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대왕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 까지 이르고 대왕의 위력은 사해에 떨쳤다 "
- 광개토태왕 비문 제 1면 5행 -

불과 18세의 소년왕으로 즉위하여 39세의 청년왕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광대한 영토를 정복한 최대의 정복군주였다.

각 부족이 관할하던 전사집단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국왕 직속부대와 각 나부 소속부대로 나뉘어있던 고구려의 이원적인 군사체제가 국왕의 군대이자 국가의 군대로 일원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양서 동이열전 '고구려조'는 광개토대왕이 장사,사마,참군의 관직을 신설했다고 기록했다.
장사란 중국 진나라 때 만든 관직으로 여러 사관의 우두머리라는 뜻인데 이는 광개토태왕이 그만큼 역사를 중시했음을 말해준다. 사마는 군사에 관한 사상을 관장하는 관직이며 참군은 군사에 관한 일을 보좌하는 참모기능의 관직이다. 광개토태왕릉비에는 왕사라는 관직명이 나오는데 이는 제갈량처럼 군사에 관해 자문하는 직책이다.


재위2년 (392)
 평양에 9개의 사찰을 건립했다.
백제의 관미성을 빼앗았는데 이듬해 백제의 왕숙 무가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이를 되찾기 위해 쳐들어왔을 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태왕이 정예기병 5천을 거느리고 역으로 공격하여 패배시켰다고 적었다. 관미성을 포위한 백제군을 기습해 패퇴시킨 것이다.

고구려왕 담덕이 4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 북변을 공격해 석현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백제의 진사왕은 담덕이 용병이 능하다는 말을 듣고 감히 나가 맞서 싸우지를 못하니 한수(한강)이북의 여러성이 함락되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 8년조 기록 -


재위 3년 (393) 백제가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내침하자 광개토 태왕은 정예기병 5천을 거느리고
이를 격파하였다.

재위 4년(394)에도 백제와 패하(지금의 예성강)에서 겨루어 대파하고 8천여명을 사로잡았다.
재위5년 (395) 서북방 거란족이 거주하는 요하 상류지역인 염수 방면으로 진출하여 600-700영을 격파하고 개선했다.

재위 6년(396)에도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다. 이때 백제의 58성과 700촌을 함락시키고 서울을 공략해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성하의 조약을 맺고 남녀 1천명과 왕의 동생과 대신 열명을 인질로 잡고 돌아왔다. 181p


영락 10년조(400)에는 광개토태왕이 신라 가야지역을 점령한 백제왜 연합군을 물리치고 신라를 구원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광개토태왕은 신라의 구원요청으로 5만 대군을 파견해 신라의 경주 부근까지 이르렀고 그곳을 정령하고 있던 왜군은 고구려 구원병을 보고 달아났다.
고구려군은 낙동강 유역의 임나가야까지 추격해 종발성을 함락시키고 신라군에게 지키도록 했다.
고구려는 신라 구원을 명분으로 출병해 죽령 남쪽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실성을 죽이고 눌지를 세우는 등 신라의 왕위 계승까지 개입했다.

후연의 모용성은 3만 군사를 이끌고 표기대장군 모영희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시키고 700여리를 빼앗았다.광개토대왕은 곧 반격에 나섰다.
재위 11년 광개토태왕은 군사를 보내 숙군성 (지금의 요녕성 북진)을 공격해 연나라 평주자사 모용귀에게서 성을 빼앗았다.

광개토태왕은 13년(403) 겨울 11월에도 후연을 공격했다.

광개토태왕 14년(404) 정월에는 연왕 모용희가 요동성을 공격하는 등 다툼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후연황실에 중위장군 풍발이 용성으로 잠입해 후연의 모용희를 죽이고 석양공 고운을 추대해 임금으로 삼는 사건이 있었다.고운은 고구려 출신이었다. 고운은 고구려인 고화의 손자로 무예가 뛰어나 태자 모용보를 시위하게 되었다. 고구려와 영토문제로 다투던 후연의 국왕으로 고구려 출신이 즉위한 것이다. 광개토태왕은 재위 17년 사신을 북연에 보내 축하하는데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종족의 정을 베풀었다"고 전한다.

재위 14년 (404) 왜는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의 대방지역을 침입한다.  광개토태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전해 왜 백제 연합군을 궤멸시켰다.

재외 16년(406) 후연에 대한 보복전을 전개해 잃어버린 땅을 모두 회복하는 것은 물론 대릉하 유역까지 장악할 정도로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재위 17년(407) 5만 대군을 보내 백제의 6개 성을 빼앗는 동시에 갑옷 만벌과 많은 무기 노획.

재위 20년(410) 지금의 목단강 유역의 동부여를 정벌


광개토대왕이 조공을 했다고?

삼국사기는 "광개토대왕이 재위 9년 봄 정월에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2월에 연나라왕 모용성이 광개토대왕의 예절이 오만하다고 하여 스스로 군사 3만명을 이끌고 습격했다"고 전한다.
광개토대왕이 1월에 조공을 보내자 다음달 무례하다고 공격했다는 것이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는 중국의 역사에 편입된 여러 나라들과 바깥나라들 사이의 외교관계에 대한 중국의 사서 표기 방식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외국에 사신을 보내면 무조건 '조공을 바쳤다'고 표기하는것이 상호 외교관계에 대한 중국식 사서표현이다.
대등한 외교 관계도 중국 사서들은 무조건 '조공을 바쳤다'는 식으로 표기하는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사신을 보내 다음날 후연이 '예절이 오만하다'며 공격했다는 것은 고구려의 사신이 조공사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뜻한다. 오히려 후연 국왕 모용성이 분노할 만한 요구를 한 것이다 .
아마 영토문제였으리라.

 

<내용출처:한류열풍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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