 한국사(고준환 著 p.61~69)] 중간에 들어간 이미지는 첨부한 내용입니다.

 

환단고기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사료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대식민사학자들에게 개인 이익이나 떼거리 이익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의 평화세계를 향해 마음을 열어 민족국가역사를 복원할 때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그들의 주장을 유지하려면 다음 23가지 실증사례에 답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는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겠다.(여기서 [! 고구려]의 저자 허성정 씨와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의 저자 구길수 씨의 일부 학설을 받아들여 통합한 것임을 밝혀둔다.)

 

 

첫째환단고기에 단군조선 13세 흘달(屹撻) 단군 50(서기전 1733) 5성취루五星聚婁'라고 하여 5개의 별이 루성 중심으로 모이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했는데, 이것이 천문학자인 서울대 박창범교수와 라대일 박사 등에 의하여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된 것이다.

오행성 결집현상 관련 영상 vod

   

박교수는 환단고기단기고사 등에 기록된 일식 등 천문현상을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했다.

 

환단고기는 고려시대 이암이 썼고, 단기고사는 발해의 대야발이 편찬했으나, 일부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과학적 검증 없이, 삼국사기 전인 것과 후대의 조작 흔적이 있다는 것을 내세워 무조건 위서로 몰고, 외면하여 진지하게 연구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는 이를 딱하게 여기어 두 책에 기록된 5성취루, 일식 등의 현상이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었는지를 천문학적으로 연구, 검증했다.

 

박창범 교수는 특히 두 책에 모두 기록된 5성취루현상에 주목하여 추적 조사한 결과, 실제로 서기전 1734년 7월 13일 일몰 직후 금성, 목성, 토성, 화성 그리고 추가로 초승달까지 일렬지어 하늘에 나타나는 장관이 연출됐음을 확인하였다.

 

박창범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을 우연히 맞출 확률은 0.007%에 불과하며, 책의 조작 여부에 관계없이 역사적인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확인했다.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이것은 우리 민족 문화사 가운데, 상고사를 실증적 규명단계로 진입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단군조선이 민족국가로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창조했음과 더불어 환단고기의 실체를 입증한 것이라 사료된다.

 

 

둘째환단고기 등장 이전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발해 3대 문왕 대흠무의 연호가 환단고기에 대흥大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서기 1949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 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 존호를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歷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 하고 불법의 수호자로 자처한 데서 드러나, 환단고기가 사료로서 가치 있음이 과학적으로 실증되었다.

 정효공주묘 벽화(연변 화룡현 용두산) 3대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묘는 당나라 양식을 다른 것이나 석실 내부의 벽에 백회를 바르고 12명의 인물을 그린 벽화는 고구려의 전통 화법을 이은 것이다.


셋째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중국 중동부 15개 주에 대제(大齊, 평로치청)라는 큰 나라를 세우고, 4 58년간 다스린 기록이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에 처음 나오는데, 이것도 1997년 처음으로 발간된 책 <고구려를 위하여>(김병호, 하서출판), 그리고 KBS 역사스페셜 중국 속에 또 다른 고구려가 있었다, 이정기 왕국(2001.5.16)에서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

 

 

넷째강화도 마니산에 제천단 참성단이 있어 역사적으로 각 왕조마다 해마다 천제를 지내온 바, 그 첫 기록이 환단고기 단군세기 단군왕검 무오 51(BC 2282)에 쌓았다는 것이 나온다. 마니산 참성단은 지금도 의연히 그 자태를 빛내고 있으며, 서울올림픽, 월드컵축구와 전국체전 성화채취의 기본성지가 되고 있다. 강화도에서는 이 밖에도 고조선 유물로 정족산성과 고인돌 127기가 있다.

 

 

다섯째는 단군조선의 실재를 보여 주는 것으로, 평양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에서 단군릉이 1993년 발굴되었다. 여기에서는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북한은 단군릉을 거대하게 개건하여 성역화하였다. 그리고 1926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모금운동을 하여 평양 강동현 단군릉을 보수하고 헤마다 제사를 올린 바도 있다.

 

 

여섯째,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 노온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고구려 불상에는 건흥오년세재병진建興五年歲在丙辰 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때 백제 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임자년인 412년에 사망하게 된다.

즉위년 칭원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삼아 본다. 그러면 장수왕 즉위 5년은 병진년이다. 따라서 병진년 불상 광배병과 <택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 대의 연호라는 새로운 지견을 추가할 수 있게 된다.

 

 

일곱째는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태조太祚,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연개 소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한 어떠한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의 묘지에서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자유로 명기하고 있어서 <태백일사>의 진가가 드러나게 되었다.

 

 

여덟 번째는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현재 태국에 있는 아유타국과 백제 상인이 교역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는 지역적 근접성으로 보아 백제가 현대의 캄보디아인 부남국扶南國과 교역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뒷받침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백제 해외경영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아홉 번째는 실증사학을 내세운 사대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 박사가 과거에는 단군을 신화로 몰다가, 친구인 재야사학자 최태영 박사와 국사 찾기협의회원들(김세환, 박창암 씨 등)의 우정 있는 충고를 받아들여 참회하고, 단군은 실존의 우리 국조이며, 역대왕조가 단군제사를 지내왔으나 일제 때 끊겼고, 삼국사기 이전의 환단고기 등 고기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고 1986년 10월 9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에 쓴 사실이다.

단군조선의 사실과 환단고기를 믿으라고 쓴 것이다.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그들 태두의 말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열 번째는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실증적 입장에서 깊이 연구하여 6하 원칙에 입각하여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위조했는지 명백히 제시해야 하는데, 이를 제시한 사람이 현재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열한 번째는 갑골문의 귀방이다.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도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유물,유적이 발견되었다. BC 1291년 단군조선 제21대 소태단군 재위 때 은나라 왕무정이 귀방을 쳤다는 기록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남아 있는데, 과연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는 은나라의 귀방 정복 사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환단고기는 이토록 확실한 역사적 근거와 고고학적 근거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열두 번째는 비파형동검이다. 단군조선의 비파형동검은 단군조선이 지나와 구별되는 선진 청동문화를 가진 정치세력 집단이었음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적,유물이다. 이 정치집단의 분포도는 환단고기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와 역사적 강역이 너무도 일치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비파형동검의 분포지는 만주, 한반도, 중국대륙의 동편으로 환단고기가 설명하고 있는 역사 강역과 완전히 일치하며 그 연대도 완전히 일치한다.


열세 번째는 고인돌 유적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가 설명하고 있는 고인돌에 대한 기록 또한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을 유적유물로 뒷받침하는 단군조선의 실증적 증거물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서는 배달국 신시시대의 장묘문화부터 고인돌 시대 장묘문화와 삼국시대의 장묘문화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이와 같이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실상을 연대기와 역사기록과 역사 강역을 정확히 표시하고 있는 아시아의 대표적 역사서이다.

 

 

열네 번째는 하북성 중산의 천자명문이다. 하북성 중산묘에서 BC 10세기 것으로 보이는 청동도기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천자건방중산후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핵심강역인 서요하 지역에서 출토된 BC 22세기의 도자기 부호와 양식이 완전히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BC 22세기부터 BC 10세기까지 북경과 하북성 일대를 다스린 것은 단군조선의 천자였음을 기록한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지나인들이 최초로 천자(황제)를 참칭한 것은 BC 221년의 진시황이었다.

 

 

열다섯 번째는 요녕성의 번한 명문이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환단고기가 기록하고 있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번한(번조선)의 명문이 나타나 환단고기의 사실성을 증명하고 있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番汗(번한)을 나타내는 番汗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은 도장이 발견된 것이다. 단군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진한(요하지역)과 번한(황하/하북성)과 마한(한반도/만주)등의 삼한(삼조선)으로 나누어 다스렸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유물,유적이 출토된 것이다.

 

 

열여섯 번째는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나사대 지역에서는 환웅과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의 곰녀를 상징하는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 출토되었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흥산유적지에서는 갑골문의 초기형태가 발견되어 은나라의 갑골문이 홍산문화 담당자들에 의해 전해졌음을 밝히고 있다. 이 흥산문화와 나사대 문화는 대체적으로 배달국 시대(BC 3898년과 BC 2333년 사이)와 일치하고 있다.

 

 

열일곱 번째는 배달국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 이다. 환단고기에는 BC 3898 18분의 황웅 중 배달국을 건국한 제1세 거발환 환웅께서 신지에게 녹도문을 창안할 것을 명하고, 배달국의 역사기록을 담당시킨다. 그러데 이 녹도문이 한국의 평양에서도 발견되었고, 산동성의 창성조적비에서도 발견되었다. 평양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의 글씨는 모양과 형태가 배달국의 녹도문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이 이렇게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열본 구주신가의 가림토문 비석이나 이세신궁의 가림토문 청동거울은 한글 비석과 한글 청동거울이라 명명하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완벽한 가림토문이다. 또 스리랑카 패엽경사 발위글과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역시 그 형태와 내용이 한글(가림토문)과 흡사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열아홉 번째는 요하는 압록이고 난하는 요하란 것이다. 환단고기 택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 이고, 지금의 요하가 압록 이고, 지금의 나하가 요수(요하) 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란 사실은 중국 요사지리지와 삼국유사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나하가 요수임은 서토의 고지도 지리도 연산도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에도 나타나 있다. 환단고기가 얼마나 정확한 기록을 반영한 역사서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스무 번째는 낙랑군과 낙랑국이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는 낙랑군과 낙랑 국에 대한 근거를 가장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낙랑이란 지명이 나타나는 것은  BC 1767년 제13세 흘달단군, BC 1237년 제23세 아흘단군, 그리고 BC 195년에는 낙락왕 최승이 보물을 싣고 마한의 서울 왕검성으로 가는 장면이 적혀 있다. 이때부터 하북성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이 구분되어 나타난다. 환단고기는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스물한 번째는 단군조선 12세 아한단군 때 가림토로 추정되는 순수관경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겼다는 내용이 환단고기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에 나오는데, 엄청난 시차를 두고 사항을 기록함에 위작을 했을 리 없는 것이다.

단기고사에는 아한단군과 유위자 선인의 먼 국가장래에 관한 대화 속에 사방국경에 제왕의 명호를 본국의 문자로 비석에 새겨 국문을 영원히 보전케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아한단군 52(BC 1833) 4월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났다. 8월 천제께서 나라 안을 순시하시고 요하 좌측에 이르러 관경순수비를 세웠는데, 여기에 역대 제왕의 명호를 새겼는데 이것이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스물두 번째는 환단고기에 원형 한글을 같은 의미로 가림토加臨土와 가림다加臨多라고 하는 표현이 있는데 단군세기의 가림토나 태백일사의 가림다는 각기 다르게 전해져 오는 기록들 가운데 이암은 가림토(행촌,단군세기)를 이맥은 가림다(십일당 주인, 태백일사 소도경전 본훈)라는 표현을 참고한 것이다.

가림토는 가림(분별)하는 토대 즉 땅이라는 의미로 그 뜻을 택해 토()를 썼고, 가림다는 가림하는다(,)라고 다를 썼으나 같은 뜻이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한가지로 표현했을 것이다.

 

 

스물세 번째는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제4 마한세기 상의 소도蘇塗가 세워지는 곳마다 산상웅상山像雄常을 보게 되었다.는 표현에 비밀이 숨어 있다.

이맥 선생이나, 안호상 박사, 환단고기를 번역한 임승국 교수도 뜻을 잘 몰랐는데, 구길수 선생이 최치원의 천부경 81자는 본 천부경 16(하나,,,,다섯,여섯,일곱,여덟,아홉,)을 풀어낸 시첩이라는 비밀을 풀어내면서, 남근상이 모셔진 소도라 풀어 산상웅상이 남근이라는 것을 밝혔다.

소도는 솟다에서 와서 솟터 솟토 소토 소도나 솟대가 되었고, 소도에 솟은 것은 처음에는 박달나무로 된 환웅상인데 그것이 여음(돌무더기로 표현)에 삽입된 남근상(힌두교의 시바 링가)이 솟아 있다는 것이다.

이는 환단고기를 쓴 이가 전해지는 말이나 책의 내용을 자신도 이해하지 못해 원저본을 그대로 썼던 것이므로,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는 한 증거이다.
 

[출처: 신명나는 한국사(고준환 著 p.61~69)]



<내용출처:한류열풍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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