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은 한민족의 순수한 정신맥을 이어받고, 고구려 말의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초연히 일어선 당대 동북아 희대의 대영걸(大英傑)이었다. 피끓는 마음으로 응원하는 붉은 악마의 열정을 그의 이름에서 느낄 수 있다. 붉은 악마는 축구에서 승리하기 위함이었으나, 연개소문의 열정은 민족을 구하기 위한 길이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말, 살아있는 고구려의 정신이었다. 고구려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망해가는 민족정신의 맥에 불씨를 띄워올려 백전백승의 전과를 이뤄냈으니, 그를 따를자 아무도 없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두 영웅, 연개소문과 당 태종 이세민의 충돌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무릇 고구려와 당은 피차 강약을 다투는 양립할 수 없는 나라요, 연개소문과 당 태종은 서로의 우열을 겨루는 양립할 수 없는 인물이니, 이 같은 두 인물이 두 나라의 정권을 잡았으니 양국 전쟁의 폭발은 조만간 필연적인 사실이라.’

당 태종은 처음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한 것을 빌미로 고구려를 침공하려다 장손무기의 충고를 받아들여 침공을 연기했다. 그 후 고구려가 신라 사신의 당나라 조공을 막고 있다는 말을 듣고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 협박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일축했다. 태종은 다시 장엄(莊儼)을 보내 최후통첩을 했으나 연개소문은 오히려 사신을 토굴에 가두었다. 이로써 양국의 외교적 타협은 결렬된 것이다.

연개소문은 일전도 불사한다는 정신으로 당의 협박을 무시하고, 사신을 토굴에 가둔 것이다. 당의 위세에 벌벌 떨었던 고성제(영류왕)에 비하면, 연개소문은 당을 그렇게 볼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문화의 자존심이었으며, 고구려의 역사성에 대한 자부심이었으며, 고구려민의 우수함에 대한 우월성에 대한 믿음이었을 것이다.

당 태종은 고구려 보장제 3년(644) 11월 원정 명령을 내린다. 정벌의 명분은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응징하고 백성을 구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가 베껴 쓴 이러한 내용은 구당서, 신당서에 있는 것으로 당태종 자신의 얼굴을 더럽힐 뿐이다. 제 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당태종이란 작자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천자를 참칭하는 자가 어떻게 얼굴빛을 붉히지도 않고 양심에 털난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병법의 달인, 연개소문

당태종은 당의 위세가 커지가 고구려를 우습게 본 나머지, 휘하 장수 이정의 충고도 무시한다. 태종이 출병하기 전에 이정(李靖)을 행군대총관으로 삼으려고 하자 이정은 “제가 일찍이 태원(太原)에 있을 때 연개소문을 만나 병법을 배워 그 뒤로 폐하를 도와 천하를 평정함이 다 그 병법의 힘을 입었음인즉, 오늘날 신이 어찌 감히 전날에 사사하던 개소문을 치리까”라고 사양했다는 것이다. 스승에 대한 기본 예법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이다.

태종이 “개소문의 병법이 과연 옛 사람의 누구와 견주겠느냐”라고 묻자 이 정은 “옛 사람은 알 수 없으나 오늘날 폐하의 모든 장수 가운데에는 적수가 없고, 비록 천위(天威)로 임(臨)하실지라도 가히 승리하기 어려울까 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천위, 하늘의 위엄! 천자를 자칭하는 당태종에게는 자손심을 거스르는 소리다.

이에 태종이 “중국의 거대함과 인민의 수로나 병력의 강함으로 어찌 일개 개소문을 두려워하랴”라고 불쾌해하자 이 정은 “연개소문이 비록 1인이나 재주와 지략이 만인에 뛰어난즉 어찌 두렵지 아니하리까”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정은 돌궐렴岳瀁?吐谷渾)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유능한 사령관이었다. 중국 능연각(凌煙閣)에 초상화가 걸린 24공신의 한사람이며, 이적(李勣)과 함께 2대 명장이다. 그가 저술한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당대 최고의 병법서로 알려져 있다. 단재는 이 병법서와 관련해 노상운(盧象雲) 선생이라는 노인의 구전(口傳)을 ‘조선상고사’에 소개하고 있다.

“연개소문은 자(字)가 금해(金海)이니 병법이 고금에 뛰어난 바 그가 저술한 ‘금해병서’(金海兵書)가 있는데 고려 때도 임금께서 늘 각 방면의 병마절도사에게 그 부임 시에 한 벌씩을 하사했다. 지금은 그 병서가 전해지지 않거니와 연개소문이 그 병법으로 당나라 이 정을 가르쳐 이 정이 당의 최고 명장이 되었다. 그 이 정이 저술한 ‘이위공병법’은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로 치는 바, ‘이위공병법’의 원본에는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운 이야기를 자세히 썼다. 그 뿐 아니라 연개소문을 숭앙(崇仰)한 어구가 많으므로 당렐?때 사람들이 연개소문과 같은 외국인에게 병법을 사사해 명장이 됨은 실로 중국의 큰 수치라고 하여 드디어 그 병법서를 모두 없애 버렸다. 오늘날 유행하는 ‘이위공병서’는 후인의 위작인 고로, 이는 원본이 아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당 최고의 명장을 키워낸 병법의 달인이 연개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연개소문이 제자를 허투로 키워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승도 몰라보고 배신할 제자를 키워내지는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당의 명장이 될 것을 짐작하고서도, 비법을 전수한 것은 그의 인격을 믿기 때문이다. 단순히 병법의 전수가 아니고, 세상을 도와 다스리는 도법(道法), 그리고 심법(心法) 전수의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병법이라는 것은 인간의 정신 세계의 본질, 구조를 꿰뚫어보고 전쟁에서 군사를 움직여 최소한의 희생을 자국과 타국이 함께 이기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의선인 연개소문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그 병법을 어떻게 배웠을까? 규원사화에는 그가 봉황산에서의 10년 수도 끝에 도를 통하여, 만고에 뛰어난 호걸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신라의 명장, 김유신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관직에 있어서는 또한 대선(大仙), 국선(國仙), 조의(皂衣) 등의 명칭이 있었으니, 동명성왕에 이르러서는 조천석(朝天石)이 있었고,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일찍이 조의(皂衣)의 직책을 맡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연개소문은 봉황산에 들어가 십년을 수련한 뒤 마침내 만고에 뛰어난 호걸이 되었으며, 김유신은 중악의 바윗굴에 들어가 십년을 수도한 뒤 결국에는 명장이 되어 태종을 도와 나라를 강성함에 이르게 하였다.

연개소문은 한명의 조의선인(皁衣仙人)으로서 민족의 국통을 지키기 위해서 어려서부터 모든 노력을 기울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조의선인은 신라의 화랑과 비교할 수 있는 고구려의 낭가(郎家) 제도이다. 검은 옷을 입었기 때문에 조의라고 부르는데, 평소에는 무예를 닦고 수도를 하고 국가종교인 환인,환웅,단군의 삼성조를 모시는 신교(神敎)로서 백성을 계도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신교란 이들은 삼신상제님 신앙을 바탕으로 천지의 성신(聖神)과 하나되어, 세상의 모든 성신을 성스럽게 받든다. 성신에는 자신의 조상신도 포함되어 있다. 국조삼신은 민족과 국가의 기틀로서 어찌 중요하게 받들지 않았을 것인가? 즉 조의선인은 민족과 진리를 수호하는 것을 지상 목적으로 한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으로, 한민족 역사 개창의 주역들이었다. 특히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앞서서 나라를 구한 용사들이었다. 수의 130만 대군을 격파한 이들도 고구려의 조의선인 20만이었다. 이들은 신교의 종교정신으로 무장한 군대였던 것이다.

백성들이 조의선인으로 선발되면 왕의 사자와도 같은 자랑으로 여겼으며, 이들이 전쟁터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면 대중의 조소를 받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용감히 싸웠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우리 역사의 기둥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조의선인은 제가 혼자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나라에서 임명함으로써 될 수 있는 자리다. 태백일사에서는 그가 불과 9살에 조의선인으로 ‘선발’되었다고 하면서 그의 인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의표(儀表)가 웅위(雄偉)하고 의기가 호협하여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어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었다. 상을 줄 때는 반드시 고루 나누어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해 주었으며, 자기의 처지를 미루어 남의 심정을 뱃속에 갈머두는 아량을 가졌다. … 한번 기쁨을 나타내면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들도 가까이 할 수 있었고,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자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아울러 태백일사에서는 멸망위기에 처한 고구려를 구하기 위해 초개와 같은 굳은 신념으로 고구려 백성을 이끌어 당과의 전쟁을 치룬 연개소문에 대해서 많은 양을 할해하여 서술하고 있다.

태백일사가 그리는 한 인간의 모습은 진정한 영웅의 모습이다. 단재는 연개소문이 조의선인의 우두머리로서 모든 조의선인들로부터 숭모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민족을 구한 의기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연개소문은 역적이라 한다. 물론 쿠데타를 통해 나라의 국왕을 폐위하고 새 황제를 옹립하였으니 잘못되었다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일어선 것은 당대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연개소문만 나무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연개소문에 의해 폐위된 영류왕 고성제는 을지문덕과 함께 수와 맞처 고구려를 지킨 명장이었다. 을지문덕이 살수대첩의 승리와 함께 중국 본토를 치자고 주장했던 강성파였다면, 고성은 당과의 화친을 주장한 온건파였다. 그런데 고성제가 보장제의 위를 이어 열제의 위에 오르자, 화친을 넘어서 역사의 전통을 중히 여기는 고구려인이라면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굴욕적인 외교를 펼친다.

그는 만여 명의 중국인 포로의 귀환시키고 중국 역서(曆書)를 반포했으며 중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고, 천리장성의 축조하여 전쟁에 대비했다. 고성제가 중국의 요청이라면 모든 것을 들어줄 자세가 되어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중국과 평화정책을 유지하는 한 적어도 중국이 고구려를 침략하지는 않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급기야 고성제 11년(628)에는 고구려의 일급비밀이라 볼 수 있는 전 영토의 지도인 봉역도(封域圖)를 당에 보내자 고구려의 강성파들는 모두 분개했다. 전통적으로 고구려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중국과 전투하였는데 고구려의 지도를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를 침투할 수 있는 길을 알려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설상가상으로 631년에는 당의 사신의 요청에 따라 평양의 경관(京觀)을 허물어 버렸다. 경관은 수나라와의 전쟁 때의 전몰장병의 유해를 묻은 기념묘지․탑과 같은 것으로 고구려인의 자부심이 담긴 성역이다.

고성제는 당에 사신을 보내 노자상(老子像)을 구하여 오게 하여 백성들에게 노자 도덕경을 청강하게 하고 수십만의 백성을 동원하여 장성을 축조하게 했다. 당태종은 도교를 장려했는데, 그 이유는 노자의 성(姓)이 당태종의 성씨와 같은 이(李) 씨란 것때문이었다. 고구려가 도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당의 정신세계에 스스로 동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민족의 기틀을 생각하고, 역사의 혼을 생각하는 자라면 누구도 좌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의 명을 거역하기는 힘들었다. 이에 연개소문이 도교 강론을 파하도록 하고 장성 부역을 그만두도록 간언하자 황제는 그를 죽이려 하였다.

“문 앞에 맹수가 가까이 오는데, 이를 막지 않으면서 도리어 나를 죽이려 하는가?”

태백일사에서는 이렇게 연개소문의 내심을 정리하고 있다. “문 앞에 맹수가 가까이 오는데”. 이 말은 고구려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를 막지 못하면서”라는 말에서 고성제는 이 위기를 막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 생각해보면, 고성제도 고구려의 위기를 막기 위해서 당과 친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것은 위기를 막는데 역부족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연개소문의 입장에서는 위기를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키우는 것이었을 것이다.

연개소문뿐만 아니라, 당대의 조의선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조의선인은 뜨거운 혈심으로서 국가보전과 국통수호에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연개소문이 고성제를 폐위했다는 것은, 연개소문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대당온건파에 대한 대당강경파에 의한 반정(反政)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이 황제를 잔인하게 살해했다하나 태백일사에는 몰래 송양(松壤)으로 피신한 황제에 백성들이 동조하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붕어했다고 한다.


우리를 향해 부르짖는 연개소문

연개소문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한민족이야 말로 위기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많이 둔감하지만 말이다.

지난 100년간 우리 민족은 무수한 고통을 겪었다. 일제의 강점에 의해서 전국토가 일본에 빼앗겨서 고통을 겪었고, 이후에는 국토가 둘로 쪼개지고 형제끼리 총칼을 맞대고 싸운 고통을 겪었고, 이후에는 가난과 무지에서 고통을 겪었다. 80년대까지는 민주화가 덜 되어서 독재정권의 밑에서 숨도 함부로 쉬지 못하고 살았다. 90년대에 와서는 놀랍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 젊은이들의 대다수는 그러한 고통이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리려는 위기에 처해있다.

작금의 십여 년의 시간은 누가 뭐래도 인류 역사 이래 가장 살기 좋은 때라 할 것이다. 과학문명이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정신세계의 풍요로움보다 육체적인 편안함을 추구하고, 생명을 소비하여 쾌락을 추구하는 문화로 가는 시대정신의 숨결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대세를 맨손으로 부여잡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 모두 위기의식은 공유를 해야 하지 않는가 싶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마음이 너그러운 한민족은 타국을 침략한 역사도 없다. 우리의 위기는 사실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또 외부에서 들어온 위기에 대처를 하지 않은 우리 자신 탓이기도 할 것이다. 한민족의 평화의 민족이다. 그래서 국민의 대다수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쟁이 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안정과 불안정은 항상 반복된다. 그것은 판의 문제이다. 판이 튼튼하거나 판들 간의 힘이 균형을 유지하면 안정된다. 판이 약해지거나 무너지면 역사의 지진이 일어난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실 한반도는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나라의 높은 분들은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지만 말이다. 전쟁의 위협에 의해서 정권을 유지했던 과거 군사정권과 지금은 다르지 않는가? 불과 10년 전에만 해도 드러나지 않던 전쟁위기의 물결은 지금 엄청난 속도로 한반도에 몰려오고 있다.

- 중국의 경제적인 비약적인 성장
- 북한의 붕괴에 대비한 중국의 역사 왜곡.
- 일본의 군사대국화.
- 석유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
- 기독교와 이슬람, 그리고 유대교.... 종교 간의 갈등.

불과 몇 년전만해도 관심밖에 있던 키워드들이 오늘날 부각되고 있다. 마치 1929년 세계대공황의 경제위기가 2차대전을 일으켰던 것처럼, 지금 미소 양대 산맥이 해체되면서 10여년 만에 각국의 세력이 돌출하면서 새로운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 민족은 갈 곳을 모르고 표류하고 있다. “동아시아 균형자”가 될 것인가? “낙동강 오리알”이 될 것인가? 문제는 위기의식을 공유하지 않는 일반 시민들의 안전불감증이다.

연개소문은 다시 우리를 향해 부르짖는다.

“문 앞에 맹수가 가까이 오는데, 왜 이에 대처하지 않는가?”

http://blog.daum.net/damulkan (블로그), damulkan@hanmail.net (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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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출처:한류열풍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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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명나는 한국사(고준환 著 p.61~69)] 중간에 들어간 이미지는 첨부한 내용입니다.

 

환단고기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사료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대식민사학자들에게 개인 이익이나 떼거리 이익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의 평화세계를 향해 마음을 열어 민족국가역사를 복원할 때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그들의 주장을 유지하려면 다음 23가지 실증사례에 답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는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겠다.(여기서 [! 고구려]의 저자 허성정 씨와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의 저자 구길수 씨의 일부 학설을 받아들여 통합한 것임을 밝혀둔다.)

 

 

첫째환단고기에 단군조선 13세 흘달(屹撻) 단군 50(서기전 1733) 5성취루五星聚婁'라고 하여 5개의 별이 루성 중심으로 모이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했는데, 이것이 천문학자인 서울대 박창범교수와 라대일 박사 등에 의하여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된 것이다.

오행성 결집현상 관련 영상 vod

   

박교수는 환단고기단기고사 등에 기록된 일식 등 천문현상을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했다.

 

환단고기는 고려시대 이암이 썼고, 단기고사는 발해의 대야발이 편찬했으나, 일부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과학적 검증 없이, 삼국사기 전인 것과 후대의 조작 흔적이 있다는 것을 내세워 무조건 위서로 몰고, 외면하여 진지하게 연구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는 이를 딱하게 여기어 두 책에 기록된 5성취루, 일식 등의 현상이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었는지를 천문학적으로 연구, 검증했다.

 

박창범 교수는 특히 두 책에 모두 기록된 5성취루현상에 주목하여 추적 조사한 결과, 실제로 서기전 1734년 7월 13일 일몰 직후 금성, 목성, 토성, 화성 그리고 추가로 초승달까지 일렬지어 하늘에 나타나는 장관이 연출됐음을 확인하였다.

 

박창범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을 우연히 맞출 확률은 0.007%에 불과하며, 책의 조작 여부에 관계없이 역사적인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확인했다.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이것은 우리 민족 문화사 가운데, 상고사를 실증적 규명단계로 진입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단군조선이 민족국가로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창조했음과 더불어 환단고기의 실체를 입증한 것이라 사료된다.

 

 

둘째환단고기 등장 이전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발해 3대 문왕 대흠무의 연호가 환단고기에 대흥大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서기 1949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 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 존호를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歷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 하고 불법의 수호자로 자처한 데서 드러나, 환단고기가 사료로서 가치 있음이 과학적으로 실증되었다.

 정효공주묘 벽화(연변 화룡현 용두산) 3대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묘는 당나라 양식을 다른 것이나 석실 내부의 벽에 백회를 바르고 12명의 인물을 그린 벽화는 고구려의 전통 화법을 이은 것이다.


셋째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중국 중동부 15개 주에 대제(大齊, 평로치청)라는 큰 나라를 세우고, 4 58년간 다스린 기록이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에 처음 나오는데, 이것도 1997년 처음으로 발간된 책 <고구려를 위하여>(김병호, 하서출판), 그리고 KBS 역사스페셜 중국 속에 또 다른 고구려가 있었다, 이정기 왕국(2001.5.16)에서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

 

 

넷째강화도 마니산에 제천단 참성단이 있어 역사적으로 각 왕조마다 해마다 천제를 지내온 바, 그 첫 기록이 환단고기 단군세기 단군왕검 무오 51(BC 2282)에 쌓았다는 것이 나온다. 마니산 참성단은 지금도 의연히 그 자태를 빛내고 있으며, 서울올림픽, 월드컵축구와 전국체전 성화채취의 기본성지가 되고 있다. 강화도에서는 이 밖에도 고조선 유물로 정족산성과 고인돌 127기가 있다.

 

 

다섯째는 단군조선의 실재를 보여 주는 것으로, 평양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에서 단군릉이 1993년 발굴되었다. 여기에서는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북한은 단군릉을 거대하게 개건하여 성역화하였다. 그리고 1926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모금운동을 하여 평양 강동현 단군릉을 보수하고 헤마다 제사를 올린 바도 있다.

 

 

여섯째,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 노온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고구려 불상에는 건흥오년세재병진建興五年歲在丙辰 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때 백제 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임자년인 412년에 사망하게 된다.

즉위년 칭원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삼아 본다. 그러면 장수왕 즉위 5년은 병진년이다. 따라서 병진년 불상 광배병과 <택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 대의 연호라는 새로운 지견을 추가할 수 있게 된다.

 

 

일곱째는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태조太祚,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연개 소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한 어떠한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의 묘지에서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자유로 명기하고 있어서 <태백일사>의 진가가 드러나게 되었다.

 

 

여덟 번째는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현재 태국에 있는 아유타국과 백제 상인이 교역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는 지역적 근접성으로 보아 백제가 현대의 캄보디아인 부남국扶南國과 교역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뒷받침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백제 해외경영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아홉 번째는 실증사학을 내세운 사대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 박사가 과거에는 단군을 신화로 몰다가, 친구인 재야사학자 최태영 박사와 국사 찾기협의회원들(김세환, 박창암 씨 등)의 우정 있는 충고를 받아들여 참회하고, 단군은 실존의 우리 국조이며, 역대왕조가 단군제사를 지내왔으나 일제 때 끊겼고, 삼국사기 이전의 환단고기 등 고기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고 1986년 10월 9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에 쓴 사실이다.

단군조선의 사실과 환단고기를 믿으라고 쓴 것이다.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그들 태두의 말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열 번째는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실증적 입장에서 깊이 연구하여 6하 원칙에 입각하여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위조했는지 명백히 제시해야 하는데, 이를 제시한 사람이 현재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열한 번째는 갑골문의 귀방이다.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도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유물,유적이 발견되었다. BC 1291년 단군조선 제21대 소태단군 재위 때 은나라 왕무정이 귀방을 쳤다는 기록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남아 있는데, 과연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는 은나라의 귀방 정복 사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환단고기는 이토록 확실한 역사적 근거와 고고학적 근거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열두 번째는 비파형동검이다. 단군조선의 비파형동검은 단군조선이 지나와 구별되는 선진 청동문화를 가진 정치세력 집단이었음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적,유물이다. 이 정치집단의 분포도는 환단고기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와 역사적 강역이 너무도 일치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비파형동검의 분포지는 만주, 한반도, 중국대륙의 동편으로 환단고기가 설명하고 있는 역사 강역과 완전히 일치하며 그 연대도 완전히 일치한다.


열세 번째는 고인돌 유적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가 설명하고 있는 고인돌에 대한 기록 또한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을 유적유물로 뒷받침하는 단군조선의 실증적 증거물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서는 배달국 신시시대의 장묘문화부터 고인돌 시대 장묘문화와 삼국시대의 장묘문화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이와 같이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실상을 연대기와 역사기록과 역사 강역을 정확히 표시하고 있는 아시아의 대표적 역사서이다.

 

 

열네 번째는 하북성 중산의 천자명문이다. 하북성 중산묘에서 BC 10세기 것으로 보이는 청동도기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천자건방중산후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핵심강역인 서요하 지역에서 출토된 BC 22세기의 도자기 부호와 양식이 완전히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BC 22세기부터 BC 10세기까지 북경과 하북성 일대를 다스린 것은 단군조선의 천자였음을 기록한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지나인들이 최초로 천자(황제)를 참칭한 것은 BC 221년의 진시황이었다.

 

 

열다섯 번째는 요녕성의 번한 명문이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환단고기가 기록하고 있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번한(번조선)의 명문이 나타나 환단고기의 사실성을 증명하고 있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番汗(번한)을 나타내는 番汗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은 도장이 발견된 것이다. 단군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진한(요하지역)과 번한(황하/하북성)과 마한(한반도/만주)등의 삼한(삼조선)으로 나누어 다스렸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유물,유적이 출토된 것이다.

 

 

열여섯 번째는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나사대 지역에서는 환웅과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의 곰녀를 상징하는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 출토되었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흥산유적지에서는 갑골문의 초기형태가 발견되어 은나라의 갑골문이 홍산문화 담당자들에 의해 전해졌음을 밝히고 있다. 이 흥산문화와 나사대 문화는 대체적으로 배달국 시대(BC 3898년과 BC 2333년 사이)와 일치하고 있다.

 

 

열일곱 번째는 배달국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 이다. 환단고기에는 BC 3898 18분의 황웅 중 배달국을 건국한 제1세 거발환 환웅께서 신지에게 녹도문을 창안할 것을 명하고, 배달국의 역사기록을 담당시킨다. 그러데 이 녹도문이 한국의 평양에서도 발견되었고, 산동성의 창성조적비에서도 발견되었다. 평양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의 글씨는 모양과 형태가 배달국의 녹도문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이 이렇게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열본 구주신가의 가림토문 비석이나 이세신궁의 가림토문 청동거울은 한글 비석과 한글 청동거울이라 명명하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완벽한 가림토문이다. 또 스리랑카 패엽경사 발위글과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역시 그 형태와 내용이 한글(가림토문)과 흡사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열아홉 번째는 요하는 압록이고 난하는 요하란 것이다. 환단고기 택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 이고, 지금의 요하가 압록 이고, 지금의 나하가 요수(요하) 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란 사실은 중국 요사지리지와 삼국유사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나하가 요수임은 서토의 고지도 지리도 연산도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에도 나타나 있다. 환단고기가 얼마나 정확한 기록을 반영한 역사서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스무 번째는 낙랑군과 낙랑국이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는 낙랑군과 낙랑 국에 대한 근거를 가장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낙랑이란 지명이 나타나는 것은  BC 1767년 제13세 흘달단군, BC 1237년 제23세 아흘단군, 그리고 BC 195년에는 낙락왕 최승이 보물을 싣고 마한의 서울 왕검성으로 가는 장면이 적혀 있다. 이때부터 하북성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이 구분되어 나타난다. 환단고기는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스물한 번째는 단군조선 12세 아한단군 때 가림토로 추정되는 순수관경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겼다는 내용이 환단고기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에 나오는데, 엄청난 시차를 두고 사항을 기록함에 위작을 했을 리 없는 것이다.

단기고사에는 아한단군과 유위자 선인의 먼 국가장래에 관한 대화 속에 사방국경에 제왕의 명호를 본국의 문자로 비석에 새겨 국문을 영원히 보전케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아한단군 52(BC 1833) 4월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났다. 8월 천제께서 나라 안을 순시하시고 요하 좌측에 이르러 관경순수비를 세웠는데, 여기에 역대 제왕의 명호를 새겼는데 이것이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스물두 번째는 환단고기에 원형 한글을 같은 의미로 가림토加臨土와 가림다加臨多라고 하는 표현이 있는데 단군세기의 가림토나 태백일사의 가림다는 각기 다르게 전해져 오는 기록들 가운데 이암은 가림토(행촌,단군세기)를 이맥은 가림다(십일당 주인, 태백일사 소도경전 본훈)라는 표현을 참고한 것이다.

가림토는 가림(분별)하는 토대 즉 땅이라는 의미로 그 뜻을 택해 토()를 썼고, 가림다는 가림하는다(,)라고 다를 썼으나 같은 뜻이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한가지로 표현했을 것이다.

 

 

스물세 번째는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제4 마한세기 상의 소도蘇塗가 세워지는 곳마다 산상웅상山像雄常을 보게 되었다.는 표현에 비밀이 숨어 있다.

이맥 선생이나, 안호상 박사, 환단고기를 번역한 임승국 교수도 뜻을 잘 몰랐는데, 구길수 선생이 최치원의 천부경 81자는 본 천부경 16(하나,,,,다섯,여섯,일곱,여덟,아홉,)을 풀어낸 시첩이라는 비밀을 풀어내면서, 남근상이 모셔진 소도라 풀어 산상웅상이 남근이라는 것을 밝혔다.

소도는 솟다에서 와서 솟터 솟토 소토 소도나 솟대가 되었고, 소도에 솟은 것은 처음에는 박달나무로 된 환웅상인데 그것이 여음(돌무더기로 표현)에 삽입된 남근상(힌두교의 시바 링가)이 솟아 있다는 것이다.

이는 환단고기를 쓴 이가 전해지는 말이나 책의 내용을 자신도 이해하지 못해 원저본을 그대로 썼던 것이므로,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는 한 증거이다.
 

[출처: 신명나는 한국사(고준환 著 p.61~69)]



<내용출처:한류열풍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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