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 분포도]

 

한반도는 세계고인돌의 절반이상이 존재하고

가장 오래된고인돌도 존재하는 (전남 화순 - 8천년전 것.)  

자타가 공인하는 고인돌 원조국.

 

위 그림을 보면 왜 고구려가 [요동]을 그토록 지키려 했던가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특히 [요동]부터는 절대 빼앗길 수 없는 전통 한국 땅이었기 때문.

 

산동반도에도 일찍부터 고대한국의 문명이 전파된 것을 알 수 있다.

[동방불패(東方不敗)]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도 알 수 있다 하겠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산동인은 뛰어나다]는 는 말을 흔히 해왔다.

공자도 산동 출신.

 

[고인돌을 만드는 사람들] 즉 [고대 한국인들]은 일본으로도 건너가는데

그게 약 2천 4백년전.

그 때 주로 북규슈 지역으로 건너가는데

일본에는 그때서야 비로소 금속문명과 쌀농사가 전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일본의 [야요이(彌生)문명]이라는 것.

약 2천 4백년전 한반도 남부인들이면 [마한]사람들.

( 마한, 진한, 변한 즉 삼한(三韓)이 [고조선연방]을 이루고 있었다.

마한은 고조선이 문을 닫은 후 다시 따로 독립하여 5세기 까지도 독립국으로 존재.)

 

이런 이유로 일제는 [마한 역사]에 대해서 철저히 파괴, 축소 공작을 감행한다.

자신들에게 금속문명과 쌀농사를 처음 전해준 것이 [마한]인데

그 사실이 너무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

사실 이것은 일본 지식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지독한 '역사 컴플렉스'를 안겨주었다.

 

그래서 일제가 선택한 공작방법은

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의 한반도 (특히 중부 남부 지방)에는 

별다른 문명국가가 없었던 것처럼 조작하는 것.

 

고구려, 백제, 신라가 대강 2천년전에 건국된 나라들이기 때문에 

2천 4백년전에 자신들에게 문명을 전해준 사람들은 될 수 없다는 점

이것을 그들은 노렸을 것이다.

 

그래서 숱한 마한의 유물, 유적들이 백제, 신라 등의 것으로 '둔갑'된다.

 

그 중에 하나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아리랑2호에서 본 풍납토성 (서울 한강 이남)]

 
풍납토성은 둘레 3,740m( 약 3.7 킬로미터)에
성벽은 밑바닥층의 너비가 50~60m,
높이는 원래 15m ( 6층 아파트 높이)의 거대한 성벽.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 발표)

 

 

풍납토성

 

출처 - http://cafe.naver.com/hisda

 

위 사진은 지금 남아있는 풍납토성의 성벽.

풍납토성은 돌을 거의 안쓰고 거의 [고운 모래]로 쌓은 성인데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저렇게 건재하다.

그 사실 자체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불가사의라 하겠다.

 

그런데 풍납토성이 기원전 1세기

즉 2천1백년전부터 쌓은 성이라는 것이 보고됐다.

---------------------------------------------------------------- 

서울대 최몽룡교수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풍납토성 서벽 발굴조사 지도위원회에서
“탄소방사성연대 측정결과와 삼중의 환호·판축토성·제사터·회청색경질토기 등
발굴유물을 볼때
풍납토성 축조연대는 기원전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확인됐다”고 보고했다.
[문화일보 2003-03-19 ]

-----------------------------

 

서기전 1세기면 백제가 건국도 하기 전.

즉 백제 이전에 이미 풍납토성이 있었다는 얘기.

 

고구려, 백제의 성은 모두 돌로 쌓은 성들.

그런데 풍납토성은 돌이 아니라 모래로 쌓았다.

( 모래에다가 뭔가를 섞어서 콘크리트 처럼 만든것으로 보인다.)

 

즉 풍납토성은 백제가 쌓은 성이 아니라

마한의 성이라 보는 것이 옳다 하겠다.

 

나중에 백제가 풍납토성을 쓰긴 했겠지만

풍납토성을 만든 것은 마한이라는 얘기.

 

백제는 서기 475년까지 수도를 남한 땅으로 옮기지 못한다.

이는 마한이 그만큼 왕성했다는 것.

 

 

[초기 백제의 이동]

( 위에 나오는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이 아니라
고조선의 일부였다가 후에 독립한 [최씨 낙랑국]을 말한다.
[예성강]은 [위례성강]의 준말 정도로 보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13년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 나라(백제)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위에서 온조왕은 한수(漢水) 남쪽에 하루만에 다녀온다.(어제 순행)

청천강에서 한강까지 하루만에 왔다 가기는 어렵다.

즉 위의 한수(漢水)는 한강이 아니라 대동강이라 봐야할 것이다.

 

한국고대사에서 한수(漢水)라 불린 강은 3개.

 

1. 한강

2. 대동강

3. 압록강

 

온조왕은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한다.

 

마한과 백제는 상당히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다.

마한은 그전에 변한, 진한인들에게도 우호적으로 땅을 나눠주더니

백제에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는 삼한이 [고조선연방]이었던 사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몽촌토성 역시 마한이 만든 성으로 봐야할 것이다. 

 

 

몽촌토성 지도  

 

 

몽촌토성

 

 

몽촌토성 산책로 진입 계단

 

 

무너진 몽촌토성 성벽 위로 만들어진 산책로.

저게 야산이 아니라 사람이 쌓아올린 성벽. 
원래는 저것보다 더 큰 거대한 성벽.
몽촌토성 성벽도 풍납토성 성벽처럼 거대한 것.

 

 

[풍납토성 몽촌토성 위치도 - 서울시 송파구]

 

풍납토성 몽촌토성은 한강 이남을 [절대방어]하려는

마한(馬韓)의 성으로 봐야할 것이다.

 
한반도는 기후도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곳이고
정치적으로도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
 
고대사적으로 한국은
남방식고인돌, 세형동검으로 대표되는 마한과 
북방식고인돌, 비파형동검으로 대표되는 진한(변한 포함)의
끊임없는 융합으로 이루어진다.

 

 

 

이 두 지역은 뿌리가 같기 때문에
결국 단군왕검 때에 고조선연방으로 통합된다.

 

 

  마한 - 오리지날 [세형동검 + 남방식 고인돌] 지역 

 진한 - 오리지날 [비파형동검 + 북방식 고인돌] 지역 

고조선연방 - 포괄적 [ 세형동검+ 비파형동검] 지역 

 

 

 

즉 마한이나 진한이나 고대황해대평원 마문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고조선연방으로 통일될 수 있었고
(마한과 진한의 중앙인 대동강 지역에 수도를 정함)
진한(변한)에서 사람들이 이동해 올 때도 별다른 갈등없이
마한은 땅을 떼어주게 되고
나중에 백제에게도 순순히 땅을 떼어주게 된다.
  
한국은 [마한의 농경문화]와 [진한의 기마 유목문화]가 어우러져서
가장 바람직한 문화의 융합 발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겠다.
 
이는 [마한의 대청마루 문화]와 [진한의 온돌문화]의 융합에서도 보이듯이
서로 다른 두 문화의 장점을 아우르는 문화를 탄생시킨다.
이리하여 한반도에는 대청마루(여름 대비)와 온돌(겨울 대비)가 공존하게 된다.
 
명검을 만들기 위해서는 쇠를 뜨겁게 달구었다가 식혔다가를 반복하면서
망치 등으로 계속해서 내리쳐주어야 한다. 
그 과정을 많이 할 수록 명검이 된다.
 
한국은 기후적으로도 뜨거운 여름과 차가운 겨울이 계속해서 반복되며
역사적으로 계속되는 강대국들의 들이받음에 의해서   
계속해서 단련이 되어 왔다 하겠다.
 
결과적으로 한국인은 세계 어디를 가도 가장 적응을 잘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아이큐도 세계 1위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해방 이후 한국이 세계역사상 유래없는
초고속 발전을 하고 있다는 것이 우연이 아닐 것이며
앞날도 밝다 하겠다.

 

<내용출처 :  세계속의 대한민국!>

 

 


♡ 제 블로그가 유용하시면 구독해주세요~^^
♠그냥 가시지 마시고 댓글을 써주시면 블로거는 큰힘이 된답니다~~*^^*♠

+ Recent posts