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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여성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명이다. CF에서 보이기도 한 그녀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6세에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8세에 Korean Times Competition에서 Grand Prize를 탄 이후 Korean Orchestra와 여러차례 연주회를 가졌다.
13세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곧 뉴욕 필하모니와 비외탕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했다. 그후 줄리아드 음대에 입학하여 도로시 딜레이와 강효, 펠릭스 갈리미르(챔버 뮤직)를 사사했다.
1985년에 알렉산더 슈나이더 지휘의 뉴욕 스트링 오케스트라와 함께 뉴욕 카네기홀과 워싱턴의 케네디홀에서 솔리스트로서 연주했다.
1988년 줄리아드 Concerto competition에서 처음으로 상을 탔다.
연주자로서는, 1989년에 뉴욕에서 데뷔했다.
1989년 the Young Concert Artists International Auditions 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1990년was awarded the prestigious avery Fisher Career Grant.
그해 여름에 말보로 뮤직 페스티발에 참가했고, 루돌프 셀킨과 알렉산더 슈나이더에게서 챔버 뮤직을 공부했다.

최근 김지연은 미첼 틸슨-토마스, 로스트로포비치, 핑커스 주커만, Yoel Levy 아래의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Cincinati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아틀란아 심포이 오케스트라 등 여러 오케스트라와 함께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미국과 영국, 일본, 한국 등을 돌아다니면서 연주회를 열고 있으며,

1993년 가을에 백악관에서 열린 식에서 솔리스트로서 참석했다. 백악관에서는 예전에 클린턴 내외를 위해 연주회를 연 적이 있다.
김지연은 클래식 음악을 방송하고 있는 미국의 FM 라디오 스테이션 의 제작자 사이에서 유명하다.
그녀는 WQXR 이나 WNCN 과 같은 방송에서 자주 보이고 KTV 와 CNBC 케이블 네트워크의 어린이 프로그램에서도 자주 출연한다. 미국에서도 점점 인기가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내용출처:네이버 지식iN>


#동영상 보기#
2007/04/25 - [음악 동영상/라이브] - 사랑의인사(Salut d'amour Op12)-Elgar(Vionlin 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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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마(Yiruma)는 일본 뮤지션 일색의 뉴에이지 시장에서 외롭게 싸우고 있는 한국 뉴에이지 피아니스트로, 탁월한 감성과 탄탄한 음악적 기반을 통해 데뷔 1년여만에 영화 <Oasis>의 음악 감독을 맡는 등 음악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다.

1978년 2월 15일 한국에서 태어난 그는 11세의 어린 나이에 영국으로 음악 유학을 떠나 클래식 공부에 뛰어들었고, 영재들만이 다닐 수 있다는 퍼셀스쿨(Purcell Schllo of Music)에서 피아노를 배운 후 런던 대 킹스컬리지(Kings College of London University)에 진학하여 현대음악, 클래식, 작곡 등을 공부, 실력파 뮤지션으로 명성을 얻는다.

오랜 영국 생활을 거쳤고, 한국계 영국인이라 불리고 있지만 이루마는 음악을 펼칠 곳으로 자신의 고향인 한국을 선택했다. 늘 한국의 문화를 그리워했다고 전하는 그는 오랜 외국 생활에도 불구 한국말도 수준급이다.

영국 음악교육을 통해 테크닉보다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는 그는 2001년 5월 데뷔 앨범 <Love Scene>을 발표한다. 그 동안 갈고 닦은 음악성을 유감 없이 발휘한 데뷔 앨범은 일본 일색의 뉴에이지 시장에 신선한 충격을 전했고, 앨범은 아시아 5개국에서 발매되는 등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한다. 앨범에는 11곡의 자작곡 외에 영화 <남과 여>의 테마를 편곡한 男 & 女 (Un homme et une femme), <미션>의 테마인 'Gabriels oboe'를 편곡한 'Gabriel' 두 곡의 영화 테마가 수록되어 있다.

2001년 11월 이루마는 데뷔 앨범과 몇 개월의 공백을 두지 않고 두 번째 앨범 <First Love>을 선보인다. 전작에 비해 대중성을 강하게 고려했다고 전하는 이 앨범은 세계 정상의 스튜디오인 영국 메트로폴리스(Metropolis)에서 녹음하는 등 가능성을 인정한 기획사의 아낌없는 배려 속에서 완성되었다.

앨범에는 친숙한 멜로디의 샹송 'Qui a tue grand maman'을 편곡한 'When the love falls, 재즈 스탠다드인 'Dream a little dream'이 그만의 섬세한 터치로 개성 있게 그려지고 있다.

영국 음악의 고급스러움과 정감 어린 동양의 정서가 함께 녹아있다는 평을 들으며 세계무대로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이루마는 2002년 영화 '이미지 앨범'인 <Oasis & Yiruma>를 발표한다.('이미지 앨범'이란 영화 개봉 이전에 앨범을 먼저 발매하여 영화와 음반 양쪽에서 모두 홍보효과를 보게 해 주는 것) 설경구 주연의 영화 <Oasis>의 사운드트랙이면서 솔로 앨범 형식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이 앨범은 이루마의 영화음악가로서의 역량을 강하게 심어주고 있으며, 숨겨져 있던 이루마의 보컬 솜씨 역시 경험할 수 있다.


  2002/07 이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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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계의 신데렐라에서 재벌의 사모님으로

마돈나, 휘트니 휴스턴, 재닛 잭슨, 폴라 압둘, 머라이어 캐리 등 현재 미국 팝계를 주름잡고 있는 '여가수 빅5' 가운데 1990년대에 등장한 인물은 머라이어 캐리 뿐이다. 다른 여가수들은 모두 1980년대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지만 그녀만은 정확히 1990년에 데뷔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이 시대의 여가수'라는 타이틀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

그녀는 지금까지 6년간 발표한 싱글을 모조리 차트 톱10에 올려놓았다. 차트 1위곡도 무려 8곡이나 된다. 현재의 시점에 그녀를 능가할 여가수는 없어 보인다. 팝 관계자들은 그녀를 '팝 신데렐라'로, '팝계의 히로인'으로 추켜세운다.

머라이어 캐리를 이처럼 '마르지 않는 히트 샘물'로 만든 원동력은 무엇보다 그녀의 탁월한 가창력이라는 데는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5옥타브 정도는 가볍게 넘나드는 넓은 음역으로, 한 자료에 따르면 '박쥐만이 들을 수 있는 음까지 구사한다'는 것이며 키만 높은 것이 아니라 그 소리는 강력하며 소울풀(soulful)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버진 록 백과사전>은 그녀를 팝 가수 아닌 소울 가수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녀의 라이벌은 자신보다 7살이나 위인 선배 휘트니 휴스턴이다. 실제로 그녀는 '제2의 휘트니'라는 수식어를 안고 출현했으며 목소리의 색깔도 비슷하며 발라드를 부르는 점도 유사하다. 그녀는 당연히 이러한 비교를 사양한다. 곡을 못 쓰는 휘트니와 달리 스스로 곡을 쓰고 프로듀스까지는 한다는 점을 들어 “그녀는 가수고 나는 엄연히 아티스트”라는 것이다.

머라이어 캐리의 성공은 여러 면에서 휘트니의 스타일과 코스를 그대로 본떴다. 우선 휘트니가 아리스타(Arista)레코드사 클라이브 데이비스 사장에게 발탁되어 길러진 간판 가수인 것처럼 그녀 또한 소니 뮤직의 토미 모톨라(Tommy Mottola) 사장이 픽업했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그녀는 휘트니의 '경쟁 상품'으로 개발(?)된 셈이다. <롤링 스톤>지는 1993년 <뮤직 박스(Music Box)> 앨범을 평하면서 “이는 잠재적 홈런으로 쓰여지고 편곡된 곡들이다. 한 앨범에 '항상 당신을 사랑하리(I will always love you)'의 상업적 영감을 받은 노래가 너댓 곡씩이나 포함되어 있다고 상상해 보라”고 지적했다.

'휘트니의 제록스 복사판'으로서 그녀는 물론 회사측의 주력 상품이다. 소니 뮤직측은 데뷔 때부터 그녀를 대놓고 밀었다. 당시 얼마나 홍보력을 동원했으며 이 부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마돈나마저 부러워했을까. 소니 뮤직의 한 직원은 “우리는 머라이어가 더 특권을 가진 인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녀를 논할 때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특권' 개념이다. 레코드 회사와 가수와의 관계에 있어 특권이라면 홍보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그녀가 어느 누구보다도 회사측의 전폭적인 홍보 지원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는 결국 머라이어의 성공이 그녀의 가창력과 미모 뿐 아니라 '당국의 협조'가 거들어 잉태시킨 결과임을 시사한다.

차트 성적만 봐도 그렇다. 빌보드 팝 싱글 차트는 판매(sales)와 방송(airplay)부문 현황을 합하여 순위를 매기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넘버원 8곡이 방송 차트에선 순위처럼 1위를 차지했지만 판매 차트에서 정상에 오른 싱글은 데뷔 앨범의 2곡 '사랑의 비전(Vision of love)'과 '사랑은 시간이 걸리지(Love takes time)'에 불과하다. '감정(Emotions)' 같은 노래는 판매 차트 10위에 불과했으며 5위까지 올랐던 92년 싱글 '메이크 잇 해픈(Make in happen)'의 경우 방송은 2위인데 반해 판매는 18위에 그쳤다. 판매보다 방송에 있어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회사측의 힘이 많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판매는 방송의 빈도에 영향을 받고 방송은 회사의 홍보에 의해 좌우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물론 라디오 방송국이 홍보와 무관하게 단지 그녀의 노래가 좋아서 틀어 댈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홍보의 소산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녀는 레코드 회사측의 지원 세례를 받고 있는 것일까. 그녀가 다름 아닌 소니 뮤직 토미 모톨라 사장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머라이어 캐리는 1993년 6월 5일 준 브라이드(6월 신부)의 축복 속에 모톨라 사장과 결혼, 팝계의 신데렐라에서 다국적기업의 지체 높은 사모님으로 신분 상승했다.

무명 시절 웨이트리스, 헤어 살롱 직원, 코트 점검원 등의 직업을 전전하던 그녀는 브렌다 K스타라는 여가수의 백업 보컬을 하면서 팝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브렌다는 그녀의 재능을 감지해 데모 테이프를 들고 제리 그린버그라는 이름의 남자를 만나게 해주려고 그녀를 파티에 데려갔다.

그런데 테이프는 제리에게 전달되기 전 토미 모톨라의 손에 들어가게 되는데 파티가 끝난 후 그는 리무진을 타고 데모를 듣고 가다가 놀란 나머지 황급히 파티장으로 돌아왔다. 머라이어는 이미 떠난 뒤였다. 모톨라 사장은 그녀의 자동응답기에 “난 CBS레코드(소니 뮤직의 전 이름)의 토미 모톨라입니다. 전화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겨 놓았다.

이것이 그녀가 <US>지에 스스로 밝힌 신데렐라 스토리다. 이렇게 그녀와 토미와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이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관계가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매우 긴장된 '화학적 작용'이 있었다. 그러나 난 당황했고 수줍음이 많았다”고 밝혔다.

그런데 모톨라 사장은 20년 동안 고락을 함께 해 온 아내와 이혼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결혼 훨씬 이전부터 사장-가수 관계가 아닌 연인 관계였다'는 곱지 않은 소문이 파다했다. 처음 만났을 때 모톨라는 데모 테이프에만 반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흘려 그녀를 새 인생 파트너로 '찍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머라이어는 모톨라 이혼의 간접적 원인 제공자라는 얘기가 된다. 그럴 경우 그녀는 모톨라가 조강지처와 헤어지기 전부터 로맨스를 엮었다는 점에서 도덕적 비난의 굴레를 벗어나기가 어렵다. 자신도 떳떳하지 못했음을 느낀 탓일까, 이 점에 대해선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지금도 그녀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결혼식을 올릴 당시 그녀의 나이 23세, 모톨라 45세라는 '세대적 결합'의 뒤에는 이 같은 회색 여운이 남아 있다. 그것은 결코 상쾌한 기분이 아니다.

두 사람의 결혼은 그녀가 레코드 재벌 홍보력의 도움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앞으로도 그것으로 인해 좀처럼 슬럼프를 겪지 않을 것이라는 지배적 관측을 낳았다. <롤링 스톤>지가 그들의 결혼식을 두고 대뜸 “머라이어 캐리가 그녀의 소속 레코드사에서 지원을 받지 않는다고 말은 할 수가 없다”고 표현한 것도 무리한 악평이 아니다.

그녀는 물론 이같은 지적에 강하게 반발한다.

“사람들은 내가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는 사실에 매우 분개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모두 가져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날더러 소니의 여왕이니 뭐니하고 놀려대는 것이다.”

그녀는 1995년 <볼티 모어 선>지와의 인터뷰에서 모톨라부인이라고 해서 특혜를 누리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레코드사에 갔을 때 실제로 남편과 나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논의하지 않는다. 목적 없이 대화할 뿐이다”라는 것이다. 엄청난 앨범 판매고가 '강력한 부군'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도 터무니없다고 일축한다. 컴퓨터 시스템으로 판매 상황을 점검하는 '사운드 스캔'이 생겨나면서 차트 순위는 곧바로 음반 판매 현황을 반영하게 돼 있다는 것이다.

“음악 산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더 이상 조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있는 그대로다. 수십만 명의 소비자더러 상점에 가서 뭘 사도록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냉정히 말하면 그녀는 하나의 '음악 상품'이다. 문화가 상품으로 만들어지고 거래되는 추세에서 그에 대해 왈가왈부할 바 없지만 그녀야말로 탈산업사회, 정보사회에 이르러 더욱 강조되는 '도구적 가치'(instrumental value)의 상징임은 분명하다. 미국 문화의 특성이기도 한 도구적 가치란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1차적 의의를 부여하는 것으로(그녀 앨범의 경이적인 레코딩 기술을 보라) 인간 상호간의 조화와 소통을 중시하는 '표현적 가치'(expressive value)와 대조된다. 목표와 수단간의 관계를 비용의 측면에서 면밀히 계산하며 적정선에서 기술적 도구를 사용한다. 이것이 또한 미국 전통 속에 자리잡고 있는 중산층의 문화, 프로테스탄티즘 문화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머라이어 캐리의 음악은 아티스트 고뇌의 산물이 아니라 문화 기업의 경쟁력 있는 상품에 불과하다. 그것은 빈틈이 없지만 어딘가 모르게 인간적 체취는 부족하다. 이것이 바로 미국 상업적 팝 음악의 실체인 것이다. 음악 상품으로 치밀하게 기획된 그녀의 음악이 휘트니의 성공 패턴을 답습하고 노랫말도 무난한 성공을 담보하는 '사랑'에 중점을 두는 것도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다. 머라이어의 히트곡은 남녀 간 사랑의 노래의 범주를 이탈하지 않는다. 그녀가 데뷔했을 때는 마침 과격하고 반(反)사회적인 갱스타 랩이 기승을 부릴 시점이어서 그녀의 아취있는 시대착오적 사랑 타령은 커다란 대조를 보였다. 1991년 <뉴스 위크>는 “한쪽은 잔인하고 다른 한쪽은 비현실적으로 온화한, 이러한 양극화가 팝 광경을 규정하고 있다”며 두 경향 모두를 세상에 대한 비이성적 대응이라고 주장했다.

현실이 깃들지 않는 공허한 사랑의 찬가는 성공을 가져다주는 안전핀일지는 몰라도 머라이어 음악의 아킬레스건이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뮤직 박스>를 가리켜 '만약 이 앨범에 약점이 있다면 철저히 팝의 상투성으로 구성된 머라이어의 가사'라고 입을 모았다.

그녀는 실로 거대한 미국 제도권 상업 음악 매커니즘에 조종되고 움직여지는 가수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스스로의 사고와 주장을 드러내고 있다는 인상은 주지 않는다. 지난해 싱글 '영웅(Hero)'의 판매 수익금 전액을 그녀의 고향인 뉴욕의 롱아일랜드에서 터진 총기난동사건의 희생자들에게 기증한 것도 이 때문에 훈훈한 인간애의 발로라기 보다는 홍보와 이미지 메이킹의 전략으로 비추어짐은 어쩔 수 없다.

이러한 가수가 대중 음악의 꽃이요, 그것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점이 못내 아쉽다. 그녀의 <뮤직 박스> 앨범은 국내에서도 80만 장이나 팔려 나갔다. 팝송을 받아들이는 우리에게도 그녀의 인기가 최고라는데 비감이 든다. 그녀가 노래를 잘해서 일까, 그것이 행여 무비판적 팝 음악 수용의 단서는 아닐까.

  1995/08 임진모 (jjinmoo@izm.co.kr) / 록, 그 폭발하는 젊음의 미학



#앨범듣기#
2007/04/05 - [뮤직/팝송(Pop song)] - Charmbracelet-Mariah ca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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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천년의 화제는 아직도(조금 너무하다는 생각도 든다) 비틀스인 것 같다. 그들의 베스트 앨범 <1>은 전세계에서 판매 1위를 점령했고, 여기저기서 '비틀스 다시 세우기' 작업이 한창이다. 해체한 지 30년이 지났건만 과연 '팹 포(The Fab Four)'의 힘은 대단하다.

그렇다면 마돈나는 어떨까? 2000년 9월 그녀는 새 앨범(베스트가 아니다) <Music>을 발표했다. 이미 그 전에 발매되었던 싱글 'Music'은 4주만에 1위를 기록했으며, 그 '일렉트로니카' 앨범도 가뿐히 차트 정상에 등극했다.

물론 예전의 마돈나로서는 당연한 결과겠지만 10대 여가수들과 보이밴드들이 휘어잡고(?) 있는 현 팝 음악계를 고려한다면 그녀도 상당히 분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사실 폴 사이먼이나 유투 같은 거장들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1983년에 공식 데뷔했으니 18년간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찬반이 극명하게 갈리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대중들의 주요 관심대상이다.

비틀스에 필적할 만한 여가수를 꼽는다면 단연 마돈나 아닐까? 최소한 그녀만큼 열심히 음악활동을 지속해오는 여가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최근 그녀에게 <롤링스톤>지가 붙인 'The Music Woman'이란 호칭은 아주 적절하다.

그렇다면 '마돈나 다시 세우기'는 아닐지라도 '마돈나 바로 세우기'(?) 정도는 있어야 할 듯 싶다. 그녀는 우리에게 뭘 선사했을까 그리고 과연 그녀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라는 궁금증 내지는 의심을 가지고 그녀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이 글을 시작하는데 이런 의문이 든다. '그런데 마돈나와 동시대에 활약하던 그 많던 여가수들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간 거야?'

1. Like A Virgin

'영화계의 악동'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가 감독한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Reservoir Dogs)>(1992)의 첫 장면을 잠시 들여다보자.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8명의 등장인물들이 아침식사를 위해 카페에 모여 앉아있다. 이들은 모두 다이아몬드 강도를 위해 모인 건달들이다. 식사를 마친 그들은 커피를 마시며 길고도(무려 12분간 이어진다) 지루한(?) 잡담을 하기 시작한다. 마돈나의 'Like a virgin'이 바로 그 화제. 가장 방정맞은 캐릭터인 미스터 핑크가 먼저 운을 띄운다.

"'Like a virgin'은 말이야. 커다란 '성기'를 가진 남자와 관계를 갖는 여자에 대한 노래야. 곡 전체가 '크기'에 관한 은유인 셈이지."

좀더 나이 든 악당 미스터 블루가 이에 대해 반박한다.

"그렇지 않아. 그것은 아주 상처받기 쉬운 여자에 관한 거야. 그리곤 정말로 섬세한 남자를 만나게 되지."

이후 등장인물들이 제각기 마돈나(또는 그녀의 노래)에 대해 한 마디씩 던진다. "난 마돈나가 싫어", "'True blue'란 곡이 뭐지?", "난 그녀의 초기작이 좋아. 'Lucky star', 'Borderline' 같은 거 말야. 하지만 'Papa don`t preach' 시절은 별로야." 동시에 음담패설 정도로 끝날 줄 알았던 잡담이 논쟁으로 과열되어 자못 심각해진다.

미스터 핑크의 일관된 주장은 계속된다. "그녀는 존 홈즈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고 하룻밤을 보내지. 거기서 그녀는 그 크기에 고통을 느끼는 거야. 그걸 바로 '처음처럼, 처녀처럼'이라고 한 거야." 그러나 결국 그와 다른 이들의 상반된 견해는 화해되지 못한 채 그 에피소드는 끝난다.

이것은 픽션인 영화의 한 장면이고, 그것도 1992년에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마돈나 전체의 모습을 조망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들이 언급하는 가수와 노래는 분명 실재하는 것이고, 그들의 코멘트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이 에피소드는 그녀가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소비되고 있는가를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적어도 마돈나의 중요한 일면이 드러난다. 그것은 그때까지 마돈나의 음악적인 면보다는 섹슈얼리티 측면이 더욱 부각되고 또 소비되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녀가 댄스 팝의 디바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뒷골목의 성적인 농담거리로 소통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가, 라는 문제는 좀더 다양한 또는 심층적인 이야기가 필요할 듯 하다. 아무튼 세속적인 건달들의 세계를 그리는 데에 마돈나가 쓰였다는 것은 한 번 곰곰이 되새겨 볼만하다.

2. Material Girl

마돈나라는 가수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음악보다는 이미지다. 성(性)의 이미지다. 그 이미지는 그녀에 관한 한 모든 가치 판단에 있어서 가장 우위에 있다. 대중들이 모두 위의 건달들처럼 속물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녀는 바로 '스테레오타입'이 돼버린 것이다.

마돈나라는 한 인물이 섹시한 '가상의 이미지'로 전이되어, 우리는 그것에 우선 반응한다. 가령 밥 딜런 하면 포크 음악이 생각나지만 마돈나 하면 도발적인 몸짓이 떠오른다(물론 음악도 생각난다). 일종의 편견일 수 있지만 아직까지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 같은 이미지로 인해 어쩌면 뒷전으로 물러난 그녀의 음악적 미덕이 어느 정도 손해봤을 수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마돈나의 성적(性的) 이미지는 지금껏 그녀가 음악계에서 살아남아 있을 수 있었던 '존재이유'가 된다. 또한 그것은 마돈나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엔 여러 복잡한 커넥션이 얽혀있다. 그녀의 찬란한 섹슈얼리티는 성 상품화를 부추기는 자본주의의 검은 시대정신(?)과 이에 상응하는 마돈나의 고도의 전략 등이 맞물려서 탄생된 것이다. 그녀가 데뷔했던 1983년 당시 미국은 보수와 극우의 시대였다. 레이건 정부는 보수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물질만능주의라는 변질된 아메리칸 드림만을 장려했다. '물질적인 소녀' 마돈나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고향을 등지고 뉴욕에 홀로 올라와 가진 건 '몸뚱이' 하나와 음악적 재능뿐이었던 마돈나에게 그러한 사회 분위기는 절대적인 기회였다. 이미 그녀는 몇 년간 파트 타임 누드모델과 밴드의 백 보컬 등으로 힘겨운 뉴욕 생활을 보낸 바 있었다.

하지만 그 경험은 그녀에게 어느 정도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때문에 그녀는 성을 거리낌없이 전면에 내세울 수 있었다. 섹슈얼리티로 중무장한 채 내놓은 데뷔앨범 <Madonna>(1983)는 이후 마돈나가 끊임없이 던지는 충격파 중 첫 번째가 되었다.

감각적이고 달콤한 댄스 팝 음악이 훌륭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끈 건 단연 마돈나의 육감적인 외모였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자신의 탄탄한 몸매 중 일부를 스스럼없이 내보였다. 앨범 재킷 뒷면에서도 쉽게 확인되듯, 그녀는 그 충격적이던- 그러나 지금은 일반화되다 못해 촌스런 지경까지 이른- 배꼽티를 입고 흥겹게 'Holiday', 'Borderline'을 노래했다. 아마도 이 '불량한' 모습은 순진하던 국내의 20·30대 음악팬들의 뇌리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하여간에 하루아침에 'Lucky Star'가 된 그녀는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음악적인 것 외에 마돈나는 '보이 토이'(Boy Toy)로 대변되는 그녀만의 패션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배꼽티는 물론 헤어밴드, 검은 고무 팔찌, 보이 토이 벨트 등을 전세계로 유행시키며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전파했다.

그 같은 마돈나의 이미지가 급속도로 전파될 수 있던 것은 뮤직비디오 즉, MTV의 영향이었다. 앨범만으로는 그녀의 이미지를 그렇게 효과적으로 팔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돈나의 모습을 우리가 '감상'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MTV 덕분이다. 마이클 잭슨과 마찬가지로 마돈나도 MTV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해서 마돈나만 이득을 본 건 아니다. MTV는 자신들을 홍보할만한 이미지 메이커, 즉 스타가 필요했고, 마돈나의 섹슈얼리티는 이들의 조건에 아주 적합한 것이었다. 결국 그들의 필요에 의해 그녀가 선택된 것뿐이고, 그녀 역시 그런 MTV를 자신의 스타성을 배출할 일종의 통로로 이용한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때부터 마돈나가 자신은 물론 외부의 것까지 통제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장점을 충분히 끌어올릴 줄 알았을 뿐 아니라 외부의 관심까지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였다. 따라서 그녀의 성공 요인이 섹슈얼리티 때문이다, 라고 한정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그것은 그렇게 쉽게 볼 문제가 아니다.

성적인 매력 하나만 가지고 10여 년을 버틸 만큼 마돈나는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상당히 똑똑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각인된 그녀의 성적 이미지는 더욱 위력을 더해간다. 그리고 그것이 결정적인 것이지만 마돈나 전체의 이미지는 아니었음을 우리는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알게된다. 아직 마돈나의 진면목이 다 드러난 것은 아니다.

3. Express Yourself

데뷔작 <Madonna>에서는 'Holiday', 'Borderline', 'Lucky star'가 연이어 히트를 기록하며 상쾌한 출발을 보였다. 이듬해인 1984년 마돈나는 수잔 사이델먼(Susan Seidelman)감독의 영화 <수잔을 찾아서>(Desperately Seeking Susan)에 조연으로 출연했다. 가수를 넘어서 배우로서, 또한 '멀티 플레이어'로서 첫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이후 그녀는 <포 룸>, <에비타>를 포함 16편의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연극의 주역을 도맡았던 마돈나에게 이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어서 그녀는 '문제의' 앨범 <Like A Virgin>(1984)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미국차트에서 3주간 1위를 차지했고, 2년이 넘도록 차트에 머무는 등 그녀의 최대성공작이 되었다. 타이틀곡 'Like a virgin'은 그녀 최초의 넘버원 송으로 기록되었다. 이 앨범은 상업적인 성공 외에 다른 하나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전작에서 외면상의 섹스 어필에 머물렀던 마돈나가 한 걸음 나아가 본격적으로 '성의 해방'을 외친 것이다.

이제 슬슬 본색을 드러내는 것일까? 여전히 화제성 있는 댄스 가수였지만 마돈나는 여기서부터는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어'간다. 지금까지 맛보기로 보여준 그녀의 성적 매력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Like a virgin'이나 'Material girl'에서 도발적인 발언은 수줍은 듯한 살랑댐에서 벗어나 있다. 자신의 적극적인 표현, 즉 성 해방의 의지천명이다. 이 곡들에 대해 '보수파'들의 반발이 거셌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부터 그녀의 또 다른 수식어 '혁명전사'의 이미지가 구체화되기 시작한 셈이다.

그녀의 탁월한 '이미지 제조' 능력은 뮤직비디오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Material girl'의 뮤직비디오는 명백히 마릴린 먼로를 훔친 것이다. 그녀는 단순히 먼로의 이미지만 차용한 것이 아니다. 먼로 향수(鄕愁)에 젖어 있는 다수의 미국인들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였다. 뿐만 아니라 그 이미지마저 먼로에게서 앗아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현재까지 지속된다.

마돈나의 위대한 점 중 중요한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녀는 창조자가 아니다.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혹은 아무 데나 널브러져 있는 평범함을 찾아내 그것을 이용할 뿐이다. 하지만 곧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것은 아주 독창적인 무언가가 된다. 즉, 마돈나만의 스타일이 된다. 이것은 그녀의 음악, 이미지, 기질이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마돈나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일련의 사건들을 겪게 된다. 자신의 첫 순회공연이 있었던 1985년, 그녀는 약간의 위기상황을 맞이한다. 그해 7월, 성인잡지 <펜트하우스>와 <플레이보이>가 무명시절(1977년)에 찍어뒀던 마돈나의 누드사진을 게재한 것이다. 그녀의 인기가 오르자 이를 노린 잡지사들의 추악한 폭로사건이었다(이젠 이런 것도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마돈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같은 달 열린 난민구호 자선공연 <라이브 에이드>에 당당히 출연 'Into the groove', 'Holiday'를 열창했다. 결국 그 사건은 공짜로 그녀를 홍보해준 것이 되었다. 그녀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으니 말이다.

한편 그녀는 26번째 생일인 8월 16일 배우 숀 펜과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마돈나는 세 번째 정규앨범 <True Blue>(1996), 사운드트랙 <Who`s That Girl>(1987), 댄스 리믹스 앨범 <You Can Dance>(1987)를 잇달아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간다. 그러나 대중들은 결코 비슷한 세기의 자극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마돈나는 역시 똑똑하다. 반복요법은 쓰지 않는다. 좀 더 적극적인 자기표현들을 이어나간다.

4. Justify My Love

1989년은 마돈나에게 있어 가장 논란이 되었던 한 해였다. 그 해 4월 그녀의 최고 명반으로 꼽히는 <Like A Prayer>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프린스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슈가 될만했다. 음반이 발매되기 직전 마돈나는 펩시콜라와 5백만 달러의 TV 광고 계약을 맺었다. 바로 얼마 후 'Like a prayer'의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다. 이 곡은 가스펠 분위기로 진행되는데, 엽기적이게도 그 뮤직비디오는 마돈나가 흑인성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한 술 더 떠서 불타는 십자가 앞에서 춤추기까지 했다.

이것은 미국내의 종교적 논란을 넘어서서 전세계 미디어들의 기사거리가 되었고, 급기야 바티칸 교황청에 의해 금지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불똥은 엉뚱한 곳에 튀었다. 마돈나와 광고계약을 맺은 펩시콜라 측은 그 덕에 소비자들의 엄청난 항의를 받았다. 결국 펩시는 그 광고를 제대로 방영도 못한 채 접어야 했다. 마돈나가 5백만 달러를 고스란히 챙긴 것은 물론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이듬해 발생한다. 마돈나의 베스트 <The Immaculate Collection>(1990)에 수록된 신곡 'Justify my love'가 말썽이었다. 천재 록 뮤지션 레니 크라비츠가 작곡·제작을 맡은 그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돈나의 에로틱한 목소리와 암시적인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정도만으로 범상치 않은 곡인데 그 뮤직비디오는 더욱 자극적이었다. 이에 MTV가 그 곡의 방영을 금지했다(따라서 국내에서도 볼 수 없었다).

이 조처는 그간 마돈나에게 호의적이었던 MTV로서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당했다. 마돈나에 의하면, 그러한 모든 행위는 '예술적 풍자'일 뿐이다. 최고의 자유국가라 자처하는 미국이 보장해야 할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인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며 오히려 MTV측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정말 대단하다. 논란을 일으키는 능력만 뛰어난 게 아니라 그것을 종식시키는 능력도 뛰어나다. 이 정도 되면 '여성 운동가'라고 말해도 부족하지 않다. 상업성이 뻔히 보이는 가운데서도 그녀는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자신 스스로에게 진실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 가질 수 없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마돈나는 이제 그저 얼굴만 예쁘장한 얼치기 여가수가 아니다. 그저 자신의 외모만 믿고 성을 상품으로만 팔 줄 알았던 그녀의 데뷔 때 모습을 생각하면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이러한 마돈나의 모습 하나 하나가 현재의 수많은 여가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다(굳이 따져보자면, 앨러니스 모리셋, 스파이스 걸스가 직계후배일 듯. 아, 브리트니 스피어스도 있다).

그후에도 마돈나의 도발적인 모습은 화보집 <Sex>와 앨범 <Erotica>(1992)로 이어지지만 1994년 드디어 그녀의 극적인 반전이 시작된다. 소녀적 감성에서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단계를 지나 성숙한 여인으로. 그리고 종착역인 음악으로.

5. Truth Or Dare

쉬어 가는 의미로 여기서 잠깐 마돈나의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마돈나는 1990년 다큐멘터리 필름 <진실 혹은 대담>(Madonna: Truth Or Dare / In Bed With Madonna)에 출연했다. MTV에서 많은 뮤직 비디오를 만들었던 알렉 커시시언(Alek Keshishian)이 감독한 이 기록영화는 별다른 주관적 개입 없이 마돈나의 일상을 그려냈다. 마돈나의 세계 순회공연 장면과 무대 뒤의 사생활 장면이 여과 없이 포착되어있다.

전자와 후자를 각각 컬러와 흑백 톤, 다른 터치로 표현해낸 것이 신선하다. 지금으로 따지면 <아름다운 TV 얼굴>이나 '셀프 카메라' 정도일텐데, 적어도 그런 것보다는 훨씬 진실하게 만들어졌다. 일단 장면 속으로 들어가 보자.

캐나다 토론토 공연장이다. 공연 전부터 경찰들이 몰려와서 매니저들에게 반 협박을 한다. 마돈나가 손을 하복부 아래로 내리는 이상한(?) 행위를 하면 체포하겠다고. 이 소식을 접한 그녀는 당황한다. 퍼포먼스를 수정하느니 아예 공연을 취소하겠다는 말까지 한다. 하지만 쇼 타임이 임박하고 약간 불안해진 마돈나는 댄서들과 기도를 한다. "오늘은 파쇼적인 토론토의 마지막날입니다. 저에게 이것을 이겨낼 힘을 주세요." 댄서들과 마돈나는 프로테스트 송 'We Shall Overcome'을 합창하며 무대에 올라선다. 그녀는 두 명의 남자 무희가 호위하고 있는 빨간 침대 위에서 'Like a virgin'을 노래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 곡을 아주 느리게 부르며(여기의 'Like a virgin' 버전은 최고다)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노래는 절정에 이르고 마침내 그녀는 '문제의' 손동작을 감행한다. 마돈나는 승리했다.

다음은 그녀의 고향인 디트로이트 공연장이다. 그녀는 공연 전 언제나 댄서들과 손을 맞잡고 기도한다. "노래할 목소리를 허락해주세요. 내 인생의 진실을 보여줄 힘을 주세요." 이 날은 공연 중에 그녀의 아버지를 모시고 나온다. 바로 그의 생일이었다. 무대에 나온 아버지를 향해 마돈나는 절까지 하며 2만 여명의 관객과 함께 축하 노래를 부른다. 상당히 인상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공연 후 그녀는 내뱉는다. "오늘은 너무 힘들었어. 두 달이나 이걸 해야하다니. 너무 피곤해."

이런 장면도 있다. 스페인 공연 전 침울해진 마돈나는 매니저에게 푸념한다. "내겐 공연 뿐이야. 지겨워." 그런 그녀에게 매니저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는지 묻는다. "만나고 싶은 사람? 안토니오 반데라스." 결국 스페인 공연에서 안토니오를 만나지만 그는 마돈나를 거절한다. 1주일간 그를 만난다는 기대에 차 있었던 그녀는 욕실로 뛰쳐나간다. "욕실에 가서 내 슬픔을 식혀야겠어. 안토니오 나쁜 자식. 날 버렸어."

그녀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다. 그런데 이탈리아 공연 도중 일련의 공연이 취소된다. 교황청의 요청으로 금지된 것이다. 이에 마돈나는 담담히 기자회견을 한다. "나는 예술가고 내 공연은 내가 나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내 공연은 빛과 어둠 같은 양면성을 보여준다. 판단은 청중이 한다. 이것이 언론 표현 사고의 자유다."

이 다큐멘터리에 주목해야할 것은 이 영화가 지금껏 마돈나에게 품고 있던 편견들을 해소시키는 데 아주 훌륭한 단서가 된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다보면 '성의 상품화'라든지 '섹스의 화신' 따위의 말들은 어느새 잊혀진다. 그리고 가수로서의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마돈나를 느낄 수 있다. 그녀는 관객들 앞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프로 가수이며, 동료 댄서들의 따뜻한 어머니다. 그녀의 팬이든 팬이 아니든 이 영화를 보는 누구나 그녀에 대한 생각이 바뀔 것이다(비디오 출시되어 있는 국내판은 아쉽게도 30여분이 잘려나간 반쪽 짜리다. 하지만 그녀를 느끼기엔 충분하다).

6. Who`s That Girl

마돈나는 재능 있는 가수다, 라는 말에 이견을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아티스트다, 라는 말에는 다소 의견이 분분할 듯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감히 단언하건대 그녀는 진정한 아티스트다. 그것은 지난 18년간을 지켜온 그녀의 음반이 증명한다. 그리고 여전히 음반을 내고, 무대에 서서 팬들 앞에서 노래하는 마돈나의 모습이 증명한다. 재능이라는 것은 고갈되기 마련이고, 중요한 것은 현재 그녀가 어디에 서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알고있듯 마돈나는 지금 바로 우리 곁에 서있다.

마돈나가 변신에 가장 능한 연예인으로 꼽히는 데는 그 이미지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음악 역시 변신을 거듭해왔다. 1977년 마돈나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고향인 미시건을 떠나 뉴욕에 올라왔다. 그녀의 원래 꿈은 발레리나였다. 발레수업을 받던 1979년 그녀는 디스코 가수 패트릭 헤르난데즈(Patrick Hernadez)의 백 보컬 겸 댄서로 연예계에 입문했다.

이후 팝 댄스 그룹 브랙퍼스트 클럽(Breakfast Club)의 보컬을 거쳐, 1983년 꿈에 그리던 솔로앨범 <Madonna>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녀의 초기작들의 음악이 디스코나 댄스 팝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Holiday', 'Material girl', 'Like a virgin', 'Papa don`t preach'로 대표되는 발랄한 댄스 경향은 <Like A Virgin>, <True Blue> 시기까지 계속된다. 그 댄스 넘버들에서 그녀의 모습은 때론 수줍은 듯, 때론 대담하게 비춰졌다. 하지만 아직은 앳된 소녀적 감성이 더 많이 풍긴다.

1989년부터 마돈나의 음악적 성향이 서서히 바뀌어 간다. 그해 발표된 <Like A Prayer>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마돈나의 다른 모습이 담겨있다. 좀더 풍부해졌다고 할까. 댄스 지향에서 탈피해서 다양한 음악을 시도했다. 가스펠나 소울도 눈에 띄지만 무엇보다 록적인 접근이 두드러졌다. 똑같이 흥겹지만 거기엔 록 비트와 연주가 강화되었다. 'Keep it together' 같은 곡에서 확연히 알 수 있다.

외적으로는 앞서 말한 뮤직비디오 'Like a prayer'에서 보듯, 요부의 이미지로 자신을 한껏 드러냈다. 이제 예전의 마돈나와는 작별한 것이다. 더 이상 수줍음은 사라지고 충만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말하자면 이 앨범을 기점으로 그녀는 음악적으로나 애티튜드(attitude)로나 아티스트로서의 본격적인 시동을 건 것이다.

1990년대 들어서는 더욱 달라진 면모를 보였다. 자신의 출연한 영화 <딕 트레이시(Dick Tracy)>에 쓰인 곡과 그로부터 영감 받은 몇 곡들을 모은 <I`m Breathless>(1990)를 통해 뮤지컬 스타일의 또 다른 창법을 들려줬다. 1994년 작 <Bedtime Stories>와 이듬해 발표된 <Something To Remember>에서 마돈나는 완연한 여인의 향기를 내뿜었다. 멜로디는 한결 풍부해졌고, 곡의 진행은 부드럽고 여유 있어졌다. 'Take a bow' 같은 곡에서의 노래실력은 어느 발라드 가수에도 뒤지지 않는다. 마치 '이래도 내가 아직 율동만 하는 창부로 보이니?' 라고 항변하는 듯 하다.

또한 1996년에는 뮤지컬영화 <에비타>(Evita)에 출연하여 '진지한' 역할을 소화해냈다. 비록 '율동 없는 그녀는 볼 게 없다', '어울리지 않는다' 등 혹평도 있었지만, 뛰어난 가창력과 영혼이 깃들은 열연으로 그녀에 대한 일반 인식을 바꿔놓았다. '섹스 중독증 환자'에서 '성녀'(聖女) 그리고 진정한 아티스트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이것은 물론 그녀가 나이든 탓도 있겠지만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부단히 투쟁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의 투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직 알을 깨지 못한 것인가?

7. Music

마돈나는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클럽 문화 속에서 가수의 꿈을 키워왔다. 물론 디스코, 댄스 클럽이었다. 그 자양분은 그녀의 초기 앨범들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1998년, 여전히 클럽 문화는 지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클럽의 분위기나 음악은 많이 바뀌었다. 클럽에는 약물이 넘쳐흐르고, 이에 맞춰 어지러운 테크노, 일렉트로니카가 꿈틀댄다. '클럽 키드' 마돈나는 바로 이것을 취했다. 어쩌면 그녀는 70년대 말의 클럽 시절로 되돌아가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옛날의 클럽 시절을 회고하면서 현재의 클럽 심장부로 입성한 것이다. 의미심장한 귀환이다.

그해 발표된 <Ray Of Light>는 마돈나의 그와 같은 음악적 전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일렉트로니카 아티스트 윌리엄 오비트(William Orbit)가 영입된 이 앨범의 화두는 클럽 문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매개물인 약물과 테크노 음악이다(그리고 이 둘의 관계는 서로를 보충해주는 일종의 상호보완물이다). 앨범 발표 후 마돈나는 패션잡지 <엘르>(Elle)와의 인터뷰에서 그것의 약물관련성을 언급했다.

"'Ray of light'가 말하고 있는 것은 성적 모호함과 마약으로 인한 환각 체험이다." 아무래도 그것은 자신의 체험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앨범은 정통 테크노 뮤지션이 아닌 테크노 앨범으로선 상당한 평가를 받았다. 대다수의 록 잡지에서 호평을 얻었고, 그때까지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던 그래미상도 4개나 획득하며 그간 그래미에 맺혔던 한을 풀었다. 여기서도 일반적인 것을 끌어다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마돈나의 미덕이 빛을 발한다. 확실히 마돈나의 그 '옛날 음악'은 시원한 매력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2000년에 발표된 <Music>이다. 이 음반을 녹음할 당시 마돈나는 임신 중이었다. 나이도 벌써 우리나이로 마흔 셋이나 되었다. 국내로 따지면 아줌마 그것도 중년을 넘긴 아줌마 중의 아줌마인 것이다. 국내가 아닌 미국이라도 썩 유리한 조건은 아니다. 게다가 팝 음악계도 예전보다 상황이 많이 나빠져 있었다. '아이들 음악'이 음악판을 싹쓸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년의 노장들은 점차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마돈나가 분연히 일어섰다. '음악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서. 그리곤 아주 심플한 제목을 달고 앨범을 냈다. 그 단순한 제목은 그러나 지금껏 마돈나가 걸어온 모든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 아무리 음악 외적인 것에 치중했더라도 자신의 중심은 늘 음악에 있었다는 것이다.

마돈나가 대단한 결의를 가지고 낸 그 음반은 전작 <Ray Of Light>와 비슷한 음악성향을 담고 있다. 차이라면, 일렉트로니카 성향과 함께 좀더 '애시드 록'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전작이 차갑고 직선적이었다면 <Music>은 차갑지만 왠지 부드럽고 곡선적이다. 그리고 좀더 복고적이 되었다. 'Music'의 가사 중 '음악은 사람들 모두를 모이게 한다'라는 부분은 가장 상투적이지만 가장 강력한 문구다. 비틀스의 'Come together'를 연상시키는 그 가사는 가장 진실하고 절실하게 느껴진다. 음악생활 20년만에 마돈나가 한 말이라 더욱 그렇다.

8. Something To Remember

마돈나는 1958년 6월 15일 미국의 미시건 주 베이 시티에서 태어났다. 1983년에 데뷔했으며, 2001년 현재까지도 여전히 현역가수다.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계속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간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이슈를 만들어내는 힘 또한 유효하다. 지난 9월 <Music>의 발매와 함께 록 잡지 <롤링스톤>은 그녀를 커버인물로 다루었다. 이로써 그녀는 10번째로 <롤링스톤>지 커버를 장식했으며, 이는 전무(前無)한 기록이다.

성(城)에서 올린 그녀의 결혼식은 또 어떠했는가. 그녀가 썼던 다이아몬드 박힌 머리장식은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의 것이어서 대단한 관심을 끌었다. 게다가 웨딩드레스는 바로 폴 매카트니의 딸 스텔라 매카트니가 디자인한 것이었다. 언론이나 대중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사실 마돈나가 이렇게 오래 가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마돈나 데뷔 당시 라이벌은 신디 로퍼였다. 그때는 마돈나보다는 신디 로퍼에 대한 평가가 훨씬 좋았고(그녀는 그래미 신인상도 차지했다), 신디 로퍼가 더 장수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주지하다시피 마돈나의 절대적 승리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것은 마돈나만이 갖고 있는 놀라운 힘의 결과다. 음악과 이미지 그리고 끊임없이 이슈를 만들어내는 능력. 이 셋의 완벽한 조화가 바로 마돈나 파워의 본질이다.

그녀는 현재 10년 연하의 남편 가이 리치와 함께 영국 런던에서 살고 있다. '영국의 타란티노'라고 불리는 영화감독 가이 리치와는 1999년부터 사귀었으며, 지난 12월 22일 스코틀랜드의 스키노 성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 이제 그녀는 두 아이를 가진 자비로운 어머니이자 한 남자의 사랑스런 아내이다. 요즘 그녀의 관심은 자식들 밖에 없는 것 같다. 마돈나는 딸에 대해 "그 애는 꼭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아요. 그 애는 나예요. 나."라며 더없이 흐뭇해한다. 그녀의 생애 중에서 처음으로 안정을 찾은 듯 보인다. 수많은 이미지 중에서 이번엔 어머니란 이미지를 찾아낸 것이다.

Material Girl, 섹스 중독증 환자, 혁명전사, 헐리우드 디바, 테크노 퀸, 클럽 키드, 살아있는 록의 전설. 지금까지 그녀에게 따라 붙었던 수식어들이다. 이중 진정한 마돈나의 모습은 무엇일까. 모든 것이 허상일 수도, 어쩌면 전부 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녀에게 있어 음악이 바로 삶이고, 삶이 바로 음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자, 이제 그녀에게 다름 아닌 편안한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물론 '음악인' 마돈나를 기억하면서 말이다.

  2001/01 고영탁 (taakiz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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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03 - [뮤직/팝송(Pop song)] - American life-Mado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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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코요테 어글리>의 주제곡 'Can't fight the moonlight'로 국내 팬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리앤 라임스는 일찍부터 '컨트리 신동'이라 불리던 여가수다. 1996년 14살의 어린 나이로 데뷔해 컨트리 음악계에 신선함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최근 2001년에 발표한 <I Need You>을 통해서는 절정의 팝 감각을 과시하며 팝 가수로의 변신도 모색하고 있다.

리앤 라임스는 컨트리 가수 특유의 맑은 음색을 견지하면서도 파워 넘치는 가창력을 자랑한다. 그래서 미국에선 그녀를 1950-60년대 맹활약한 컨트리 가수 팻시 클라인(Patsy Cline)의 직계라 평가한다. 데뷔 싱글 'Blue'나 팝 차트 1위를 차지한 'How I live' 같은 곡에서 그녀의 노래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

어린 나이도 강점으로 작용해 컨트리 특유의 카우보이 모자에 통기타 이미지는 희석되고 또래의 감수성에도 어필했다. 발표하는 앨범마다 상당한 호평을 얻어 <CMA(Country Music Association Awards)> 같은 각종 컨트리 시상식은 물론 <빌보드 어워즈>, <그래미> 시상식에서도 수상하며 차세대 컨트리 디바의 입지를 굳혔다.

사실 국내에서 가장 인기 없는 음악 중 하나가 컨트리 음악이다. 멜로디를 중시여기는 국내 정서상 미국 카우보이들의 버터냄새 진하게 풍기는 그 음악이 맞지 않는 건 당연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본토 미국(특히 남부지역)에서 그 음악의 인기는 가히 절대적이다. 특히 컨트리의 '지존' 가스 브룩스의 경우, 앨범이 나왔다하면 컨트리 차트는 물론이고 팝 차트에서도 가뿐히 정상에 등극한다.

그 같은 현상은 확산되어 가스 브룩스 이후 컨트리 가수가 팝 차트를 점령하는 일은 다반사가 되었다. 여기에 샤니아 트웨인, 페이스 힐 같은 절충형 컨트리 가수들이 가세해 컨트리 음악계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처럼 컨트리 음악은 미국인들의 자존심이자 자랑이다. 그것이 컨트리 음악이 혹 신세대들의 음악은 아닐지라도 <코요테 어글리> 같은 감각적이고 '젊은' 영화에 사용될 수 있는 이유다.

팝과의 크로스오버, 리앤 라임스의 컨트리 음악

컨트리 음악이 확고한 지지세력을 거느리고 있다지만 전통적인 패턴만을 고수한다면 결국 한정된 테두리 내에만 머물게 된다(물론 이것도 유의미하다). 샤니아 트웨인, 페이스 힐은 기존 컨트리 향수를 유지하면서 보다 친화력 있는 주류 팝과의 결합을 시도해 광범위한 호응을 끌어낸 가수들이다. 샤니아 트웨인의 앨범 <Come On Over>는 2천만장의 판매고라는 놀라운 상업적 성과를 얻기도 했다.

리앤 라임스의 음악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컨트리에 충실하면서도 팝 사운드를 거기에 융합시켰다. 차이라면 그들이 30살을 넘긴 나이에 뒤늦은 스타덤을 얻었다면 리앤 라임스는 겨우 14살에 해냈다는 것. 1982년에 태어난 그녀는 1996년 'Blue'라는 곡으로 처음 등장해 10대 가수 선풍을 일으킨 이래 지금껏 6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착실히 자신의 영역을 쌓아가고 있다. 데뷔 초반은 주로 컨트리 고전이나 올드 팝 넘버들을 리메이크하는 수준이었지만 곧 자신만의 색깔로 무장해갔다.

2001년 발표한 <I Need You>는 훌륭한 팝 앨범이다. 따라서 보다 많은 팬들이 앨범을 찾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 앨범을 기점으로 그녀는 자신을 키운 컨트리를 외면하고 팝으로 돌아설 것인가. 자신에게 더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아야할 과제가 그녀에겐 남아있다.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그녀의 '선택'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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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01 - [뮤직/팝송(Pop song)] - Twisted angel-Leann r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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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팝의 살아있는 인간극장, 켈리 클락슨의 성공기

1982년 텍사스 출생으로 도회적인 삶과 동떨어진 순박한 시골 소녀였던 켈리 클락슨(Kelly Clarkson)은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합창부에 들어가기 전까지 딱히 음악을 하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집안은 음악적으로 학식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을 뿐더러 그저 레바 매킨타이어(Reba McEntire), 에어로스미스(Aerosmith), 애니 레녹스(Annie Lennox)를 즐겨 듣는 정도였다. 그러나 선생님의 용안은 훗날 전미를 정복할 한 소녀의 잠재력을 미리 점치고 있던 것이다.

비록 시작은 타의였으나, 점차 켈리 클락슨의 내면에서도 노래를 향한 열정의 꽃망울이 싹트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발성 연습으로 창법을 연마해가던 중, 지역 내 콘테스트에서 진가를 인정받으며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을 준비한다. 학교 졸업 후, 부푼 꿈을 안고 할리우드 행을 택했지만 이름 없고 연줄 없는 시골 소녀를 자선할 만큼 인정 많은 곳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켈리의 가능성을 알아본 제리 고핀(Gerry Goffin)마저 병으로 몸져누우면서 희망의 빛줄기는 한순간에 소멸해버렸고, 결국 웨이트리스와 극장 아르바이트, TV 드라마 < 사브리나 >에서 대사 없는 엑스트라로 출연하며 막연히 호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내민 < 아메리칸 아이돌 >의 참가 신청서는 막막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던 그녀에게 서광의 실마리였다. 이미 그와 비슷한 프로그램에서 고배를 마신 적이 있었기에 마음을 비우고 여유롭게 오디션에 응해 본선까지 진출하게 된다. 꾸준히 단련해온 가창력과 전형적인 스탠더드 팝 스타일의 음색, 그리고 회를 거듭할수록 드러나는 성실하고 다부진 캐릭터가 TV를 시청하는 전국의 수백만 미국인들을 감동시켰다. 마침내 저스틴 구아리니(Justin Guarini)와 겨룬 최종 결선 무대에서 치열한 접전을 펼쳐 58%의 지지율로 우승을 거머쥐며 인생역전, 그 꿈처럼 아득하기만 했던 가수의 길로 진입한다.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의 RCA 레코드사와 계약을 체결한 켈리는 조속히 싱글 'A moment like this'를 발표한다. 컨트리의 영향이 컸던 어린시절의 성장배경을 그린 순도 높은 팝 발라드로 차트 정상을 꿰차며 켈리 클락슨의 이름을 전 세계에 분포시켰다. 붉은 드레스를 입고 호수처럼 맑은 두 눈을 글썽이던 소녀는 차기 싱글 'Miss independent'에서 디스토션을 잔뜩 걸은 기타 사운드와 혼연일체가 되어 씩씩하고 용맹스러운 독립 여성으로 변신을 꾀했다.

켈리의 변신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앨범 차트 1위로 핫 샷 데뷔한 처녀작 < Thankful >은 록, 발라드, 소울, 포크, 댄스 뮤직 등을 아울렀고, 2005년에 공개한 < Breakaway >에서는 'Since you been gone', 'Behind theses hazel eyes'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탄탄한 록 사운드를 구축하여 걸리시 록의 새로운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한다. 아이돌 콘테스트 출신자로서 저항할 수 없는 정약인 틴 팝의 운명을 버리고 굳이 록을 택한 이유가 뭐냐는 질문 공세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이 세상에 좋은 음악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한 가지 장르에 안주할 생각은 없어요. 할 수 있는 것은 일단 다 해보고 싶거든요.” 아이돌인 상태로 롱런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미국 폭스 TV가 주최한 < 아메리칸 아이돌 >의 초대 우승자. 이는 앞으로 가수 켈리 클락슨의 꼬리표처럼 평생을 따라다닐 문구임에 틀림없다. 초년생의 한계를 뛰어 넘어 역대 그 어떤 아이돌보다 눈부신 스포트라이트 아래 데뷔전을 치러냈어도, 카멜레온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그 안에서 성숙한 음악인으로 거듭나겠다고 다부지게 말하는 켈리의 휴먼 드라마는 오늘도 방영 중이다.



  2005/06 이지연


<내용출처:IZM Neo Music Communiy>


#앨범듣기#
2007/04/01 - [뮤직/팝송(Pop song)] - Thankful-Kelly clark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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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 팀벌레이크(Justin Timberlake)는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틴팝 씬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보이밴드 중 하나인 엔싱크(Nsync)의 프론트맨이다. 게다가 지난 2002년에는 솔로 데뷔작 <Justified>을 발표하면서 독자적인 활동도 모색하고 있다. 그룹과 솔로를 모두 아우르려는 모험에 도전한 것이다.

1981년 미국 테네시주의 멤피스 지방에서 출생한 저스틴은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 크리스티나 아길레라(Christina Aguilera) 등과 함께 어린 시절 디즈니 채널의 미키마우스 클럽에 출연하면서 '엔터테이너'로써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이후 1996년에 엔싱크에 참여했고, 2년 뒤인 1998년에 엔싱크의 첫 음반 <'Nsync>가 발표되었다. 데뷔 음반에서는 'I want you back'가 준(準)히트를 기록했다.

1999년 발표된 2집 <No Strings Attached>는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결과를 얻었다. 'Bye bye bye', 'It's gonna be me' 등의 박진감 넘치는 댄스곡들은 메가 히트를 달성하였고, 음반은 2주일만에 더블 플래티넘을 획득할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틴에이저들의 절대적 지지를 등에 업은 가공할 만한 엔싱크의 파워는 당시 인기 정상에 올라있던 백스트리트 보이스(Bakcstreet Boys)를 차츰 뒷골목으로 몰아넣었다.

저스틴의 재능이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3집 <Celebrity>(2001년)부터. 작곡가로써, 공동 프로듀서로써 저스틴의 이름을 크레디트에 올리기 시작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첫 싱글이었던 'Pop', 'Celebrity', 'Gone'등의 주요 곡들을 포함한 7곡이 저스틴의 손으로 만들어졌고, 다섯 곡을 공동 프로듀싱했다.

그러나 엔싱크는 어디까지나 풍선껌처럼 언제 터져 버릴지 모르는, 변덕스러운 10대들의 버블검 밴드였다. 슈퍼급 보이밴드 백스트리트 보이스의 인기가 점차 시들해져가면서 엔싱크도 같은 전철을 밟으려 하고 있었다. 특히 독립을 꿈꾸던 저스틴에게 틴에이저들의 트렌드를 지향해야하는 보이밴드에서 자신의 음악적 포부를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저스틴은 솔로로 나섰다. 그 스스로 굉장히 열심히, 그리고 마음껏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하는 첫 솔로 음반 <Justified>는 <Celebrity>에서 보여주었던 재능을 한층 발전시켜 아티스트로써의 가능성 또한 내비친 작품이었다.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넵튠스(The Neptunes)와 팀발랜드(Timbaland), 그리고 브라이언 맥나이트(Brian McKnight)의 음반 작업 참여 또한 데뷔 음반의 퀄리티를 높여주는데 큰 몫을 했다. 이에 힘입어 음악 전문지 <롤링스톤>은 2002년을 빛낸 음반 중 하나로 저스틴 팀벌레이크의 <Justified>를 선정하기도 했다.

이제 문제는 연령층이다. 저스틴의 음악은 다분히 십대 후반과 이십대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부분의 팬 층은 얼굴에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틴에이저들이기 때문이다. <타임 키즈 매거진> 등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한 '보이밴드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어 내기가 어렵다. 대형 아티스트로 도약하려하는 저스틴에게 지금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팬 연령 스펙트럼의 확대이다.


  2003/02 김소연 (soyoun1984@a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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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롭고 따스한 소프라노....Kay Lynch
 팝페라계의 무서운 신인으로 등장한 Kay Lynch는 
 아이리쉬 팝의 본 고장인 아일랜드 캐리 지방 출신의 여가수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아일랜드에는 U2를 비롯하여 엔야,시네드 오코너, 코어스,
 크렌베레스, 필 콜터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많다.
 덕분에 민족적인 자긍심이 강한 아일랜드인들이 음악에 대해 가지는 생각은
 보수적인 듯 하지만 상당히 전향적이며, 개방적이기도 하다.
 Kay Lynch 가 정통 클래식을 공부하면서도 그에 못지 않은 열정을
 팝 음악에 보이는 것도 바로 이러한 주변 여건에 기인한다.
 신비롭고 따스한 Kay Lynch의 소프라노와 프로그래밍된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결합은 절묘한 조화를 이뤄내고 있고
 여기에 적절히 배합된 아이리시 플루트 같은 민속악기와 퍼커션, 피아노,
 그리고 현악 등의 악기 편성은 고급스러운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그녀의 앨범을 통틀어 가장 특이하게 다가오는 것은
 래리 호건과 함께 작곡한 'Believe Me'...
 빅 앨(Big Al.)의 랩과 케이 린치의 오페라틱 보컬이 어우러지는 이 트랙은
 'Hip Hap Opera' 란 부제처럼 두 이질적인 장르의 결합을
 훌륭히 수행해 보이고 있는 작품이다.
#앨범듣기#
2007/04/01 - [뮤직/팝페라(Popera)] - Unconditional-Kay ly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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