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분석에 의해서 세계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현 인류가 약 20만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발원하여

세계로 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시아에는 십수만년전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전자로 보면 아시아인은 크게 2가지 그룹이 있다.

그 두 그룹은 12만년전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것으로 유전자분석된다.

 

그에 대한 이유는 중국 윈난(雲南)성 쿤밍(昆明) 동물연구소

유전생물학 실험실 장야핑(張亞平) 원사가 내놓았다.

그는 유전자분석으로 " 중국인의 조상이 6만년전 아프리카에서 왔다." 는 것을 밝혀냈다.

 

기사 -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21&article_id=0000094570&section_id=001&menu_id=001)

 

20만년전에 아프리카에서 생겨난 현생인류가

18만년전에 아시아로 들어와서 정착한다.

그리고 그 후

12만년이 지나고

다시 아프리카에서 무리가 아시아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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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이동 그룹] - 18만년전 아시아로 출발

[후 이동그룹]  -  6만년전  아시아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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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선 이동 그룹] 보다 12만년이나 늦게 출발한 [후 이동그룹]은

5천~6천년에 중국남부에 도착한다.

이들을 [지나족]이라 부른다.

(지금 중국 한족(族)의 다수는 지나족 혈통)

 

[지나족의 동남아와 중국남부 도착 - 출처 : 중국 복단대학교 인류학센터]

 

중국 복단대 인류학 연구센터 이휘박사는 지나족이 중국남부로 들어온 때가

지금으로부터 5천~6천년전이라 밝힌다.

 

지금 중국인들의 다수를 차지하는 지나족은 겨우 그때 중국땅으로 들어온 것.

 

당시는 만주 서부(요녕)의 환웅홍산배달문명이 이미 찬란하게 꽃을 치우고 있을 때.

 

 

약 2천2백년전 인물인 진시황의 나라 때까지는 

지나족은 비교적 중국 중북부로 북상을 많은 수가 못한 것으로 본다.

고대기록을 살펴보면 진시황의 나라는 지금의 중국보다   

훨씬 작았다. 몇배 작았다.

 

지나족이 중국에 본격적으로 편입된 것은

한(漢)나라 때 영토를 넓히면서부터.

 

즉 대강 기원 전후를 기점으로

중국은 민족 구성원이 확 바뀐다.

 

중국은 민족구성원이 확 바뀐다.

 

[진시황의 나라] 때까지는 대체로 [동이족 +  중국대륙 원주민]의 구성.

고대한국에서 중국대륙으로 건너가 문명을 전파하면서

대체로 [소수의 동이족 상위층 + 다수의 원주민] 구도.

 

 

 

 

그런데 기원전후 (약 2천년전)에 한나라가 중국 남부를 통합하면서 

많은 수의 [지나족]이 중국에 편입되었고 

[중국]이라는 나라의 성질이 많이 달라지게 된다.

 

당시 지나족은 한민족이나 중국인들에 비해서 

대단히 미개했기 때문.

 

여기서 우리는 지금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왜 

한족(族)이라 부르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현 중국 한족(族)의 피의 다수는 [지나족] 혈통.

쉽게 말해서

[다수의 지나족]들이 [소수의 진시황나라 사람들]과 섞였고 

그 시기가 대체로 한(漢)나라 때이므로   

지금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한족(族)이라 부른다.

자신들의 피의 다수 부분이 지나족이므로

지나족이 본격적으로 중국에 합류한 한(漢)나라의  

한(漢)자를 따서 자신들을 한족(族)이라 부른다.

 

이리하여 크게 보면

고대중국 즉 [황제헌원씨] [요순임금] [하나라] [상(은)나라] [주나라]

때까지의 중국과 

[진시황나라] [한나라] 이후의 중국과는 

많이 달라진다.

수준이 팍 떨어진 것.

 

수준이

떨어졌다.

 

이리보면 현 중국 한족(族)의 진정한 역사는

2천년 정도밖에 안된다.

 

이는 현 미국 백인들이 미국의 역사를 1만년 이상이라고

우기지 못하는 것과 같다.

1만년 이상된 아메리카 인디언의 역사를

미국의 역사라고 우기지 못하는 것.

[현 미국땅]에서 있었던 고대사라 해도

그것을 미국의 고대사라고 우기지 못하는 것.

 

현 중국 한족(族)의 진정한 역사는 2천년 정도밖에 안된다.

 

현 중국 한족(族)은 약 2천년 전에 이루어진 민족.

 

겨우 2천년.

 

혹시 이러한 컴플렉스때문에 고대한국의 역사를 

2천년으로 깍아내리려는 모종의 꽁작이 있는 것은 아닐까. 

지네들이 2천년이니까 극히 우리를 질투하여

역으로 그런 꽁작을 벌이는 것은 아닌가. 동북꽁정 같은 거.

 

[주나라] 때까지의 중국은 영토가 별로 크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도덕정치를 추구한 면이 비교적 많았는데 

 

[한나라] 이후의 중국은 이전보다 영토는 크게 넓혔지만 

패권정치에 집착하고 수준이 팍 떨어진다.

 

이것이 중국 역사의 두얼굴.

 

동이족(고대한민족)의 전통이 많이 남아있던 [주나라] 때까지의 중국은

영토는 작았지만 수준이 있었고 

공자도 항상 자신이 [고인(古人)]의 가르침을 배운다고 했다.

 

[한나라] 이후의 중국은 쉽게 말해서

가짜중국.

 

미개한 지나족이 대거 유입되면서

[고대한국에서 건너간 진짜 중국의 전통]이

많이 무너져버렸다.

 

고대 중국의 전?育? 현 중국인들보다

오히려 현 한국인들과 가깝다.

혈통도 그렇고 문화도 그렇다.

 

논어에 보면 공자는 [이상적인 인간] 즉 군자(子)가 되어야 한다고 늘 설파하면서 

구이(九夷 =동이(東夷):고대한국)에 가서 살고싶다 하는데  

4천년 전부터 쓰여진 책이라는 중국 책 [산해경]에 보면 

[군자국(子國)] 즉 군자의 나라는 한반도 중남부에 있다.

 

[한반도 중남부에 있던 대인국(大人國)과 군자국(君子國)]    <- 관련글

 

은나라의 기자(箕子)는 실제로 고조선에 망명했다.

 

이래저래 고대한국과 고대중국은 한뿌리였는데

대강 [한나라] 이후의 중국은 이러한 전통이 많이 무너졌다.

 

 

중국에도 한수(漢水)라는 강이 있다.

그런데 그 강은 어이없게도 고대 중국의 중심부도 아니고

양자강의 지류에 불과한 강.

저 곳은 고대중국에서 보면 아주 변방.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한족(族)이라 하면서

어찌 저런 [변방]의 강에 한수(漢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이는 지나족이 중국에 대거 유입되기 전에

저 강 유역에서 많이 살았고

그래서 후에 숫자가 많은 지나족의 영향으로 

저 강이 한수(漢水)라 불렸을 것으로 본다.

이래저래 숫자가 많은 지나족들의 '영향'으로 [중국]은 많이 변한다.

 

그런데 저 강이 한수(漢水)라 불린 더 근본적인 이유는

원조 한수(漢水) 즉 황해대강 동쪽 유역에 살던 고대 한민족들 중

일부가 서쪽으로 이동해가면서 저 강을 발견하고 

황해대강처럼 저강이 [남북]으로 흐른다 하여   

한수(漢水)라는 이름을 붙인 것 같다.

 

<내용출처 : 한국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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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주류 사학계 “그래도 고구려는 한국사”

…베이징대 등 동북공정 동참 안해

[국민일보 2006-09-18] 

 

중국정부가 본격적으로 고구려사를 왜곡하기 시작한 2002년 이후 출판된

중국 역사서적들 중 대다수가 여전히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김우준 교수는 18일 “2002년 이후 중국 역사학계를 주도하는

대학들의 교재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 해온 결과

주류 대학들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관련 자료를 공개했다.

이들 주요대학들이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인정하는 것은

동북공정의 주장이 중국 내에서도 주류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징표로 해석된다.

◇고구려사는 한국사=동북공정을 주도하고 있는 중국사회과학원은 ‘간명고구려사(簡明高句麗史)’등의 논문에서

“고구려는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수나라와 고구려,당나라와 고구려의 전쟁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내전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역사학계의 양대산맥인 베이징대(北京大·북경대)와

난카이대(南開大·남개대) 역사학자들은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베이징대학은 2006년 출판한 ‘중국고대사(中國古代史)’에서

“서기 598년에 고구려가 중국의 요서 지방을 공략했고

수 문제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고 적고 있다.

‘중국의 요서지방’이라는 표현은 고구려를 외국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역사인식은 텐진 난카이대학 역사학자들에게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난카이대 출신 장잉핀 박사가 2003년 출판한 ‘중국의 역사와 문명(The History and Civilization of China,2003)’라는

대외 홍보용 영문책자는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을 “Emperor Yang Di launched three successive wars against Korea

(수 양제는 고구려와 연속해서 세 차례 전쟁을 벌였다)”라고 표기했다.

고구려를 현재 대한민국을 일컫는 ‘Korea’로 표현한 것이다.

◇그밖의 대학들=고구려를 한국사로 인정하는 학교들 중 베이징·난카이대학처럼

역사학의 주류 대학은 아니지만 의미있는 대학들도 눈에 띈다.

중국 중·고교 교사들을 배출하는 베이징쓰판대학(北京師範大·북경사범대)은

‘중국고대사(中國古代史·2005)’라는 책을 통해

“고구려,백제,신라 3국이 한반도에 있었고,중국과의 관계가 긴밀했다”고

고대사를 기술하고 있다.

고구려를 명확히 외국으로 인식한 서술이다.

일부 교수들이 동북공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지린대(吉林大·길림대)마저도

2006년 출판한 ‘동아사(東亞史)’를 통해

고대 한반도가 고구려,백제,신라 3국으로 이루졌다고 보고

지도와 표에서 고구려를 신라,백제와 함께 한반도 고대 국가로 간주했다.

김 교수는 “자료는 국가주도의 역사왜곡에 주류 역사학계가 동의하지 않음을 보여준다”며

“동북공정은 중국 내부 반발에 부딪혀 결국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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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교사들 “동북공정, 일부 관변학자 주장 ”
[국민일보 - 2006-09-19] 

 

 

중국교과서 집필자들은 동북공정이 일부 관변학자들의 주장일 뿐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들은 또 중국 역사교과서에서 한국문화사 부분을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중국 인민교육출판사는 19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한국학중앙연구원 대강당에서 ‘교과과정 속의 문화적 시각’을 주제로

한·중 교과서 세미나를 열고 이같은 내용을 논의했다.

한국과 중국의 역사 및 지리 교과서에 나타난 문화 서술 경향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중국 역사교과서 편집인 리칭씨는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 고대 지방정권의 하나라는

동북공정 논란은 이에 찬성하는 관변학자들의 관심사일 뿐이지

모든 역사학자들이 관여하는 문제가 아니다”며

“교과서 내용은 중국의 국가적 입장에서 쓰여지며 소수 의견으로 변경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문화교류센터 이길성 소장은 “오늘 발표자로 참석한 3명의

중국교과서 편집인 중 동북공정에 대한 얘기를 들어본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며

“한국처럼 관심을 끄는 사안이 아니며 국가적 논쟁의 소재로 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국문화교류센터는 양국간 교류를 통해 최근 고구려사를 중국 교과서의 한국사에 추가해 싣는 성과를 거뒀다.

중국의 중학교 3학년생들이 보는 ‘세계역사(인민교육출판사)’에는 일본 내용을 빼고 상책 27쪽에

‘10세기 왕건은 고려왕조를 건립했으며,

14세기 말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건립하고 국호를 조선으로 바꿨다’ 등의 내용을 새로 넣었다.

인민교육출판사의 교과서는 중국 교육시장에서 5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한·중 교과서 세미나는 양국 교과서에 나타난 인식차를 좁히기 위해 2004년부터 해마다 열리고 있다.

이경선 백민정 기자 bokyung@kmib.co.kr

 

 

 

기사들 출처 -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143&article_id=0000039119&section_id=104&menu_id=104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05&article_id=0000257583&section_id=104&menu_id=104

 

<내용출처 : 세계속의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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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은 환웅천황이 배달국을 건국한 날

(영화 태왕사신기 1회 캡쳐 화면 : 환웅의 신시 배달국 건국 )글 : 임성용

 
10월 3일은 우리 국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개천절 (開天節)입니다.  개천절 이 시작된 것은 국조단군을 모시는 대종교에서 1900년 1월 15일 교문(敎門)을 다시 열면서 단군조선을 건국하였음을 기리는 날로 정하여 경하식을 거행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개천절  행사는 일제강점기의 암울했던 식민지배하의 상황에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상해임시정부에서도 이날을 국경일로 정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정부가 계승하여 음력 10월 3일에 지내던 행사를 양력 10월 3일로 바꾸어 지금의  개천절 이 되었습니다.

 
 
  개천절 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단군성조께서 조선을 개국한 날이기에 이 날을 기념하고 기뻐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개천절 이 단군성조께서 나라를 열기 훨씬 이전부터 있어 왔음을 아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단군왕검께서 조선을 개국하시기 이전부터 동이족의 역사는 존재했었는데, 환국(3301년), 배달국(1565년), 단군조선(2096년)으로 이어져 내려온 시대를 우리는 삼성조 시대라 이야기합니다.
 
 바이칼 호수지방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땅을 3301년 동안 7대 환인천제께서 다스렸던 나라의 이름이 환국(桓國-광명의 나라)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밝음을 숭상하며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천손민족(天孫民族)의 의식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영화 태왕사신기 1회 캡쳐 화면 : 환웅의 신시 배달국 건국 )
 
 인류의 시원문명국가인 이 환국은 약 5900여 년 전, 기후변화로 인해 나라를 이루고 있던 9부족들의 일부가 이동을 하게 됩니다. 이 때 환국의 마지막 환인이신 ‘지위리’ 환인으로부터 정통성의 상징인 천부인 3개를 받은 환웅께서 문명 개척단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지금의 백두산)에 오시어 신단수 아래 도읍을 정하고 신시를 열게 되었으니 이것이 신시배달입니다.
 
 이때
환웅천황은 하늘에 천제를 드리며 나라를 개국하는데, 이 날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10월 3일  개천절 입니다. 신시배달은 환국의 광명사상을 그대로 계승을 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개천(光明開天)의 3대 정신으로 백성들을 교화하며 1565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이 배달국을 우리는 진정한 한민족사의 기원으로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개천절 은 단군조선의 건국일이 아닌 신시배달의 건국일이며, 단군의 건국이념으로 알고 있는 홍익인간, 제세이화의 광명사상 또한 배달국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제사 올리는 천제문화
 배달국은 인류 시원문명국가인 환국시대 환인천제의 정통정신을 계승한 장자국으로서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는 천제의식을 통해 감사를 드리고, 신의 가르침을 받아 인간을 다스려왔습니다. 그것을 이신설교(以神說敎)라 하는데, 줄여서 ‘신교’라 부릅니다. 신교는 우리 민족의 삶과 함께 해온 종교로서 환국, 배달국 시대에는 신교나 배달도라 불렀으며 고조선 때는 풍류도라 하였습니다.
 
 이를 두고 신라의 최치원은 화랑의 유래를 밝힌 ‘난랑비서문’에서 ‘우리민족이 닦아온 현묘한 도는 유불선 삼교정신을 모두 포함하는 풍류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시배달의 신교의 맥은 고조선을 거쳐 고구려로 전해졌으나, 당나라의 힘을 빌린 신라의 삼국통일을 계기로 더 이상 전해지지 못하게 됩니다. 대진국(발해)으로 이어진 한 맥도 대진국의 멸망과 함께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다만 그 흔적은 남아서 이후 불교를 국교로 한 고려와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에서는 각각 ‘복원관’과 ‘소격서’를 두어 상제님께 천제(天祭, 太乙祭)를 올려왔습니다.
 
 역대의 제왕들은 제위에 오를 때 반드시 하늘의 상제님께 먼저 제사를 올렸는데, 한말의 고종임금께서도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위에 오를 때 원구단을 쌓고서 천제를 올려 하늘에 알렸습니다. 그 유적은 지금도 서울의 조선호텔 자리에 남아있습니다. 이처럼 천제는 우리에게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신교문화 즉, 상제문화의 발자취인 것입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정갈한 곳에 정화수를 떠놓고 두 손을 비비며 하늘에 정성을 드리는 모습, 관아래 칠성판을 깔고서 그 위에 시신을 얹어 장례를 지낸 것 등도 모두 신교문화의 유산입니다.

지배층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를 지내듯 평민들은 고을마다 제천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오곡이 풍성한 가을철에 수확을 하고나서 지신(地神)과 곡신(穀神) 그리고 상제님께 감사행사를 가졌습니다. 10월 상달에 지냈던 이 행사가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백제의 교천 그리고 삼한의 불구내 등입니다. 사람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나서 그 뒤풀이로 음주가무의 풍류를 즐겼습니다.
 
 이런 관습은 오늘날의 추석명절 속에 그 자취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해 수확한 햇곡식을 조상에게 먼저 천신(薦新)한 다음 온 가족이 음복(飮福)을 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줄다리기나 씨름, 강강술래 등의 놀이를 통해 흥을 돋우는 풍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올해는  개천절 과 추석이 연이어 있어 국내외 여행지를 찾는 사람이 많아 항공편 티켓을 구하기 힘든 상황이라 합니다. 오랜만에 맞은 긴 연휴를 이용해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지만, 이 땅에 나라를 열고, 하늘의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또 나의 뿌리 되는 조상님께 제사 올리던 그 정신마저 퇴색되는  개천절 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신과 민족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올바른 역사관을 바탕으로 미래를 바라볼 때 비로소 스스로의 자긍심은 물론이요, 후손들에게도 더욱 떳떳하고 값진 재산을 물려줄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 역사가 열린  개천절 을 맞이하여 선조들의 그 정신을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글 원출처 :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6.10월호 (원출처에 없는 태왕사신기 캡쳐 화면 삽입)

 

<내용출처:한류열풍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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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대왕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 까지 이르고 대왕의 위력은 사해에 떨쳤다 "
- 광개토태왕 비문 제 1면 5행 -

불과 18세의 소년왕으로 즉위하여 39세의 청년왕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광대한 영토를 정복한 최대의 정복군주였다.

각 부족이 관할하던 전사집단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국왕 직속부대와 각 나부 소속부대로 나뉘어있던 고구려의 이원적인 군사체제가 국왕의 군대이자 국가의 군대로 일원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양서 동이열전 '고구려조'는 광개토대왕이 장사,사마,참군의 관직을 신설했다고 기록했다.
장사란 중국 진나라 때 만든 관직으로 여러 사관의 우두머리라는 뜻인데 이는 광개토태왕이 그만큼 역사를 중시했음을 말해준다. 사마는 군사에 관한 사상을 관장하는 관직이며 참군은 군사에 관한 일을 보좌하는 참모기능의 관직이다. 광개토태왕릉비에는 왕사라는 관직명이 나오는데 이는 제갈량처럼 군사에 관해 자문하는 직책이다.


재위2년 (392)
 평양에 9개의 사찰을 건립했다.
백제의 관미성을 빼앗았는데 이듬해 백제의 왕숙 무가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이를 되찾기 위해 쳐들어왔을 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태왕이 정예기병 5천을 거느리고 역으로 공격하여 패배시켰다고 적었다. 관미성을 포위한 백제군을 기습해 패퇴시킨 것이다.

고구려왕 담덕이 4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 북변을 공격해 석현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백제의 진사왕은 담덕이 용병이 능하다는 말을 듣고 감히 나가 맞서 싸우지를 못하니 한수(한강)이북의 여러성이 함락되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 8년조 기록 -


재위 3년 (393) 백제가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내침하자 광개토 태왕은 정예기병 5천을 거느리고
이를 격파하였다.

재위 4년(394)에도 백제와 패하(지금의 예성강)에서 겨루어 대파하고 8천여명을 사로잡았다.
재위5년 (395) 서북방 거란족이 거주하는 요하 상류지역인 염수 방면으로 진출하여 600-700영을 격파하고 개선했다.

재위 6년(396)에도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다. 이때 백제의 58성과 700촌을 함락시키고 서울을 공략해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성하의 조약을 맺고 남녀 1천명과 왕의 동생과 대신 열명을 인질로 잡고 돌아왔다. 181p


영락 10년조(400)에는 광개토태왕이 신라 가야지역을 점령한 백제왜 연합군을 물리치고 신라를 구원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광개토태왕은 신라의 구원요청으로 5만 대군을 파견해 신라의 경주 부근까지 이르렀고 그곳을 정령하고 있던 왜군은 고구려 구원병을 보고 달아났다.
고구려군은 낙동강 유역의 임나가야까지 추격해 종발성을 함락시키고 신라군에게 지키도록 했다.
고구려는 신라 구원을 명분으로 출병해 죽령 남쪽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실성을 죽이고 눌지를 세우는 등 신라의 왕위 계승까지 개입했다.

후연의 모용성은 3만 군사를 이끌고 표기대장군 모영희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시키고 700여리를 빼앗았다.광개토대왕은 곧 반격에 나섰다.
재위 11년 광개토태왕은 군사를 보내 숙군성 (지금의 요녕성 북진)을 공격해 연나라 평주자사 모용귀에게서 성을 빼앗았다.

광개토태왕은 13년(403) 겨울 11월에도 후연을 공격했다.

광개토태왕 14년(404) 정월에는 연왕 모용희가 요동성을 공격하는 등 다툼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후연황실에 중위장군 풍발이 용성으로 잠입해 후연의 모용희를 죽이고 석양공 고운을 추대해 임금으로 삼는 사건이 있었다.고운은 고구려 출신이었다. 고운은 고구려인 고화의 손자로 무예가 뛰어나 태자 모용보를 시위하게 되었다. 고구려와 영토문제로 다투던 후연의 국왕으로 고구려 출신이 즉위한 것이다. 광개토태왕은 재위 17년 사신을 북연에 보내 축하하는데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종족의 정을 베풀었다"고 전한다.

재위 14년 (404) 왜는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의 대방지역을 침입한다.  광개토태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전해 왜 백제 연합군을 궤멸시켰다.

재외 16년(406) 후연에 대한 보복전을 전개해 잃어버린 땅을 모두 회복하는 것은 물론 대릉하 유역까지 장악할 정도로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재위 17년(407) 5만 대군을 보내 백제의 6개 성을 빼앗는 동시에 갑옷 만벌과 많은 무기 노획.

재위 20년(410) 지금의 목단강 유역의 동부여를 정벌


광개토대왕이 조공을 했다고?

삼국사기는 "광개토대왕이 재위 9년 봄 정월에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2월에 연나라왕 모용성이 광개토대왕의 예절이 오만하다고 하여 스스로 군사 3만명을 이끌고 습격했다"고 전한다.
광개토대왕이 1월에 조공을 보내자 다음달 무례하다고 공격했다는 것이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는 중국의 역사에 편입된 여러 나라들과 바깥나라들 사이의 외교관계에 대한 중국의 사서 표기 방식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외국에 사신을 보내면 무조건 '조공을 바쳤다'고 표기하는것이 상호 외교관계에 대한 중국식 사서표현이다.
대등한 외교 관계도 중국 사서들은 무조건 '조공을 바쳤다'는 식으로 표기하는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사신을 보내 다음날 후연이 '예절이 오만하다'며 공격했다는 것은 고구려의 사신이 조공사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뜻한다. 오히려 후연 국왕 모용성이 분노할 만한 요구를 한 것이다 .
아마 영토문제였으리라.

 

<내용출처:한류열풍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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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마문명의 전파]를 부도지의 표현대로 구성한 것. 

 

2만년전 신석기(전남 장흥), 1만5천년전 쌀농사(충북 청원)

1만수천년전 토기(제주 고산리) 등 세계 고고학계를 경악시키는

연대의 유물들이 남한에서 자꾸 발견되는 것을 보아도

인류시원의 문명인 [마문명]은 남한 황해 앞바다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백소씨 일행]은 멀리 [에게해 평원(지금의 그리스 앞바다)]에 정착한 것으로 본다.

그들은 [아드리아해 평원(지금의 이탈리아와 보스니아 사이 바다)에도

정착했을 것이다.

그 두 얕은 바다는 1만2천년 이상 전에는 평원이었다.

 

고대한국인이 고대그리스(에게평원)으로 이동해갔다는 근거 중 하나는

그리스인은 유럽에서는 거의 유일한 [단두형(短頭形)] 머리통이라는 사실.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인 [단두형(短頭形)] 머리통.

[단두형(短頭形)] 머리통이란 뒤통수가 비교적 덜 튀어나와서

비교적 둥근 공 모양에 가까운 머리통을 말한다.

 

[단두형(短頭形)] 머리통은 밝할인(바이칼리안)의 특성.

둥근 공 모양은 부피 당 표면적이 적어서 열손실이 적다.

즉 추위에 강하다.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밝할인(바이칼리안)의 특성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민족.

 

밝할인(바이칼리안)이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서

직접 그리스로 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밝할인(바이칼리안)이 바이칼 호수 지역을 탈출할 때에는

별다른 문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본다.

극한적 기후에서는 문명을 발전시키기 어렵다.

열대나 한대에서는 고도문명이 생기지 못한다.

고도문명은 온대지방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혹독한 추위의 바이칼호수 유역을 탈출한 밝할인(바이칼리안)들이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아서 무조건 남하하고

황해평원에 도착하여 당시 원주민들과 만나서 시너지효과가 일어나고

그리하여 한민족의 원형이 탄생하고

그들 중 일부가 고대 그리스 지역으로 이동해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이 오랜세월 백인들과 혼혈이 되었지만

아직도 [단두형(短頭形)] 머리통이 많은 것으로 본다.

고대그리스인들이 '세상이 물,불,공기,흙으로 되어있다' 고 생각한 것도

한국 고대의 [지수화풍(地水火風)] 사상과 너무도 흡사하다.

 

물론 고대한국인들이 고대그리스지역으로 이동할때

개도 데리고 갔을 것이다.

세계학자들은 개가 동북아에서 처음 길들여졌다는 것을 이미 발견했고

1만5천년전에 사람을 따라서 이동을 시작했다는 것도 알아냈다.

물론 고대한국의 개가 세계로 퍼진 것으로 본다.

사람을 따라서.

 

 

이동해간 고대한국인들은 주로 [에게해 평원]과 [아드리아해 평원]에

정착했을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에게해]는 지금도 [전설의 바다]로 불리고

[아드리아해]옆의 보스니아에서는 놀라운 고대 피라미드가 발견된다.

 

 

 

 

보스니아 피라미드 주변에서 나온 돌알들 중 일부.

 

보스니아 피라미드 사이트

  http://www.piramidasunca.ba/

 

 

보스니아 피라미드 주위에서 위와 같은 큰 돌알들이 많이 나왔는데

이는 중국에서도 발견되었다.

 

 

뉴스기사 -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105&article_id=0000006261&section_id=104&menu_id=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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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원조한문명(마문명)이 중국을 거쳐서 멀리 발칸(밝한)반도까지 갔고

이 사람들은 1만2천년 이상전 황해가 물에 잠기기전에

서쪽으로 이동한 [백소씨 일행]이 아닌가 한다.

 

[백소씨 일행]은 중국을 말하자면 '그냥 스쳐지나가듯이' 한 것 같고

중국대륙은 그 문명을 계승 발전시키지 못한다.

 

중국이 문명화 된 것은 후에 [환인씨 문명]에 의해서이다.

[환인씨]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그 [환인씨]이고

고대에 [씨]라는 말은 극존칭이었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시조가 [황제헌원씨]라고 주장하는데

[황제헌원씨]는 고대 동이족의 임금이었던 [치우의 나라]로부터 

독립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

 

고대 그리스 쪽으로 이동해간 [백소씨일행]은

[에게평원]과 [아드리아 평원]에 정착하여 문명을 건설하고

대서양 섬들에도 진출한 것 같다.

1만2천년 이상 전에는 빙하기라 바다물이 적어서

섬들이 지금보다 많았고 지금 있는 섬들도 지금보다 크기가 더 컸다.

 

그러한  [백소씨일행]과 그 후손들의 문명에 대한 전설이

바로 아틀란티스 전설이라 본다.

플라톤은 고대 전설을 소개하면서 그것이 기원전 9천5백년전 이야기라 했다.

즉 1만1천5백년전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것은 아틀란티스가 그때 물에 잠겼다는 얘기다.

 

1만 2천년전 정도부터 빙하기가 끝나고 바다물이 높아지면서

당시 사람들이 많이 살던 낮은 평야지대가 대부분 물에 잠겼다.

황해도 1만2천년전부터 잠기기 시작해서 8천년전에는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그러므로 플라톤이 1만1천5백년전에 아틀란티스가 물에 잠겼다 한 것은

상당히 정확한 표현.

 

빙하기에 대한 연구는 현대 들어서 시작된 것인데

수천년전 플라톤이 그 연대를 정확히 말하고 있는 것.

 

아틀란티스의 흔적이 지금 땅위에 남아있는 것은 없을까.

 

멕시코 동부의 피라미드들을 보자.

 

 

 

 

 

 

 

 

 

 

 

 

이  [태양의 피라미드]는 약 250만 톤의 돌과 흙을 사용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이 피라미드 내부에서 넓은 방과 터널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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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유적들은 고고학적 관점에서도 너무나 경악스러운 유적들.

 

언제 만들었나.

- 최소한 수천년전

누가 만들었나.

- 모른다.  

 

이것이 솔직한 고고학자들의 견해다.

저 피라미드들은 지금 정글 속에 있다.

그러나 1만년전 저 곳은 평야지대였을 수도 있다.

 

이 피라미드들을 만든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나서 이것들을 만들었는데

그 [문명]은 계승되지 않았다.

이 피라미드를 만든 사람들이 죽거나 다른 곳으로 간 이후에는

이 [문명]도 사라졌다.

즉 당시 [원주민]들이 살던 그 땅에 [고도 문명인]들이 갑자기 나타났고

그들이 저 피라미드들을 만들었고

당시 그 [문명인]들과 [원주민]들의 [수준]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 [문명]은 계승되지 못했다.

 

세계고고학계도 백인들의 세력이 강하다.

그래서 유럽이외의 지역에 있는 유물들에 대해서는

연대를 깍아내리는 경향 많다.

 

위 피라미드들의 연대가 1만년 이상 전 것이라 해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오래된 것이라고 해서 꼭 수준이 낮은 것이라 볼 수는 없다.

현대과학으로도 아직 [고려청자]를 제대로 복원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고조선 것이라는 [다뉴세문경]도 아직도 제대로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옛날에 만들어진 이집트 대피라미드도 현대의 최첨단 빌딩보다

더 정밀하게 수평을 맞춰서 지어져 있다.

 

꼭 현대의 것이 최고라는 교만은 버려야한다.

 

위의 멕시코 동부 피라미드들이 [백소씨 일행]의 아틀란티스의 것인지

아니면 마문명에서 남쪽으로 즉 태평양 쪽으로 진출한

[흑소씨 일행]의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흑소씨 일행]에 대한 이야기는 [잃어버린 무대륙]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잃어버린 무대륙]이라는 책은 영국인이 인도에 가서 옛 기록 등을 보고 쓴 책

1926년 영국 육군의 예비역 대령인 제임스 처치워드가 『잃어버린 무 대륙(The Lost Continent of Mu)』이라는 책을 쓴다.

 

1만2천년 이상 전 당시에는 태평양에도 섬들이 지금보다 많았고

지금 있는 섬들도 훨씬 더 컸다.

 

그러므로 아틀란티스 이야기가 대서양에 있던 많은 섬들 이야기라면

무대륙은 태평양에 있던 많은 섬들 이야기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무대륙인들]의 고향 즉 원조는 [황해대평원 마문명]

 

 

모아이 (칠레 이스터섬)

 
모아이의 제작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모아이는 황해평원 마문명에서 퍼져나간 마야문명인들이나 
그 후손들이 만든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모아이의 뜻은 [모아의 사람(이)] 즉 [마아의 사람(이)]
즉 [마 땅(아)의 사람(이)]를 뜻한다.
 
지금 마야문명은 중남미에서만 존재하는 듯 알려져있지만
그리고 겨우 수천년전 문명이라 알려져 있지만
그건 마야문명이 [최소한 수천년] 되었다는 것이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그리고 마야인들이 [서쪽의 고향나라]에서 왔다고 
기록해 놓은 것은 상당히 유명한 얘기.
마야인들은 [서쪽]으로부터 중남미로 들어온 것. 
 
필자는 [마야문명]이라는 것이 중남미에 다다르기 전 이미 
태평양의 많은 섬들에 전파되었고 
(당시에는 섬들도 많고 컸다.)
1만2천년전부터 빙하기가 끝나면서 바다물이 높아지면서
당시 마야문명의 중심지였던 낮은 평야지대들이 물에 잠겼던 것으로 본다.
지금 남아있는 마야유적들은 사실 변방의 유적들이거나
후대에 겨우 명맥을 이은 정도의 문명으로 본다.
지금도 고려청자를 만들긴 하지만 고려시대 진짜 고려청자만 못하듯이
지금의 마야문명 유적이라는 것들이 대부분
진정한 고대 마야문명(무대륙)의 진수를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보는 것. 
 
앞으로 과학이 더욱 발전하고 수중고고학도 발전한다면 
언젠가는 고대문명의 진수들이 바다 속 도처에서 발견될 것이다.   
 
태평양의 섬들과 중남미 까지 뻗어간 마야문명
즉 잃어버린 무대륙 문명
즉 황해평원 원조 마문명의 태평양쪽 전파.
 
마야란 말은 마이아 즉 [마이 사람], [마이의 땅]이라는 뜻.
마이라는 말은 [마 사람(이)]라는 뜻.
즉 마야문명은 [마 사람들의 문명]
 
태평양 섬들의 마야문명은 돌로 사람형상을 만들어서 
바다가에 세우는 풍습이 있었나 보다. 

 

[제주도 돌하루방]

 

돌하루방과 모아이는 둘 다 모자를 쓰고 있고

두 손을 배에 모으고 있는 것도 같다.(예절의 표현인듯.)

 

원래 열대지방 사람들은 모자를 쓰지 않는다.

더우니까.

그런데 모아이는 왜 모자를 쓰고 있을까.

그런데 모아이의 [모자]는 그냥 모자가 아니라

[예의상 특별히 만들어 쓴 모자]인 형태가 역력하다.

 

4천년전 중국 고대책이라는 산해경을 보면

한반도 중남부에 있었다는 [군자국]에 대한 글이 나온다.

 

[君子國 在其北 衣冠帶劍 食獸 使二大虎 其人好讓不爭 有薰華草 朝生夕死 ]

 

" (한반도 중남부에) 군자(君子: 위대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있는데

'격식을 갖춘 옷'을 입고 '격식을 갖춘 모자'를 쓰고

'격식을 갖춘 허리띠'를 두르고, 칼을 차고 다니고,

짐승을 기르고, 큰 호랑이 두마리를 부리는데
그 사람들은 양보하기를 좋아하고 싸우지 않는다. (好讓不爭) 
무궁화(薰華草:훈화초)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

 

고대 한반도 중남부에 있었다는 [군자국]의 특징 중 하나가

'격식을 갖춘 모자'를 썼다는 것.

 

( 나중에 중국도 이를 따라서 '격식을 갖춘 모자'를 쓰게 된다.

그것을 관(冠)이라 한다.)

 

'격식을 갖춘 모자'를 쓰고 있는 모아이.

 

마야문명(태평양 + 중남미)이 황해평원 마문명이 전파된 것이라는

증거 중 하나 정도는 될 것이다.

 

그리고

이스터섬 모아이도 대부분 바닷가에 세워져 있고

[제주도 돌하루방] 역시 원래 바닷가에 많이 세웠던 것으로 본다.

 

배를 타고 가다가 섬을 만난다.

그럼 주로 해안가만 보인다.

그런데 그 섬에 사람이 살고 있는지 아닌지 보통 알수가 없다.

그 섬에 상륙할 것인지 아닌지 판단이 아렵다.

 

그래서 섬 주민들이 해안가에 사람형상을 세운다.

우리가 여기에 있다.

이런 뜻으로.

 

배를 타고 가던 사람들은 그 형상을 보고

그 섬에 누가 살고 있는지 대강 알 수 있다.

태평양의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았던 섬들에 살던 사람들의

하나의 문화, 풍습으로 보인다.

[흑소씨 일행]은 태평양 쪽으로 난생신화와 쌀농사, 고인돌을 전파한다.

[황궁씨(환인씨)]는 [환웅씨]로 통칭되는 지도자를 보내서

문명을 전파한다.   

 

 

한국은 유일하게 천손신화와 난생신화가 모두 존재하는 곳이고

고인돌의 종주국.

(세계 고인돌의 절반이상이 한반도에 존재하고 

가장 오래된 고인돌도 한반도에 있다. 전남 화순 - 8천년전 것.)

게다가 충북 청원에서 세계 최고(古)인 1만5천년전 쌀농사가 발견되는 등 

한국은 쌀농사, 고인돌의 종주국.

 

그러므로 한국의 쌀농사, 고인돌이 동남아, 인도로 전파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라 하겠다.

난생신화도 함께 전파.

 

인도에는 2가지 큰 언어가 있다.

드라비다어와 아리안어.

아리안어가 들어오기 전에 고대 인도인들은 드라비다어를 썼다.

 

그런데 그 드라비다어가 한국어와 흡사하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글들이 나오고 있으므로 생략하고

 

한가지만 예를 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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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 닝가룸 서울 완돔          - 인도 드라비다어 타밀방언

나는 너(니)랑 서울 왔다        - 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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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비다어는 고대한국(마문명)에서 남쪽으로 문명을 전파한

쌀농사, 고인돌 문화를 동남아와 인도에 전파한 사람들이

전해준 말로 보인다.

 

 

고대 마문명에서 서남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은

동남아 일대로 모두 갔겠지만

일단 특히 베트남으로 많이 갔을 것이다.

 

지금도 베트남은 [단두형(短頭形)] 머리통으로 유명한 나라 중 하나다.

 

베트남 국토는 왜 저리 길쭉한가.

마문명에서 배를 타고 이동한 사람들이 베트남에 도착해서

살기좋은 해안가 평야지대에 주욱 늘어서 정착하고

지금까지 그 영토를 지켜오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베트남인들의 독립정신은 유명한데 그 정신의 뿌리는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선조의 정신일 것이다.

마야(마문명)으로부터 건너온 그 선조들의 정신.

 

지금도 베트남인들은 정서적으로 한국인과 가까운 것 같다.

외국인중에 특히 베트남인들이 한국인과 많이 결혼하는 것도

다 그 이유가 있다 하겠다.

베트남의 영웅이라는 호지명(호치민)이 유독 한국인인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늘 가지고 다녔다는 것도 다 그 이유가 있다 하겠다. 

 

 

베트남보다 더 서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은 태국, 버마, 인도 등으로 간 것으로 본다.

이리하여 베트남, 태국, 버마, 인도 등에서는 1만년 이상 전부터

쌀농사를 짓게 된다.

이들 나라에서 이렇게 오래전부터 쌀농사를 지었다는 것은

갈수록 많은 관련 유물들이 나와서 언론에도 보도되고 있다.

 

충북 청원 소로리에서 발견된 1만5천년전 재배 볍씨에는

자포니카와 인디카 2종류의 벼들이 모두 발견되었다.

 

(벼에는 크게 2종류가 있다.

자포니카 - 한국 일본 등에서 기르는 찰진 볍씨

인디카 - 동남아 인도 등에서 기르는 푸석푸석한 볍씨)

 

즉 고대 한국에서는 자포니카와 인디카 2종류의 벼들을 모두 길러먹었고

이 벼들이 퍼져나가면서 각 지역의 기후에 따라서

1종류를 선택해서 길러먹게 되었다는 것.

 

인도의 고대 기록에 마야인(마문명인)들이 들어온 것을

" 동쪽에서 마야인들이 버마를 거쳐서 들어왔다." 고 해 놓은 것도 

상당히 유명한 얘기인데 당연히

위 그림처럼 버마를 거쳐서 들어갔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제임스 처치워드가 인도의 오래된 힌두교 사원에서 얻은

점토판 중 하나의 그림으로 유명한 것이다. (나칼 비문)

 

이 그림을 보면 태양과 개가 나온다.

예로부터 한국은 동방의 해뜨는 나라로 유명했고

고조선의 한국어인 아사달이란 말 자체가 [해뜨는 땅]이라는 뜻.

[한국]의 [한]이라는 말도 태양을 뜻하는데

태양을 한국어로 원래 [하]라 했고 

[하+이(존재)]가 되어 지금은 [해]라 한다.

한(韓)이라는 한자도 좌측을 보면 태양(日)이 빛나(十)고 있다.

(오른쪽 韋 자는 위대하다는 뜻.)

 

그리고 위 그림의 태양 속에 용같기도 하고

새같기도 한 것이 있는데

고대한국에서는 태양속에 삼족오가 살고 있다고 믿었다.  

 

개는 동북아에서 처음 길러져서 사람을 따라 세계로 이동한 것으로

이미 세계학자들이 유전자검사로 밝혀낸바 있다.

 

이렇게 (나칼 비문) 중 하나라는 위그림은

마야인들이 고대한국 마문명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하겠다.

 

 

요새 [드라비다어가 한국어와 비슷하다]는 글 중에 많은 글들이

마치 인도에서 쓰던 드라비다어가 한국으로 전파된 것처럼

거꾸로 얘기하는 글들이 있는데

이는 고고학적 발견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은 탓일 것이다.

 

쌀농사나 고인돌이나 토기나 신석기나 배만들기나

한국이 인도보다 최소한 수천년 빠르다.

 

이렇게 언론에도 이미 보도된 사실이 간과되고

아직도 인도에서 건너왔느니 어디서 건너왔느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선5백년간의 극심한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일제의 식민전략에 의한 한국인 기죽이기  

이런 세월을 수백년 보내다 보니 자신감이 없어져서가 아닌가.

 

이제 한국인은 이러한 것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가져야한다.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것은 사기다.

하지만 있는 것도 없는 것처럼 기가 죽는 것은 바보다.

 

가면 갈수록 한반도에서 세계최초의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사필귀정이라는 것.

 

그토록 강대국들에게 오랜세월 억눌려 살아왔으면서도

한국인들은 아직도 쪽바리, 짱깨, 양놈들 등의 용어를 흔히 쓰며

근본적으로는 절대 기가 죽지 않는다.

 

이는 어디서 나온 힘인가.

무의식적으로라도 한국이 문명의 원조 종주국이었음을

느끼고 있는 것 아닌가 한다. 

 

물론 남을 미워하는 것은 좋지않은 일이고

세계는 화합해야 한다.

하지만 쓸데없는 자기민족비하는 없어야 한다.

교만과 자학은 둘 다 안좋은 것.

 

 

마야인들 즉 황해평원 마문명인들이 동남아, 인도에만 갔겠는가.

1만2천년 이상 전에는 바다에 섬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고 컸다.

( 8천년전까지 바다에 섬들이 많고 컸다.)

 

이렇게 태평양의 많은 섬들로 퍼져나간 마문명 사람들은

자신들을 [마이]라 했을 것이다.

이는 [마 사람]이라는 뜻.

지금도 한국인은 사람을 [이]라고 많이 부른다.

가는 이, 오는 이, 그 이 , 저이.

 

그 [마이]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마이아]라 불렀을 것이다.

이는 [마이의 땅]이라는 말.

[아]는 원래 [떠오르는 태양]을 뜻하는 원시 한국어.

 

아 - 떠오르는 태양

하 - 밝게 떠오른 태양

라 - 가장 밝게 떠오른 태양

 

이 [아]라는 말이 나중에는 [태양이 떠오르는 땅]

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아달(아사달)의 준말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마이(마 사람)]

[마이]를 줄여서 발음하면 [매]가된다.  

지금도 한국의 사투리 중에 [어매(어머니)], [아지매(아주머니)]

등 [매]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를 보아도 [마문명] 때는 모계사회

지도자가 여성이었던 것으로 본다.

세계 학계도 약 1만년 전 정도까지는 모계사회로 본다.

 

 

이렇게 태평양쪽으로 이동해간 사람들은

태평양의 많은 섬들에서 문명을 이루고 살았던 것 같다. 

제임스 처치워드의 [잃어버린 무대륙]이라는 책 등에도

태평양 섬들에 있는 거석문화등 고대유물유적을 증거로 들고 있다.

물론 정말 중요한 유물유적들은 지금 바다속에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즐겨살던 낮은 평야지대가 바다가 되었으므로.

 

마문명인들은 섬들을 건너건너 중남미로도 갔을 것이다.

그것이 유명한 중남미의 마야문명이라는 것.

 

수백년전 스페인이 마야의 마지막 후손들의 나라를 찾았을때

그들을 저항을 하지 않고 몇 안되는 스페인군대에 무너진다. 

저항을 못한게 아니라 하지 않는다.

이는 역사학계에서 아직도  불가사의로 여겨지는 사실.

그들이 저항했다면 숫적으로 아주 적었던 스페인군대는 살아나기 힘들었다.

마야의 마지막 후손들은 왜 저항을 하지 않았을까.

    

마야의 후예들에게는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이 있었다.

언젠가 머나먼 고향땅에서 [신과 같이 위대한 분]이 오신다는 것.

자신들의 선조를 멀리 떠나 보낸 그 [하느님 같은 분]이 

언젠가는 뒤따라 직접 오실 것이라는 것.

그 [위대한 분]은 천둥 벼락도 마음대로 치시는 분이라는것.

이런 전설을 어려서부터 듣고 자란 마야의 후예들은

스페인군의 총소리를 천둥 벼락치는 소리로 착각한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스페인군을 극진히 환영한다.

그러나 그들은 전설의 그 [위대한 분]이 아니었고

마지막 중남미 마야국은 허망하게 무너진다.

 

 

1만년 이상전에 동남아를 통하여 건너간 마문명인들이

인도에 전해준 고대한국어가 [드라비다어]이고

약 3천5백년전에 중앙아시아쪽에서 [아리안]이 인도에 들어와서

전해준 언어가 [아리안어]

이 언어를 보통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라 부른다.

 

세계학자들에 의하면 [아리안]은 이미 7천년전에

[어딘가로부터] 중앙아시아로 이동해 왔다.

 

그런데 이 [아리안]의 모습이 동북아인 즉 고대한국인!

 

[알타이 파지릭 고분에서 발굴된 그림]

 

위 그림에서 보이듯이 고대 인도의 [종교+정치 지도자 계급]

즉 제1계급 [브라만]은 [동북아시아인]

(말을 탄 제2계급 크샤트리아는 백인의 피 많은 모습) 

 

삼국유사에 보면

석유환인 위제석야 (昔有桓因 謂帝釋也) 란 귀절이 있다.

" 옛날에 환인(桓因)이란 분이 있었는데

이분은 불경에는 제석(帝釋) 즉 하늘의 임금 중 한분으로 나온다."

는 얘기.

한민족의 고대이야기에 왜 불경의 [하늘의 임금]이 튀어나오나. 

 

[아리안]은 만주 ( 특히 압록강 유역)에서 건너간 사람들.

(그들의 후손 중 한분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

그 [아리안(알이안)]의 전설적 임금 중에 [환인]이란 분이 계셨고

[아리안]의 후손인 브라만이 쓴 책인 불경에

[환인]이란 분이 [하늘의 임금]으로 나오게 되고

이를 삼국유사의 저자가 [환인 위제석야(桓因 謂帝釋也)]라고 기록해 놓은 것.

 

삼국유사에 보면 [환인씨]는 문명을 전파하기 위해

[환웅씨]를 [삼위 태백]으로 보낸다.  

[삼위 태백]은 작은 의미에서 보면 [진한]지역을 뜻한다.

 

 

백두산이 태백산이고 삼위는 요하 부근 어디쯤으로 본다.

( 이미 요하지역에서 홍산문명이 발견되어 고고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환인씨 문명의 흔적 ( 혹은 그 후손들의 흔적)은

압록강 유역에서 많이 나타난다.

 

 

압록강 유역 집안 등에는 피라미드가 1만2천기나 있다.

장군총, 태왕릉도 그 중 하나인데

장군총, 태왕릉이 고구려때 것이라는 근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고구려보다 훨씬 전 것이라는 근거 많다.

 

압록강 유역에는 아예 [환인]이라는 도시도 있다.

 

 

고구려의 그 막강했던 자부심은 어디서 나왔는가.

물론 고조선 계승자를 자처했던 점 도 있다.

더 근본적으로 고구려는 [환인씨의 나라] 중심지역에서 건국했다.

바로 그 지역에서.

 

그래서 중국당국은 [환인씨의 나라] 유적들을 많이도

고구려 유적으로 '둔갑'시켰다.

한반도-만주에 황하문명보다 빠른 문명은 없다고 조작하기 위해서.

그러다 도저히 안되니까 소위 동북꽁정을 시작했다.

'아예 납치하지 않고서는 답이 안나온다' 고 판단했으므로.

그리하여 중국은 만주고대사 납치를 위해서 난리를 치고 있다.

 

동북꽁정이라는 소리를 넘어서 [탐원꽁정]

즉 [근원을 찾는다]는 소리까지 하더니

요새는 아예 길림성 통화현 신별유적에

[여명문화] 즉 [처음 시작한 문화]라 이름 붙이면서

정말 본격적인 [만주고대사 납치]를 준비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통화현 신별유적의 발국품들을 전혀 공개하지 않고 있다. 

때가 되면, 만주고대사 납치에 완전 성공했다고 판단되면,

그때 세계에다가 대고 대대적으로 떠들어 댈 생각으로.

" 세계인들아 봐라 이 놀라운 만주 고대사를." 하고

 

중국당국이 [탐원꽁정], [여명문화] 같은 말들을 하는 걸 보면

그들도 필자의 주장처럼 [환인씨의 나라의 놀라움]과 

세계로의 문명전파 (환웅씨 - 아리안)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목을 매고 있을 것이다.

'백인들에 대한 컴플렉스를 한방에 날려버릴수 있는 찬스'이자

'중국이 세계문명의 시원국가'로 올라설 수 있는 찬스' 라 생각할 것이므로.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수는 없는 법.

 

객관적으로 누가봐도 만주고대사는 한국고대사다. 

 

 

작은의미의 [삼위 태백]은 한반도북부와 만주.

하지만 큰의미로는 중국북부지방 등을 통털어 [삼위 태백] 이라 한다.

삼위산은 돈황부근에 있고 태백산은 북경부근에 있다. 

 

부도지를 보면 황궁씨가 마문명에서 천산주(백두산부근)으로 이동한 것이

최소한 1만2천년 이상 전 일. (황해에 바다물이 들이차기 전)

그리고 [황궁씨-유인씨- 환인씨]로 계승되는데

이 세분을 통털어 [환인씨]로 부른다고도 하니

[환인씨의 나라]는 최소한 1만 2천년 이상 전부터 있었던 것.

그 나라 역대 임금을 모두 [환인씨]라 불렀다고도 볼 수 잇다. 

 

삼국유사에 [환인씨가 환웅씨를 보내서 문명을 전파했다]는 표현은

[수천년간에 걸쳐서 역대 임금(환인씨)가 젊은 지도자(환웅씨)]를 

미개한 지역에 문명을 전파하러 계속해서 보냈다.]는 사실을 

아주 단순하고 짧게 표현한 것으로 본다.   

 

 

마문명에서 남쪽으로 전파된 문명에서는 [난생신화]가 나타나고

환웅씨가 가는 곳에는 [천손신화]가 나타난다.

 

이 [천손신화] 지역이 바로 환웅씨가 문명을 전파한 [삼위 태백]

 

그들은 나중에 보통 [훈]족이라고도 불리는 종족들. 

당시 [삼위 태백]인들은 태양을 [ㅅ훈] 즉 [SHUN]이라 불렀다.

 

그들이 바로 [아리안(알이안)]이고

[SHUN]이 바뀐것이 영어의 태양 (SUN)으로 본다.

어차피 영어도 아리안의 언어가 그 뿌리라는 것이 이미 세계학계의 정설.

 

이미 7천년전에 중앙아시아에 나타났다는 아리안(알이안)

그리고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대부분의 유럽어의 모태이자

인도 범어(산스크리트어)의 모태인 아리안어를 전해줬다는 아리안.

그래서 히틀러가 그토록 찾아헤맨 아리안의 원형.

   

아리안(알이안)은 스스로를 아리 즉 [알이]라 불렀다.

[알]은 고대한국어로 태양을 뜻한다.

[알이]는 [태양의 사람들] 이라는 말.

 

고대한국에서는 최소한 수천년간에 걸쳐서 수많은 [아리(알이)]들이

많은 환웅씨를 따라 문명을 전하러 머나먼 길을 떠났을 것이다.

그 사명을 받은 사람들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이 바로 [알이]

 

한번 떠나면 살아생전에는 돌아올 수 없는 길.

마지막 이별.

그런 [알이(아리)]가 고개를 넘어간다.

저 고개를 넘어가면 보이지 않는다.

살아서는 다시는 볼수 없다.

너무나 먼길을 가기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

알이랑 고개.

아리랑 고개.

 

(고대한국어로 [라]는 아주 밝은 태양을 뜻한다.

[랑]은 아주 밝은 태양 같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본다.)

 

지금은 한국인들도 도대체 [아리랑 고개]가 뭔지 모른다.

그게 무슨 고개이며 왜 슬픈지 모른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안다.

뭔가가 슬프다.

아주 슬프다.

살아생전 다시 볼 기약이 없는 고개가 [아리랑 고개]이므로.

 

왜 우리나라 근본이념이 [홍익인간]인지 알 수가 있다.

민족을 초월하여 사람을 잘되게 하라는 [홍익인간]의 정신.

그 위대한 정신을 실현하느라 고대한국인들은

참 많은 슬픔과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세계에 문명이 전해졌다.  

 

 

아리안이 중앙아시아에 이미 7천년전에 나타났다는 것은

[환웅씨 일행]이 최소한 7천년전부터 문명을 전하러 세계로 떠났다는 얘기다.

[환인씨]가 1人이 아니라 압록강 유역의 [환국]의 역대 지도자를

모두 [환인씨]라 했듯이   

[환웅씨] 역시 한사람이 아니라 [문명을 전하러 떠난 알이 일행의 지도자]를 

모두 [환웅씨]라 했다고 본다.  

 

한무리의 [환웅씨 일행]은 지금의 이라크에 도착하여

수메르문명 즉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다. 

 

[5천년전에 만들어진 수메르 왕조 지도자 '구데아(gudea)'의 인물상]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을 [머리카락이 검은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강조했다.

 

수메르문명은 [어디선가 갑자기 문명을 다 가지고 나타난 사람들에 의해

생긴 문명]으로 고고학계에서 유명하다.

 

고고학계에서 수메르인들에게 [인종의 섬]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그들이 그 주위의 인종들과는 전혀 다른 인종이기 때문.

 

[수메르에서 발견된 씨름하는 사람들 유물]

  

원조 수메르인들은 차차 주위 다른민족과 피가 섞이지만  

씨름문화, 장독문화 등을 지켜간다.

 

<내용출처:세계속의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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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고대 해안선은 1만2천년 전 해안선.

당시 지금의 황해(서해)는 바다가 아니라 대평원(육지)였다.

(1만2천년전~8천년전에 바다물이 들이차서 황해는 바다가 된다.)

 

필자는 고대 황해대평원 대강(大江)의 동쪽 지역(원조 아사달)이

한민족 문명의 시작이자 세계문명의 시작이라 본다.

그 문명을 [마문명]이라 이름 붙인다.

 

마문명의 흔적은 여러가지 나타나는데

 

전남 장흥군에서 발견된 2만년전 신석기

충북 청원군에서 발견된 1만 5천년전 쌀농사

제주도 고산리에서 1만 수천년전 토기 등이다.

 

 

전남 장흥군의 2만년전 신석기 사진

 

신석기의 경우 세계고고학계는 [1만년전 신석기혁명]을 통하여

세계가 처음 신석기를 쓰게 됐다고 보고 있었는데 

한반도에서 무려 2만년전 신석기가 발견됨으로해서

[1만년전 신석기혁명] 이론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하겠다.

 

그런데 그 2만년전 신석기는 구석기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즉 당시 전남 장흥은 지금보다 훨신 더 [산골]이었는데

(바다가 낮아서 황해가 평야였기 때문)

어디선가 선진문물 즉 [신석기]가 들어왔다는 얘기고

그 문명이 바로 황해대평원 [마문명]에서 전해졌다고 본다.

쌀농사, 토기 역시 마찬가지.

 

 

위 그림의 청천강에서 제주도까지의 지역은

고대에 [마한]이라고 불려졌던 곳.

마한은 한자로 마한(馬韓) , 마한(摩韓) 등으로 표기됐는데

 

마한(摩韓)의 마(摩)는 [갈 마] 자.

숫돌 같은 것에 뭔가를 간다는 얘기.

 

이 마한 지역에 속한 전남 장흥에서 최초의 신석기가 발견되었으니   

왜 마한(摩韓)이라 이름 붙였는지 다 그 이유가 있다 하겠다.

 

궁예가 나라이름을 마진국(摩震國)으로 한것도

마한(摩韓)과 진한(震韓) 즉 한반도와 만주를 다시 모두 되찾겠다는 소리.

 

그런데 마한(馬韓)이라는 이름은 왜 붙었을까.

한반도의 상징이 말?

 

이는 말이 처음 길들여졌던 곳이 고대 황해대평원이고

그래서 마한(馬韓)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제주도 조랑말

출처 - http://www.jtg.co.kr/m_special/0611/0611_spe_01.htm


국산 토종의 제주도 조랑말은 개량마에 비해 몸집이 작으나

성격이 온순하여 위험부담이 없고 힘도 세고 기민해서 승마감이 좋다.

 

몽골말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한국말이 몽골로 갔다고 보는 것을 옳을 것이다.

 

이는 시베리안 허스키가 한국에 와서 진도개가 된 것이 아니라 

진도개가 시베리아에 가서 시베리안 허스키가 된 사례와 같다.

 

위 관련글을 보시면 세계학자들이 개의 기원지를

동북아까지는 찾아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개의 기원지가 일단 만주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들도 주장하는 것처럼 1만5천년전부터 이미 개가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고 

그 당시에 황해(서해)는 대평원이었다.

그리고 만주는 지금보다 훨씬 더 [고원지대]에 속했다.(바다가 낮아서)

사람이 평원지대에 많이 사나 고원지대에 많이 사나.

당시 황해평원은 만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러므로 [첫 문명]은 만주가 아닌 황해평원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도 한반도의 인구밀도는 세계1위.

산까지 합하면 세계3위이지만, 산을 빼고 사람이 살수 있는

평야지대만 놓고 보면 세계1위다.

사람이 많이 몰려산다는 것은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얘기.

사막 등 사람이 살기 안좋은 곳에는 인구밀도가 낮다.

 

한반도의 물은 사람이 오염만 안시키면 참 맑은 물.

그냥 마셔도 아무 문제가 없다.

이런 곳은 세계적으로 드물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포도주와 맥주를 많이 마시는 이유가

그 나라들의 물은 대체로 불순물이 많아서 그냥 마시기 어렵기 때문.

중국의 황하도 진흙탕 물.

 

예로부터 한국을 금수강산이라 한 것이 괜한말이 아니다.

 

한반도의 물이 맑은 이유 중 하나는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온지 굉장히 오래된 땅이라는 것.

 

한반도는 최소한 1억 4천만년 동안 바다에 가라앉은 적이 없다.

 

 

[우포늪 - 경상남도 창녕군]

 

우포늪은 1억 4000만 년 전에 만들어진 습지.

세계학자들에게 유명한 습지다.

 

한반도는 오래도록 바다에 가라앉지 않은 땅이기 때문에 

땅에 소금기가 별로 없다.

그래서 한국땅은 육지식물이 자라기에 아주 좋은 곳이고 

그것이 한국의 농산물이 품질이 좋은 이유 중의 하나.

 

한국인이 소금을  많이 먹는 큰 이유가

한국 농산물에 소금기가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반도의 물이 맑은 이유 중 또 하나는

한국땅에 오래도록 화산, 지진 등 지각변동이 별로 없었다는 것.

 

한국은 판 구조상 원래 지진이 별로 없는 지역.

(일본은 바로 옆에 있지만 한국과 지각판이 다르다.) 

 

그리고 한국은 백두산과 한라산을 제외하면

오래도록 화산이라는 것이 없었다.

 

한국의 산들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되어있는데

화강암은 땅속 깊숙히에서 만들어지는 것.

즉 한국의 산들은 원래는 높은 산들이었는데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깍이면서 낮은 산이 되었고

급기야는 땅속 깊이 있던 화강암들이 드러나게 된 것.

 

[북한산 - 화강암 바위]

 

화강암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화산활동이 멈춘지 오래되었다는 것.

 

화산이 폭발한지 얼마 안될수록 현무암이 많다.

 

 

[현무암]

 

 

이렇게 오래도록 화산폭발이 없었던 한반도는 

공룡들의 마지막 낙원이었다.

 

쥐라기 때 번성했던 공룡들이 

공룡시대 말기인 백악기 때에는 세계적인 화산활동을 피해서 

한반도로 몰려들었다.

 

한반도에서는 단일면적당 공룡발자국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익룡(하늘을 나는 공룡)의 발자국과 중생대 새 발자국 화석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고 연구된 곳도 바로 한국땅 !

 

황해평원은 지구기온의 변화에 따라

육지(빙하기)였다 바다였다를 반복했다.

한반도가 공룡들의 낙원이었을 때

황해대평원 [대강의 동쪽] 즉 [원조 아사달] 지역에는

한반도보다 훨씬 더 많은 공룡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대평원이었으므로.

 

[대강의 서쪽] 즉 중국쪽에는 공룡들이 덜 살고 있었을 것이다.

공룡들도 살기 좋은 곳에 많이 살았을 것이므로.

공룡 발자국이 중국 동해안보다 한반도에서 더 촘촘히 

발견되는 것이 그 증거 중 하나라 하겠다.

 

그런데 5억년전에는 [한반도-만주-산동반도]가 중국대륙과 떨어진

별개의 하나의 대륙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위 지역이

5억년 전에는 아예 [하나의 별개의 대륙]이었다는 것이 드러난 것.

 

<내용출처 : 한국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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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억년전 살았던 [삼엽충]을 연구한 결과

[한반도-만주-산동반도]가 중국대륙과는 별개의

하나의 대륙이었다는 것이 증명됐다.

 

당시 [한반도-만주-산동반도]에 살던 삼엽충과

중국대륙에 살던 삼엽충이 종류가 다르다는 것이 드러난것.

 

[삼엽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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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6년 02월 28일자]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최덕근 교수팀은 지난달 24일 충북대에서 열린

한국고생물학회에서 삼엽충에 대한 5편의 논문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최교수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강원도 태백지역에서 발견된 삼엽충들은

1944년 중국 랴오닝(요녕)성에서 발견됐던 것과 같은 것으로

당시 북중국과 한반도가 붙어있었음을 의미한다.

 

최교수팀은 최근 2~3년 동안 중국 산둥지역과 강원도 지역의 삼엽충을 함께 연구했다.

두 곳에서 발견되는 삼엽충이 거의 같은 모양이며 이들 지역의 특징적인 종류가 많다.

 

이들은 전세계적으로 북중국과 강원지방에서만 발견되는 고유종이다.

최교수는 “5억년전 한반도와 북중국이 속한 중한지괴가

곤드리아 대륙에서 약간 분리되어 있었다는 가설이 있는데

삼엽충 화석으로 미루어볼 때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2281803321&code=930401

 

 

 

한반도-만주-산동반도

위지역은 5억년전에 중국대륙에서 따로 떨어져 있던 별개의 대륙.

오랜세월이 흐른 후

고조선때에도 한민족은 주로 위지역을 영역으로 살아간다.

 

지금은 한국의 영역이 한반도로 축소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은 만주를 그리워한다.

 

모든 결과는 다 원인이 있는 것인가 보다.

 

<내용출처 : 세계속의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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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고구려 전성기에 비해서 서쪽으로 영토를 많이 잃었다.

하지만 요동부터는 결사적으로 지키고 있다.

왜 그런가.

 

[고인돌 분포도]

 

위 그림을 보면 발해가 왜 요동부터는 결사적으로 영토를 수호했는지 알 수 있다.

요동부터는 절대 빼앗길 수 없는 전통 한국땅이었기 때문.

 

드라마에서 안시성주 양만춘은 말한다.

" 보급이 충분치 않더라도 이 곳을 지키다 죽는 것이

요동을 지키는 고구려 무사의 숙명이다."

 

비록 드라마의 대사지만 실제도 그와 같았을 것으로 본다.

 

발해는 스스로를 발해라 부르지 않았다.

발해인들은 스스로를 [고려], [대진국]이라 불렀다.

[고려]라는 말은 [고구려]라는 말.

사실 [고구려]의 정식 명칭으로는 [고구려]보다

[고려]라는 말이 더 많이 쓰였다.

옛 역사책에도 고구려는 [고려]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나온다.

 

즉 발해가 스스로를 [고려]라 부른 것은

발해가 [고구려의 부활]이라는 것을 확실히 한 것.

[대진국(大震國)]이라는 말은 고조선의 삼한(三韓) 중 [진한]을 계승했다는 말.

 

 

발해 당시에는 남쪽에 신라가 있었고

신라는 옛 마한의 영역에 존재했다.

그러므로 발해는 스스로를 [진한]이라는 의미에서  

[대진국(大震國)]이라고도 불렀던 것.

 

부여, 고구려,백제, 신라의 말은 모두 같았고 통역이 필요없었다.

물론 중국과는 말이 달랐다.

 

후에 궁예가 나라이름을 [마진국(摩震國)]이라 했던 것도

마한과 진한의 영토를 모두 회복하겠다는 소리.

 

이처럼 고대 고인돌 문화 영역인 마한과 진한은

한민족의 고유영역이었고

그래서 지금도 한국인이 즐겨부르는 노래가사에도  

다음과 같은 귀절이 나오는 것일 것이다.

 

<내용출처 : 한국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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