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은 한민족의 순수한 정신맥을 이어받고, 고구려 말의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초연히 일어선 당대 동북아 희대의 대영걸(大英傑)이었다. 피끓는 마음으로 응원하는 붉은 악마의 열정을 그의 이름에서 느낄 수 있다. 붉은 악마는 축구에서 승리하기 위함이었으나, 연개소문의 열정은 민족을 구하기 위한 길이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말, 살아있는 고구려의 정신이었다. 고구려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망해가는 민족정신의 맥에 불씨를 띄워올려 백전백승의 전과를 이뤄냈으니, 그를 따를자 아무도 없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두 영웅, 연개소문과 당 태종 이세민의 충돌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무릇 고구려와 당은 피차 강약을 다투는 양립할 수 없는 나라요, 연개소문과 당 태종은 서로의 우열을 겨루는 양립할 수 없는 인물이니, 이 같은 두 인물이 두 나라의 정권을 잡았으니 양국 전쟁의 폭발은 조만간 필연적인 사실이라.’

당 태종은 처음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한 것을 빌미로 고구려를 침공하려다 장손무기의 충고를 받아들여 침공을 연기했다. 그 후 고구려가 신라 사신의 당나라 조공을 막고 있다는 말을 듣고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 협박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일축했다. 태종은 다시 장엄(莊儼)을 보내 최후통첩을 했으나 연개소문은 오히려 사신을 토굴에 가두었다. 이로써 양국의 외교적 타협은 결렬된 것이다.

연개소문은 일전도 불사한다는 정신으로 당의 협박을 무시하고, 사신을 토굴에 가둔 것이다. 당의 위세에 벌벌 떨었던 고성제(영류왕)에 비하면, 연개소문은 당을 그렇게 볼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문화의 자존심이었으며, 고구려의 역사성에 대한 자부심이었으며, 고구려민의 우수함에 대한 우월성에 대한 믿음이었을 것이다.

당 태종은 고구려 보장제 3년(644) 11월 원정 명령을 내린다. 정벌의 명분은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응징하고 백성을 구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가 베껴 쓴 이러한 내용은 구당서, 신당서에 있는 것으로 당태종 자신의 얼굴을 더럽힐 뿐이다. 제 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당태종이란 작자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천자를 참칭하는 자가 어떻게 얼굴빛을 붉히지도 않고 양심에 털난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병법의 달인, 연개소문

당태종은 당의 위세가 커지가 고구려를 우습게 본 나머지, 휘하 장수 이정의 충고도 무시한다. 태종이 출병하기 전에 이정(李靖)을 행군대총관으로 삼으려고 하자 이정은 “제가 일찍이 태원(太原)에 있을 때 연개소문을 만나 병법을 배워 그 뒤로 폐하를 도와 천하를 평정함이 다 그 병법의 힘을 입었음인즉, 오늘날 신이 어찌 감히 전날에 사사하던 개소문을 치리까”라고 사양했다는 것이다. 스승에 대한 기본 예법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이다.

태종이 “개소문의 병법이 과연 옛 사람의 누구와 견주겠느냐”라고 묻자 이 정은 “옛 사람은 알 수 없으나 오늘날 폐하의 모든 장수 가운데에는 적수가 없고, 비록 천위(天威)로 임(臨)하실지라도 가히 승리하기 어려울까 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천위, 하늘의 위엄! 천자를 자칭하는 당태종에게는 자손심을 거스르는 소리다.

이에 태종이 “중국의 거대함과 인민의 수로나 병력의 강함으로 어찌 일개 개소문을 두려워하랴”라고 불쾌해하자 이 정은 “연개소문이 비록 1인이나 재주와 지략이 만인에 뛰어난즉 어찌 두렵지 아니하리까”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정은 돌궐렴岳瀁?吐谷渾)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유능한 사령관이었다. 중국 능연각(凌煙閣)에 초상화가 걸린 24공신의 한사람이며, 이적(李勣)과 함께 2대 명장이다. 그가 저술한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당대 최고의 병법서로 알려져 있다. 단재는 이 병법서와 관련해 노상운(盧象雲) 선생이라는 노인의 구전(口傳)을 ‘조선상고사’에 소개하고 있다.

“연개소문은 자(字)가 금해(金海)이니 병법이 고금에 뛰어난 바 그가 저술한 ‘금해병서’(金海兵書)가 있는데 고려 때도 임금께서 늘 각 방면의 병마절도사에게 그 부임 시에 한 벌씩을 하사했다. 지금은 그 병서가 전해지지 않거니와 연개소문이 그 병법으로 당나라 이 정을 가르쳐 이 정이 당의 최고 명장이 되었다. 그 이 정이 저술한 ‘이위공병법’은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로 치는 바, ‘이위공병법’의 원본에는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운 이야기를 자세히 썼다. 그 뿐 아니라 연개소문을 숭앙(崇仰)한 어구가 많으므로 당렐?때 사람들이 연개소문과 같은 외국인에게 병법을 사사해 명장이 됨은 실로 중국의 큰 수치라고 하여 드디어 그 병법서를 모두 없애 버렸다. 오늘날 유행하는 ‘이위공병서’는 후인의 위작인 고로, 이는 원본이 아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당 최고의 명장을 키워낸 병법의 달인이 연개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연개소문이 제자를 허투로 키워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승도 몰라보고 배신할 제자를 키워내지는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당의 명장이 될 것을 짐작하고서도, 비법을 전수한 것은 그의 인격을 믿기 때문이다. 단순히 병법의 전수가 아니고, 세상을 도와 다스리는 도법(道法), 그리고 심법(心法) 전수의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병법이라는 것은 인간의 정신 세계의 본질, 구조를 꿰뚫어보고 전쟁에서 군사를 움직여 최소한의 희생을 자국과 타국이 함께 이기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의선인 연개소문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그 병법을 어떻게 배웠을까? 규원사화에는 그가 봉황산에서의 10년 수도 끝에 도를 통하여, 만고에 뛰어난 호걸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신라의 명장, 김유신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관직에 있어서는 또한 대선(大仙), 국선(國仙), 조의(皂衣) 등의 명칭이 있었으니, 동명성왕에 이르러서는 조천석(朝天石)이 있었고,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일찍이 조의(皂衣)의 직책을 맡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연개소문은 봉황산에 들어가 십년을 수련한 뒤 마침내 만고에 뛰어난 호걸이 되었으며, 김유신은 중악의 바윗굴에 들어가 십년을 수도한 뒤 결국에는 명장이 되어 태종을 도와 나라를 강성함에 이르게 하였다.

연개소문은 한명의 조의선인(皁衣仙人)으로서 민족의 국통을 지키기 위해서 어려서부터 모든 노력을 기울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조의선인은 신라의 화랑과 비교할 수 있는 고구려의 낭가(郎家) 제도이다. 검은 옷을 입었기 때문에 조의라고 부르는데, 평소에는 무예를 닦고 수도를 하고 국가종교인 환인,환웅,단군의 삼성조를 모시는 신교(神敎)로서 백성을 계도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신교란 이들은 삼신상제님 신앙을 바탕으로 천지의 성신(聖神)과 하나되어, 세상의 모든 성신을 성스럽게 받든다. 성신에는 자신의 조상신도 포함되어 있다. 국조삼신은 민족과 국가의 기틀로서 어찌 중요하게 받들지 않았을 것인가? 즉 조의선인은 민족과 진리를 수호하는 것을 지상 목적으로 한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으로, 한민족 역사 개창의 주역들이었다. 특히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앞서서 나라를 구한 용사들이었다. 수의 130만 대군을 격파한 이들도 고구려의 조의선인 20만이었다. 이들은 신교의 종교정신으로 무장한 군대였던 것이다.

백성들이 조의선인으로 선발되면 왕의 사자와도 같은 자랑으로 여겼으며, 이들이 전쟁터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면 대중의 조소를 받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용감히 싸웠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우리 역사의 기둥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조의선인은 제가 혼자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나라에서 임명함으로써 될 수 있는 자리다. 태백일사에서는 그가 불과 9살에 조의선인으로 ‘선발’되었다고 하면서 그의 인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의표(儀表)가 웅위(雄偉)하고 의기가 호협하여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어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었다. 상을 줄 때는 반드시 고루 나누어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해 주었으며, 자기의 처지를 미루어 남의 심정을 뱃속에 갈머두는 아량을 가졌다. … 한번 기쁨을 나타내면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들도 가까이 할 수 있었고,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자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아울러 태백일사에서는 멸망위기에 처한 고구려를 구하기 위해 초개와 같은 굳은 신념으로 고구려 백성을 이끌어 당과의 전쟁을 치룬 연개소문에 대해서 많은 양을 할해하여 서술하고 있다.

태백일사가 그리는 한 인간의 모습은 진정한 영웅의 모습이다. 단재는 연개소문이 조의선인의 우두머리로서 모든 조의선인들로부터 숭모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민족을 구한 의기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연개소문은 역적이라 한다. 물론 쿠데타를 통해 나라의 국왕을 폐위하고 새 황제를 옹립하였으니 잘못되었다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일어선 것은 당대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연개소문만 나무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연개소문에 의해 폐위된 영류왕 고성제는 을지문덕과 함께 수와 맞처 고구려를 지킨 명장이었다. 을지문덕이 살수대첩의 승리와 함께 중국 본토를 치자고 주장했던 강성파였다면, 고성은 당과의 화친을 주장한 온건파였다. 그런데 고성제가 보장제의 위를 이어 열제의 위에 오르자, 화친을 넘어서 역사의 전통을 중히 여기는 고구려인이라면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굴욕적인 외교를 펼친다.

그는 만여 명의 중국인 포로의 귀환시키고 중국 역서(曆書)를 반포했으며 중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고, 천리장성의 축조하여 전쟁에 대비했다. 고성제가 중국의 요청이라면 모든 것을 들어줄 자세가 되어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중국과 평화정책을 유지하는 한 적어도 중국이 고구려를 침략하지는 않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급기야 고성제 11년(628)에는 고구려의 일급비밀이라 볼 수 있는 전 영토의 지도인 봉역도(封域圖)를 당에 보내자 고구려의 강성파들는 모두 분개했다. 전통적으로 고구려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중국과 전투하였는데 고구려의 지도를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를 침투할 수 있는 길을 알려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설상가상으로 631년에는 당의 사신의 요청에 따라 평양의 경관(京觀)을 허물어 버렸다. 경관은 수나라와의 전쟁 때의 전몰장병의 유해를 묻은 기념묘지․탑과 같은 것으로 고구려인의 자부심이 담긴 성역이다.

고성제는 당에 사신을 보내 노자상(老子像)을 구하여 오게 하여 백성들에게 노자 도덕경을 청강하게 하고 수십만의 백성을 동원하여 장성을 축조하게 했다. 당태종은 도교를 장려했는데, 그 이유는 노자의 성(姓)이 당태종의 성씨와 같은 이(李) 씨란 것때문이었다. 고구려가 도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당의 정신세계에 스스로 동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민족의 기틀을 생각하고, 역사의 혼을 생각하는 자라면 누구도 좌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의 명을 거역하기는 힘들었다. 이에 연개소문이 도교 강론을 파하도록 하고 장성 부역을 그만두도록 간언하자 황제는 그를 죽이려 하였다.

“문 앞에 맹수가 가까이 오는데, 이를 막지 않으면서 도리어 나를 죽이려 하는가?”

태백일사에서는 이렇게 연개소문의 내심을 정리하고 있다. “문 앞에 맹수가 가까이 오는데”. 이 말은 고구려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를 막지 못하면서”라는 말에서 고성제는 이 위기를 막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 생각해보면, 고성제도 고구려의 위기를 막기 위해서 당과 친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것은 위기를 막는데 역부족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연개소문의 입장에서는 위기를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키우는 것이었을 것이다.

연개소문뿐만 아니라, 당대의 조의선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조의선인은 뜨거운 혈심으로서 국가보전과 국통수호에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연개소문이 고성제를 폐위했다는 것은, 연개소문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대당온건파에 대한 대당강경파에 의한 반정(反政)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이 황제를 잔인하게 살해했다하나 태백일사에는 몰래 송양(松壤)으로 피신한 황제에 백성들이 동조하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붕어했다고 한다.


우리를 향해 부르짖는 연개소문

연개소문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한민족이야 말로 위기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많이 둔감하지만 말이다.

지난 100년간 우리 민족은 무수한 고통을 겪었다. 일제의 강점에 의해서 전국토가 일본에 빼앗겨서 고통을 겪었고, 이후에는 국토가 둘로 쪼개지고 형제끼리 총칼을 맞대고 싸운 고통을 겪었고, 이후에는 가난과 무지에서 고통을 겪었다. 80년대까지는 민주화가 덜 되어서 독재정권의 밑에서 숨도 함부로 쉬지 못하고 살았다. 90년대에 와서는 놀랍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 젊은이들의 대다수는 그러한 고통이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리려는 위기에 처해있다.

작금의 십여 년의 시간은 누가 뭐래도 인류 역사 이래 가장 살기 좋은 때라 할 것이다. 과학문명이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정신세계의 풍요로움보다 육체적인 편안함을 추구하고, 생명을 소비하여 쾌락을 추구하는 문화로 가는 시대정신의 숨결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대세를 맨손으로 부여잡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 모두 위기의식은 공유를 해야 하지 않는가 싶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마음이 너그러운 한민족은 타국을 침략한 역사도 없다. 우리의 위기는 사실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또 외부에서 들어온 위기에 대처를 하지 않은 우리 자신 탓이기도 할 것이다. 한민족의 평화의 민족이다. 그래서 국민의 대다수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쟁이 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안정과 불안정은 항상 반복된다. 그것은 판의 문제이다. 판이 튼튼하거나 판들 간의 힘이 균형을 유지하면 안정된다. 판이 약해지거나 무너지면 역사의 지진이 일어난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실 한반도는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나라의 높은 분들은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지만 말이다. 전쟁의 위협에 의해서 정권을 유지했던 과거 군사정권과 지금은 다르지 않는가? 불과 10년 전에만 해도 드러나지 않던 전쟁위기의 물결은 지금 엄청난 속도로 한반도에 몰려오고 있다.

- 중국의 경제적인 비약적인 성장
- 북한의 붕괴에 대비한 중국의 역사 왜곡.
- 일본의 군사대국화.
- 석유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
- 기독교와 이슬람, 그리고 유대교.... 종교 간의 갈등.

불과 몇 년전만해도 관심밖에 있던 키워드들이 오늘날 부각되고 있다. 마치 1929년 세계대공황의 경제위기가 2차대전을 일으켰던 것처럼, 지금 미소 양대 산맥이 해체되면서 10여년 만에 각국의 세력이 돌출하면서 새로운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 민족은 갈 곳을 모르고 표류하고 있다. “동아시아 균형자”가 될 것인가? “낙동강 오리알”이 될 것인가? 문제는 위기의식을 공유하지 않는 일반 시민들의 안전불감증이다.

연개소문은 다시 우리를 향해 부르짖는다.

“문 앞에 맹수가 가까이 오는데, 왜 이에 대처하지 않는가?”

http://blog.daum.net/damulkan (블로그), damulkan@hanmail.net (메일)

세계한인들의 뉴스네트워크 코리아웹 http://www.coreaweb.net


<내용출처:한류열풍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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